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 (63)화 (63/242)

혼술사 도로테아 63화

대강이나마 납득한 것 같은 데인에게서 눈을 뗀 도로테아가 메릴린에게 다시금 무릎을 굽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오늘의 일은 제 불찰이에요. 제가 미리 어느 정도 경고해 두었다면 저 바보가 아무리 앞뒤 생각이 없어도 영애를 끌어들이지는 않았겠죠.”

몹시도 정중했다.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은 되레 의아한 듯 눈을 굴렸다.

이렇게까지 사과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하긴, 귀족 사회에서는 신분과 가문의 위세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도로테아가 이보다 더한 무례를 저지른다고 해도, 메릴린은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할 것이다.

“레어 남작 영애.”

“…….”

“영애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요.”

혹시라도 파벌에 말려들까 봐.

그리고 괜히 얼쩡거리다 7황자의 분노를 다시금 되새기게 만들까 봐.

여러모로 몹시 마음이 어수선한 메릴린의 속내를 꿰뚫어 본 도로테아가 잔잔한 미소를 보냈다. 자신의 행동에 담긴 의미 따위를 추측하느라 바삐 돌아갈 머릿속을 좀 식혀 주어야겠지.

“난 그저 내 업의 대가를 이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치르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업이요?”

“인과응보를 믿는 거죠.”

도로테아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얼떨떨하게 저를 바라보는 메릴린에게 다시 한 번 웃어 주고 돌아섰다.

어느새 미행이 사라졌는지 곁에 온 프리드의 눈에 서렸던 예기가 사라져 있었다.

“데인, 진술이 끝나면 메릴린 영애를 저택으로 모셔다 드리고, 남작께 쓸데없는 일에 엮이게 만들어 몹시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씀도 함께 전해 드려.”

“영…… 애.”

홀린 듯 도로테아를 부르는 메릴린을 뒤로하고서, 그녀는 처음과는 달리 여유롭고 느긋한 걸음으로 타고 온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밤손님이 저택의 가장 고귀한 아가씨의 방문 앞에 섰다.

언제나 그렇듯 도로테아의 옆을 지키고 있는 프리드가 그를 알아보고 조용히 비켜섰다.

“늦었네.”

“생각 외로 그리 늦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보여?”

뒤집어쓴 후드를 벗은 필립이 소리 없이 다가와 그녀의 곁에 앉았다.

“당분간 우드를 데인의 곁에 붙여야겠어.”

“호신부는 제대로 먹혔다며.”

굳이 우드까지 붙일 까닭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콜린에게 이것저것 맡겨 놓은 것이 많은 터라 그를 보조하는 우드가 데인에게만 붙어 있게 된다면 꽤 곤란해할 것이 뻔했다.

바쁜 제 아버지를 위해 필립이 미약하게나마 한마디를 보태자, 도로테아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눈치가 없어 놈들의 ‘틈’을 보여 주는 데에는 좋을지 몰라도, 다른 이들을 휘말리게 하고도 모르는 건 문제지.”

필립이 옅게 웃었다.

도로테아가 말은 저렇게 해도, 메릴린이 사건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에도 사고 현장으로 득달같이 달려가지 않았던가.

호신부가 적시에 발동했으니 데인이 무사했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눈으로 확인해야 했겠지.

“그래서? 마차에 손을 쓴 자들에 대해서는?”

“목격자는 없어. 그렇지만 일 처리가 허술하긴 했지. 아무래도 우리가 쫓고 있는 인물들은 아닌 것 같아. 그들이라면 고작해야 용병 길드 따위에 일을 맡겼을 리 없거든.”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몰라도 필립이 길드의 의뢰서를 내밀었다.

도로테아는 의뢰서 하단에서 아주 익숙한 문양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안타깝게도 이번 일은 인재(人災)야.”

“우리 마차를 미행했던 것도 아무래도 이쪽이겠네. 만일 나였더라면 감 좋은 프리드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기척 없는 존재’를 보냈을 거야.”

저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접근할 때에는 배로 신중할 테니까.

모처럼 꼬리를 잡았나 했더니 인간의 발목이었다.

살짝 허탈해진 도로테아가 몸을 뒤로 뉘었다.

어린아이처럼 푹신한 이불에 몸을 맡긴 채 뒹굴거리던 그녀가 이내 간단히 답했다.

