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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67)화 (67/242)
  • 혼술사 도로테아 67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오는 메릴린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도로테아는 여전히 창백하고 초췌하지만 어딘가 안정된 듯 보이는 메릴린을 살폈다.

    “백작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죠.”

    도로테아는 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메릴린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눈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니 어느새 그녀의 마음에 연민이 스민 모양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네?”

    멍하니 되묻는 메릴린에게 도로테아가 상황을 다시금 깨우쳐 주었다.

    “메릴린은 저들의 일에 휘말린 거예요. 백작가에 죄를 묻고 싶다면 이대로 치안대로 가 사실을 고하거나,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죠.”

    “무슨…….”

    메릴린의 눈동자가 몹시 흔들렸다.

    수척한 얼굴의 소백작이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음울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말을 잃은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메릴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렇지만 백작 부인이 저런 상황인데…….”

    “이곳 사정을 봐줘야 할 이유는 없죠.”

    퍽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눈을 하고 있는 소백작에게서 눈을 떼며 입을 열었다.

    “저자는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의 목숨을 귀히 여기면서도, 이미 악귀가 된 동생에게 죽임을 당한 무고한 이들은 전혀 책임지지 않았으니까요.”

    메릴린은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은 자신이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메릴린, 착각 말아요. 메릴린이 습격에서 살아남은 건 피해자들 중 당신이 유일하게 치안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며, 튼튼한 마차에 타고 있었고, 시녀를 대동한 상태였기 때문이에요.”

    다른 피해자들과는 다르게 그녀가 좀 더 많은 ‘대비’를 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위험할 때에 호위를 대동하거나 어두운 밤길을 되도록 피할 수 있는 귀족들과는 달리, 위험을 감수하고도 거리를 홀몸으로 다녀야 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아직도 불안에 떨며 거리를 다니는 이들에게도, 백작 부인의 남은 시간이 더 중요할까요?”

    “…….”

    도로테아의 지적에 메릴린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저들의 그 ‘배려’는 백작 부인을 무지한 인간으로 만들었어요.”

    체이스 게르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망자에게도, 평온을 앗아 갔다는 점에서 죄를 지었죠.”

    비록 레이몬드 게르만이 사랑에 빠져 객사를 했다고는 하나, 육신을 유린당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다.

    침묵하던 메릴린이 불쑥 물었다.

    “영애는 어째서 제게 이런 사실들을 알려 주시는 거죠?”

    “당신이 겪었던 일들이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알 자격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들의 업(業)을 청산하는 것 또한 메릴린의 몫이다.

    도로테아는 제 이득을 위해 뛰어든 셈이지만 그녀야말로 무고하게 휘말린 셈이니.

    “말했었잖아요. 데인의 사고에 휘말린 당신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겠다고.”

    “그게…… 이것이라는 말씀인가요?”

    미소를 머금은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릴린이 다시 묘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살폈다.

    말없이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메릴린이 불쑥 물었다.

    “이미 죽었다면…… 제가 본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 움직였던 거죠?”

    단번에 핵심을 꿰뚫는 물음에 도로테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티 파티에서 실언을 했던 아둔함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영민한 물음이었다.

    “그는 죽었어요.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레이몬드의 육신이 악귀의 그릇이 되어 버린 것뿐이죠.”

    레이몬드의 육신을 차지한 것은 원한(怨恨)에 사무쳐 날뛰는 귀와는 달랐다.

    그것은 이미 이승과의 연이 끊어진 지 오래이며, 마(魔)로서의 본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부정함의 찌꺼기 그 자체였다.

    “이름을 찾아 주려 해도 이름 따위가 있을 리 없고.”

    애초에 부정된 기운들이 쌓이고 모여 만들어진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니, 그것에게는 인간이 갖는 오욕칠정(五欲七情)이 없었다.

    육신은 그 부족함에 늘 허기지고, 그렇기에 살아 있는 자를 탐한다.

    “살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탐하는 거예요.”

    온전한 넋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탐한들, 육신의 부족함을 채울 수 없다고 알려 준들 받아들일 리 없다.

    이는 그저 본능에 따른 행동일 뿐, 어떠한 목적의식이나 목표를 갖고 행하는 것이 아니니까.

    도로테아는 메릴린의 목을 감싼 검은빛으로 일렁이는 실선을 바라보았다.

    악귀를 마주한 자에게 남겨진 희미한 흔적이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

    “메릴린, 악귀와 마주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흔적’이 남아요.”

