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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28화 (128/242)
  • 128화

    그 시각, 메릴린은 도로테아에게 블레인 백작 부인의 부탁을 전달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의 티 파티에 참석했던 이들이 저마다 손수건을 적셔 가며 남작가를 덮친 불행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도로테아는 덤덤했다.

    늘 그렇듯 무료하고 나른한 얼굴을 한 채,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의자에 한껏 기대어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였을 뿐.

    “별로 내키지 않으시는군요?”

    “내키지 않는다기보다는…….”

    조심스런 메릴린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던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제게 무엇을 바라는지 잘 모르겠어요. 병을 낫게 하는 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그냥 희망에 기대어 보는 거예요. 어쩌면 영애는 의원이나 신관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흐음.

    턱을 괸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도로테아가 반대쪽으로 자세를 바꾸며 대꾸했다.

    “지금은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래요?”

    적잖이 실망이 담긴 메릴린의 얼굴을 본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그 어린 영애가 아직은 살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녀의 혼이 육신을 떠나고 나면 그때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많을 테죠. 천도제(薦度齋)를 치러 무사히 저승길로 올려 보내 줄 수도 있고, 외롭다면 함께 갈 동무를 찾아 줄 수도 있고.”

    “아직 살아 있는 영애거든요!”

    그저 밤마다 개 흉내를 낼 뿐이지.

    메릴린이 질린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테이블 위의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쩌면, 진짜로 어쩌면 영애와 같은 자질을 가졌을 수도 있잖아요. 영애도 정령사가 되기 전에 열이 나고 성격도 확 바뀌었다면서요.”

    그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도로테아는 알 수 없는 눈을 하고서 나직이 답했다.

    “저와 같은 자질을 가졌다면 그건 그 어린 영애에게 희망이 아니라 더한 절망이 될 거예요. 몹시 애석하게도.”

    “……?”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메릴린이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메릴린은 제가 그들을 돕기를 바라시나요?”

    “말을 전한 것뿐이에요. 돕고 말고는 어차피 영애의 의지에 달린 문제잖아요.”

    도로테아가 빙긋 웃었다.

    “그럴 리가요. 설령 내키지 않는 일이라도, 만일 영애가 그들을 도우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메릴린이 말을 끊고 정색했다.

    “전 안 그럴 거예요. 그리고 꼭 내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맞아요. 자꾸만 사람들이 메릴린과 제 사이가 대단히 친밀한 줄 알더라고요.”

    그게 다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둔한 네 외사촌 때문이거든!

    미간을 좁힌 메릴린이 입술을 달싹이자 도로테아가 여유롭게 덧붙였다.

    “사실은 저 혼자 메릴린에게 매달리고 있는 건데.”

    “그런 말도 하지 말아욧!”

    그녀의 필사적인 거부에 도로테아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농후한 향 아래에 깔린 옅은 달콤함, 그 뒤에 따르는 씁쓸함까지.

    기분 좋은 차향에 젖어 든 그녀가 만족스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메릴린을 통해 저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은 널리고 널렸죠. 지난번에는 무려 5황자의 약혼녀가, 자신이 후원하는 살롱에 와 달라는 초대장을 보냈다면서요.”

    “…….”

    “적당히 넘기고 모른 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말로 옮겨 내게 전하는 일은 드문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그쪽에 마음을 쓰는 것 같아서요.”

    “그야 쓰이기는 하죠.”

    메릴린이라고 해서 모르지 않았다.

    스스로를 중간 다리 삼아 하이클레어 후작가로 향하려는 군상들은 수없이 많았고, 이렇게 말을 전한 것이 알려지게 되면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달려들 것임을.

    “그렇지만 블레인 백작 부인은 진심으로 절박해 보였어요. 정치적인 속셈이나 계산 같은 것을 가진 것 같지도 않았고요.”

    파인트 남작가 전체가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보통의 귀족들은 그런 해괴망측한 일이 일어나면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증상을 쉬쉬하고 몰래 의원을 구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남작은 어린 딸의 괴상한 증상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의원과 신전을 향해 도움을 청했다.