“내버려 둬.”

“그래도 되겠어?”

“조만간 만날 생각이야. 무슨 속내를 품고 있는지는 그때 알아내면 되니까.”

괜히 겁을 줬다 숨어 버리면 낭패가 아닌가.

게다가 모처럼 레번의 하얗게 질린 낯짝을 보게 될 기회를 놓칠 까닭은 없었다.

*   *   *

“네…… 가 왜 여기에…….”

싱글벙글한 얼굴로 극장 앞까지 마중을 나온 레번은 게르만 백작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는 인물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로테아가 기대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세련되어진 차림새와는 다르게, 돈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서 뒷주머니를 차려다 딱 걸린 얼굴.

심지어 도로테아는 몹시 친절하게, 밀려 올라오는 딸꾹질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는 레번에게 웃으며 인사해 주었다.

“저런, 어디 아프니?”

“아, 닙, 아닙니, 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참으려는 가상한 노력을 보던 도로테아가 백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극장으로 들어가시죠. 안내해 드릴게요.”

“영애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소.”

“뭘요. 저와 같이 극단을 후원해 주시겠다니 몹시 든든한 말씀이에요.”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신사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도로테아는 극장 안으로 들어서며, 입구에서 굳어 있는 레번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식사가 아주 맛있었으면 좋겠네.”

어쩌면 생의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는데, 만찬이라도 즐기는 게 좋지 않겠냐는 그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 레번이 마치 물처럼 주르륵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로테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까르르 웃고는 그대로 앞장서 걸으며 백작을 안내했다.

황자는 자신의 궁에서 일꾼들을 데려와 이 극장 건물을 보수했다.

그 분야에서는 가장 날고 기는 이들을 데려왔으니 건축물의 구조나 짜임새가 일반 건물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생각보다 단원이 꽤 많군.”

“그만큼 부모 없이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앞으로도 점점 더 많아질 거고요.”

“…….”

“폐하께서는 이들이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돕는 것 또한 귀족의 의무라 하셨죠.”

그 뜻을 알면서도 정작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귀족들은 드물었다.

직접 ‘하층민들을 돕는다.’라는 것이 귀족 체통에 손상이 온다는 게 첫 번째, 하층민들이나 보고 즐길 법한 저속한 오락에 손을 담그기는 싫다는 게 두 번째 이유.

‘자선회 모금 따위로 옷이며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야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당연히 더 좋은 일일 텐데도.’

도로테아는 이어 아이들이 지내는 숙소와, 공연 연습을 하는 연습실, 막 아래에 있는 대기실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노신사는 깊이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영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철두철미하게 이곳을 잘 운영하고 있군.”

“그런가요?”

“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으니 다들 예법을 몰라도 행동이 조심스럽고 태도가 불경스러워 보이지도 않소.”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도로테아가 불쑥 물었다.

“백작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후원하려 하시나요?”

단순히 돈을 후원하겠다면 그저 사람을 보내 수표를 건네거나 어음을 내밀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무려 백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직접 후원 의사를 밝히고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는 건 따로 바라는 조건이 있다는 뜻이겠지.

“좀 더 많은 귀족들이 이 극장에 후원을 하게끔 만들 생각은 없소?”

“이를테면?”

“내 아는 극작가가 몇 있소만. 지금과 같이 자극적인 요소들로만 가득한 극 외에도 제대로 된 공연을 올린다면 다른 귀족들도 지금처럼 극장을 꺼리지는 않을 거요.”

도로테아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나. 그가 바라는 바는 아주 분명했다.

쓸데없는 탐색전 따위 없이 올곧게 그녀를 향해 본론을 꺼내는 태도는 꽤 당당했다.

젊어서 사업을 했다더니, 어떤 일은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곧바로 원하는 바를 협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자글자글한 주름 가운데 유독 깊은 인문(人紋)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물었다.

“그건 지금 공연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는 의미시겠죠?”

“더 나은 공연을 만들도록 후원할 수 있다는 거요. 나는 영애에 비해 관객들의 취향을 알고 있으니까.”

“저는 이 극장을 귀족들의 놀이터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요.”

그들은 자신의 계급에 맞게, 그 누구나 볼 수 있는 쉽고 즐거우며 흥미로운 공연보다는 어렵고 난해하며 가끔은 그들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공연을 원할 테지.