    메릴린의 손이 도로테아가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목을 더듬거렸다.

    “밤마다 당신이 꾸는 꿈, 때때로 드는 섬뜩한 기분은 대개 악귀가 그 흔적을 찾아 헤매고 있음을 뜻하기도 하죠.”

    “아, 아…….”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을 마주한 도로테아가 담담하게 알려 주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서 그 흔적을 지워 줄 수 있어요.”

    “그…….”

    “두 번 다시 레이몬드의 얼굴을 한 악귀 따위가 당신을 먹으려 들지 않도록.”

    멈칫한 메릴린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법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던 그녀가 무언가 생각에 이른 듯 얼굴을 구겼다.

    “지금 밖에…… 만일 그 남자의 얼굴을 한, 그것이 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거라면…… 제 흔적을 지우고 나서 또다시 다른 ‘먹잇감’을 찾을 거라는 뜻인가요?”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하고픈 말을 콕콕 집어내니 어찌나 편한지.

    게다가 겁이 많은데도 꾸역꾸역 진실을 알고자 하는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은 것까지도 마음에 쏙 들었다.

    꼭 이런 이들이 제 무덤을 제 손으로 파는 법인데.

    대답 대신 웃고 있는 도로테아를 보던 메릴린이 절박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영애는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 거…… 맞죠?”

    “맞아요. 나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죠.”

    다만.

    “악귀는 비록 귀(鬼)로 분류되지만 혼이 아닌 존재. 그저 인간의 흉내를 낼 뿐, 혼의 근원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아마도 내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사신을 권속으로 삼은 그녀는 악귀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 그 이상이다.

    미꾸라지처럼 숨는 놈을 앞까지 끌어내려면, 적어도 그녀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악귀가 다른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상황이어야 한다는 뜻.

    “…….”

    여전히 창백한 메릴린의 얼굴이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서린 감정을 읽은 도로테아가 나지막이 일러 주었다.

    “이건 메릴린이 마음을 쓸 만한 일은 아니에요. 당장은 아니어도 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

    “그사이에 또 사람이 죽을 수 있어도요?”

    제 말을 가로막은 메릴린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럴 수도 있죠.”

    메릴린은 마르고 갈라진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체념한 듯, 입을 열어 도로테아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영애께서 ‘그 존재’가 피해 다닐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면, 저 또한 위험하지 않게 보호해 주실 수 있지 않겠어요?”

    한때 자신을 견제하고, 또 한때 자신 때문에 몹시도 곤란한 상황을 겪었던 귀족 가문의 영애가 믿는다는 단호한 의견을 피력하자, 도로테아는 잠시 침묵하며 몹시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듯 남색 눈동자를 끔뻑이다…… 옅은 미소를 띠고서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물론이죠.”

    *   *   *

    어둑해진 저녁의 거리는 몹시도 한산했다.

    특히 중상류층이 자주 다니는 상점들이 모여 있는 번화가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마지막 습격지가 이곳이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모두가 기피하는 그 거리를, 메릴린은 그날과 비슷한 형태의 마차에 탄 채 가로지르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초조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는 메릴린을 안심시키는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제인’이라 소개한 소녀는 익숙하게 메릴린의 드레스를 정리해 주며 종알거렸다.

    “아가씨가 마음먹으신 일이 실패하는 경우는 없었거든요.”

    “저는 사실, 영애가 마차에 함께 타 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지켜 준다는 약속을 할 때에는 당연하게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위험이 있을 때에 적절하게 나서서 먼저 적을 상대해 주는 것.

    메릴린이 도로테아에게 바랐던 것은 그런 것이었는데.

    사실 단둘이서 마차에 있는 것도 끔찍했지만, 도로테아 없이 이 거리에 나서자 마음이 막막하고 두려운 감정으로 가득 찼다.

    자신이 이토록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존재를 갈망하게 될 줄이야.

    그런 메릴린의 말에 제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게 미리 다 말씀하셨어요. 아가씨의 ‘존재감’이 너무 강해서 자신이 곁에 있으면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악귀가 접근해 오기 힘들다고요.”

    “그래도 가까이는 계시는 거겠죠?”

    “염려 마세요. 아가씨는 필요한 순간에 아주 빨리 뛸 수 있는 분이셔요.”

    “…….”

    몹시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메릴린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다듬으며 제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직 어려 보이는 나이에도 고생을 많이 한 듯 그녀의 손은 거칠고 단단했다.