    그건 적어도 가문의 체면보다도 딸을 더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일은 흔하지 않잖아요.”

    귀족 가문에서는.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티 파티에 모여든 사람들 모두, 저마다 진심 어린 위로의 말과 연민을 건네지 않았을 터였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불행이 빗겨 나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은 도와주고 싶죠.”

    메릴린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도로테아가 턱을 괸 채 느릿하게 답했다.

    “좋은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일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죠. 어쩌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기다릴 수도 있어요.”

    “거절하시려고요?”

    생긋 웃은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손을 뻗어 메릴린의 어깨에 달라붙었던 새까만 기운을 가볍게 털어 낸 도로테아가 말했다.

    “남작가에 기별을 넣어야겠어요. 조만간 그 귀한 막내따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요.”

    *   *   *

    근심이 가시지 않아 늘 우중충하던 파인트 남작가에 모처럼 활기가 흘렀다.

    그저 만나 보기만 할 뿐이라는 아주 작은 희망에도 남작가의 사람들 모두가 밝아진 얼굴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들어섰다.

    “어머니! 정말입니까? 영애께서 클레어를 만나 보시겠다고 했다고요?”

    모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남작 부인이 수선스레 들어오는 아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수척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모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하녀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다들 안도했다.

    “제가 그랬잖습니까. 틀림없이 정령일 거라고요.”

    멀쩡하던 귀족 영애가 밤만 되면 개 흉내를 내다니.

    그런 병은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내로라하는 아카데미의 교수들도 고개를 내저었고, 신관과 의원들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이 아이의 병은 깊어져만 갔다.

    이제는 아예 아이를 침대 기둥에 묶어, 침대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개 흉내를 내는 정령은 들어 본 적도 없잖니.”

    “전에 후작 영애의 정령을 목격한 지인이 말해 주더군요.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정령은 사람의 아이 형상을 하고 있는데, 몹시 장난기가 심하고 어디로 튈지 모를 만큼 별나다고요.”

    정령마다 정말 ‘성격’이나 ‘생김새’가 다른 거라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듣자 하니 후작 영애 또한 어릴 때 몹시 아팠다면서요.”

    클레어 또한 정령사의 자질이 있어 이런 고초를 겪고 있는지도 몰랐다.

    들뜬 아들의 말에 남작 부인이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어린 막내딸에게 오히려 축복이 내리는 셈이니.

    “호들갑 떨지 마라. 혹여 결과가 좋지 못하면 어머니께서 더 상심할 수도 있어.”

    장남의 속삭임에 잠시 입을 삐죽이던 둘째가 이내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잠잠해졌다.

    남작의 헛기침과 함께 집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알려 왔다.

    “후작 영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문을 향해 쏠렸다.

    ‘이게 그 후작 영애인가.’

    사교 활동을 ‘거의’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하지 않는 터라 말을 나눠 본 이들조차 많지 않다는 후작 영애는, 무수한 소문 속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신비로운 느낌이 감도는 남빛 눈동자, 반짝이는 머리카락까지.

    독특한 존재감을 뽐내는 만큼 한눈에 시선을 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가냘픈 체구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하이클레어가 사람들 특유의 상대를 내리누르는 위압감이나, 탄성이 나오게끔 만드는 아우라 같은 것과는 달랐다.

    마치 사자의 무리에서 태어난 얼룩말처럼, 서로 다른 종 같달까.

    “안녕하세요, 파인트 남작님.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라 합니다. 남작가의 여러분 모두 처음 뵙겠습니다.”

    “어, 어서 오시지요.”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남작이 그녀를 향해 말을 건네자, 도로테아는 특유의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저택에 들어섰다.

    호위를 맡은 우드와 무언가 잡동사니를 담뿍 들고 있는 제인, 그리고 메릴린이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 남은 구명줄을 바라보듯 저를 향한 백작 부인의 눈길에 도로테아가 미소 지었다.