그런 것을 보며 자신이 ‘격’ 있게 군다고 자랑스레 가슴을 뻣뻣이 내밀 꼴들이 눈에 선했다.

“지금 제가 올리는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게 귀족들의 수준에 맞지 않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아드님의 이름을 먹칠하고 게르만 백작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기 때문인가요?”

백작은 놀란 기색 한 점 없이,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도로테아와 눈을 마주했다.

고요하고 깊은 눈동자에는 살아온 세월만큼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고단하고 괴로운 삶의 흔적들이 엿보이는 그의 눈에서는 피로감마저 느껴졌다.

“영애가 먼저 그 아이에 대해 말해 주니 나도 한결 말을 꺼내기가 수월하군.”

백작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극 ‘파티마’에서 영식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습니다. 이건 오로지 그녀의 이야기예요.”

그저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여인의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남들의 눈에 떳떳할 수 없어 차마 죽은 시신까지도 훼손해야 했던 몹시도 슬프고 괴로운 이야기.

그리고 그 가여운 여인의 혼마저도 평안하지 못하게끔 만든 무도한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아드님의 일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우신가요?”

느리게나마 걸음을 옮기고 있던 백작의 발이 멈춰 섰다.

잠시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은 운이 좋게도 제 형처럼 가문의 영광을 빛내야 할 막중한 책임감도 떠맡지 않았고, 출생의 문제로 곤란을 겪지도 않았으며, 가문의 부로 인해 한 번도 부족한 것 없이 컸소.”

“그리 키운 것을 후회하세요?”

“사업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이들은 참 닳고 닳아서, 모든 일들을 제 잇속을 차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소. 나는 그런 인사들이 몹시도 싫었지.”

“…….”

“그러니 그 녀석 하나 정도는 좀 자유롭게 키워도 될 줄 알았소. 그러나 그렇게 무모하게 자랄 줄은 몰랐지.”

백작이 천천히 감은 눈을 뜨고서 진지하게 도로테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윽박지르지도, 협박을 하지도, 돈을 가지고 와 환심을 사거나 그녀를 제 뜻대로 휘두르려 들지도 않았다.

“내게는 아픈 아내가 있소.”

“…….”

“그녀에게만큼은 진상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치료사가 말하길 길면 석 달, 빠르면 채 한 달도 되지 못해 생을 마감할 거라더군.”

도로테아가 뜻밖이라는 듯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털어놓는 ‘집안 사정’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죽은 이의 억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살아 있는 내 아내를 위해 잠시나마 극을 멈추어 달라는 거요.”

몹시도 정중한 부탁이었다.

마차를 날려 버린 것과는 전혀 걸맞지 않은 행동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눈앞의 노신사의 눈은 제법 지치고 괴로움으로 가득했지만 퍽 진솔했다.

‘애초에 굳이 후원을 하겠다는 명목을 들이밀 필요도 없이 그냥 극단을 전부 처리해 버리면 되는 일이었을 텐데.’

무려 하이클레어 가문의 마차를 백주 대낮에 습격했던 과감함과 과격함을 생각해 봤을 때에는 그게 더 옳았다.

그러니 눈앞의 백작은 어쩌면 마차의 흉수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건데.

간절하다면 간절한, 몹시도 정중한 백작의 부탁을 듣고 생각에 잠겼던 도로테아가 물었다.

“후원이라면 황자님들 덕에 모자라지 않게 받고 있습니다. 굳이 백작님이나 다른 분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괜찮죠.”

“…….”

“다만 백작님께서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사고를 손수 조사해 주신다면, 저도 백작님의 부탁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문 내의 일이라면 그가 직접 해결하도록 두는 것이 더 나은 모양새일 터였다.

의아한 눈빛을 띠는 백작을 향해 웃음 지은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당분간 극은 ‘더 완벽한 공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무대에 올리는 것을 멈추겠습니다.”

몹시 기이한 조건을 내건 제 딸보다도 어린 소녀를 바라보던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소,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하여 도로테아는 당분간, 실로 오랜만에 조용히 저택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으나…… 그 계획은 황도에 기이한 소문이 돌며 어그러졌다.

실종된 게르만 백작의 막내아들이 밤마다 나타나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