    “도로테아 영애가 직접 제게 붙여 주신 분이니까, 그…… 대단한 능력을 갖추셨겠죠?”

    믿을 만하니까 제게 붙여 준 거겠지.

    도로테아처럼 악귀가 나타나는 순간 정령을 부릴 수 있다든가.

    몇 마디 말로 악귀를 내쫓을 수 있다든가.

    제인이 눈을 끔뻑이다가 수줍게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저는 우리 아가씨에 비하면 막 이쪽에 입문한 입장이에요.”

    “입문…… 이요?”

    메릴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정령 님을 다루다니요. 그건 아가씨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죠. 저는 제 혼력을 깨우치는 일에도 늘 어려움을 느낄 만큼 힘이 쥐꼬리 수준인걸요.”

    “쥐꼬…….”

    “그러다 보니 악귀가 든 육신이 저한테 위협을 느끼진 않을 테니까, 마구마구 달려들어 올 거예요.”

    “달려들……?!”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을 느낀 메릴린이 눈으로 마차의 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

    이상하게도 올라탈 때만 해도 멀쩡하던 마차의 문고리가 이미 그녀의 속내를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뜯겨 나가 있었다.

    “여, 여기 문손잡이가…….”

    “마차가 꽤 요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잘못해서 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안에 탄 저희들이 다치니까요. 미리 문을 막아 둔 거예요.”

    아예 도망조차도 칠 수 없도록 마차에 갇힌 셈이었다.

    메릴린은 제 얼굴에서 핏기 가시는 소리가 사아아, 하고 귓가에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도로테아는 제법 떨어진 거리의 건물 꼭대기에서 마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선 콜린이 나직이 물었다.

    “상관없는 타인을 끌어들이는 것을 꺼리는 것 아니었나?”

    메릴린 레어는 친인척도 아닐뿐더러 어쩌다 보니 엮인 인물에 불과했다.

    ‘인과’를 운운하며 그 목에 남겨진 흔적을 지우고 돌려보내리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도로테아는 그녀를 마차에 태워 거리로 내보냈다.

    “본인이 직접 하겠다잖아.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한 거야.”

    메릴린 레어는 제가 엉뚱한 일에 휘말린 희생자라는 것을 알고서도 희한할 정도로 백작 부인에 대한 연민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분노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백작 부인을 다독인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악귀에 노출되는 ‘미끼’까지 자처했다.

    “희한하지 않아?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나에겐 첫 만남 이전부터 적의를 갖더니.”

    하마터면 제 목숨을 앗아 갈 뻔했던 이들에게는 연민을 보냈다.

    “인간이라 그런 걸까?”

    “내게 묻지 마.”

    전직 사신이 짜증스레 답했다.

    안 그래도 낮에는 입궁하여 로헨 왕국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과 관련해 이런저런 회의를 하느라 잔뜩 심신이 피로한 상황에, 밤에는 악귀를 처단하겠다며 끌려오는 신세라니.

    “그녀는 악귀와 마주했었으니까 그 존재의 무서움을 알아.”

    그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밤마다 악몽을 꾸고, 단 한 순간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한 채 벌벌 떠는 공포 속에서 피가 말리는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도 하겠다고 한 건 메릴린이야.”

    “그래도 거절할 수 있었다. 너답지 않게 일을 서두르는 까닭이 무어냐.”

    “레이몬드 게르만은 어리석음의 대가를 이미 죽음으로 치렀어.”

    괴로운 현실에서 도주하는 감정이었든, 철없이 들끓은 피 때문이었든 간에 그는 제 행동의 대가를 과하게 치렀다.

    이미 이승의 삶을 마치고 건너간 혼의 남은 육신.

    홀가분히 땅의 양분이 되어야 할 망자의 육신이 누군가의 장난질에 묶인 채 사람을 해치기 위한 존재로 거듭났다.

    “비록 육신에 불과할지라도, 제 의지 한 점 없이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는 것을 보는 게 싫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덧붙이자 콜린이 슬쩍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도로테아는 말없이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노려보았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안락함과 행복을 위해 희생되었던 전생의 기억이 속을 역하게 뒤집었다.

    도로테아의 품에서 쪼르르 빠져나간 피피가 거대한 낫이 되어 콜린의 손에 들렸다.

    “자, 사냥 시간이야.”

    저 멀리 먹음직스런 냄새를 맡은 악귀가 부정한 기운을 흩뿌리며 마차로 접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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