    옹기종기 붙어선 가족들을 보아하니, 메릴린의 말마따나 귀족가답지 않게 가족들 모두 서로가 친밀하고 돈독해 보였다.

    *   *   *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례한 청이었음에도 이렇게 걸음해 주셨으니,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남작 부인의 말에 도로테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저택을 살폈다.

    그녀가 매의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남작의 장남이 조심스레 권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지요. 영애께서 방문하신다는 이야기에 최선을 다해 준비해 두었습니다.”

    넓은 회랑에 마련된 식사 자리를 마주한 순간, 메릴린은 남작가에서 마지막 희망을 향해 ‘모든 것’을 걸었음을 깨달았다.

    후작가에서조차 자주 본 적 없는 성대한 만찬이었다.

    고작해야 손님 네 사람과 주인 가족이 먹기에는 한참이나 과하다고 여길 만큼.

    “막내는…… 식사를 따로 하는 편이오. 최근에는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터라.”

    스스로의 해괴한 병증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아마 클레어 파인트 본인일 것이다.

    고귀한 귀족 영애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살아온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하루아침에 일어났으니.

    조심스런 설명에 도로테아는 말없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제인, 여기 앉으렴.”

    그녀가 직접 제 옆자리의 의자를 빼 주자, 맞은편에 앉으려던 남작 부인이 멈칫했다.

    좀 전부터 흘깃흘깃 일행을 살피던 둘째 아들은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소녀는 사용인이 아닙니까?”

    “제 저택에서는 그렇죠. 그렇지만 지금은 엄연히 제 일을 돕는 조수로 와 있는 것이니까요. 남작님께서는 제 힘을 빌리고 싶어 하셨고, 제인은 그런 저를 도와줄 예정이니, 제인 또한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도로테아의 말에 물음을 던졌던 남작이 입을 다물었다.

    다들 그녀의 독특한 논리를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세를 낮춰야 하는 쪽은 남작가였다.

    테이블 옆에 서서 대기 중인 하녀들은 신기한 기색으로, 태연하게 식사를 시작한 제인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만찬은 아주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남작님.”

    두 번째 스테이크를 접시에 덜어 나이프로 먹기 좋게 썰고 있던 도로테아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스윽, 스윽.

    고기를 조각내는 가벼운 손놀림과 함께 그녀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막내따님의 독특한 증상에 대해 짚이는 바가 전혀 없으시다고요?”

    저택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꺼낸 ‘제대로 된 질문’에 남작이 한결 안심했다.

    적어도 영애는 진심으로 그의 막내딸을 만나 볼 의향을 갖고 찾아왔다는 뜻이니까.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영애. 으슥한 밤이 되면 그렇게 날뛰던 아이가 아침이 되면 다시 멀쩡해집니다.”

    염려로 가득 찬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잠시 손을 멈췄다.

    “만일 그 막내따님이 제 도움에도 쾌차하지 못한다면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본 남작이 말을 하기도 전에 곁에 있던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곁에 두어야지요. 우리 클레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제 자식입니다. 형제자매들이 있고 제가 살아 있는 이상 그 아이는 괜찮을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 가득 애틋한 모정이 담겨 있었다.

    아무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던 도로테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가족이네요. 부디 가족분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저 또한 기도해야겠어요.”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옆에 앉은 메릴린은 차마 대화에 끼지 못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식사에 열중했다.

    말을 전했으니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도로테아는 뜻밖에도 함께 가자며 권유했다.

    ‘말을 전한 내게도 책임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굳이 이 자리에 자신까지 필요한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오물오물 음식을 씹고 있는 메릴린의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잘린 고기 한 조각이 얹어졌다.

    도로테아가 생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먹어요. 이따가 배고프지 않게.”

    그저 곁에 서 있기만 할 텐데 배고플 일이 뭐가 있다는 건지.

    호의 어린 말 속에 담긴 뜻을 읽어 내려다 포기한 메릴린이 찜찜한 얼굴로 고기 조각을 입에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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