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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64)화 (64/242)

혼술사 도로테아 64화

처음 소문이 시작된 곳은 빈민가였다.

제대로 몸을 눕힐 곳 하나 없는 유랑족들이나 심심찮게 떠들곤 했던 이야기들은, 최근 이어지는 수상쩍은 죽음들과 함께 바람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죽음은 신분도, 성별도,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누구든 다닐 수 있는 길목에 마치 전시라도 하듯 내던져진 시체의 꼴이 참혹했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던 귀족들 또한,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소문은 수많은 이들의 입을 타고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떤 이는 원한 관계에 의한 연쇄 살인이라고 했다가, 어떤 이는 쾌락에 의한 살인이라 추측하고, 또 누군가는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살인이라고도 했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귀족 사회가 들썩인 것은,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세 번째 피해자는 앞서 와는 달리, 귀족들과 자주 교류하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흥밋거리에 불과했던 일이, 코앞의 위협으로 변모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다들 밤 외출을 삼가기 시작했으며 동행하는 호위를 늘리거나 실력 좋은 용병을 동원하여 뒤를 따르도록 했다.

한동안 소식 없이 잠잠하던 황도가 다시 들썩인 것은 새로운 피해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메릴린 레어.

그동안 다른 이유로 귀족들의 입에 심상찮게 오르내리던 그녀가 살인마를 마주했으며, 그 과정에서 약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살아남았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황도로 퍼져 나갔다.

*   *   *

“테아, 너 진짜 안 가 볼 거야?”

“위로의 서신과 마음을 추스를 선물이라면 이미 진작 보냈어.”

“직접 가서 얼굴을 보고 위로하는 게 진정한 성의지.”

옆에서 채근하는 데인을 물끄러미 바라본 도로테아가 픽 하고 웃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잖아. 어차피 가 봤자 부담스럽기만 할 텐데 뭐 하러 가.”

“영애는 널 기다리고 있는 거야! 가장 친한 네게 위로받고 싶은 거라고!”

메릴린이라면 가장 병문안을 오지 않길 바라는 사람으로 자신을 꼽을 터였다.

게다가 도로테아가 움직이면 쓸데없는 소문이 또다시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텐데, 안 그래도 쇠약해져 있을 메릴린이 그걸 견딜 수 있으려나.

“정말 안 갈 거냐고.”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안 가는 게 옳아.”

아직 게르만 백작에게서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것이 사건의 배후를 캐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건의 전말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다른 꿍꿍이를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마차를 불태웠던’ 일부 세력의 위협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도로테아는 훌륭한 사촌 형제와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외숙부, 철통같은 호위를 데리고 있었지만 메릴린은 사정이 달랐다.

괜스레 엮이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도 좋겠지.

“미리 말해 두겠는데, 걱정이 된다며 가문의 문양이 박힌 마차를 타고 찾아갈 생각은 마.”

메릴린에게 민폐니까.

어떻게든 도로테아와 멀어지려는 메릴린에게 쓸데없이 남들로 하여금 여러 소리를 듣게 할 눈치 없는 짓은 좀 적당히 하라는 타박에, 데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영애는 너를 위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진정한 친구 중의 친구라고.”

“그래?”

“극장 운영에 대해서도 영애는 반대하더라. 극장은 물론이고 네 입지에도 오히려 좋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익명으로 여러 사람을 거쳐 후원했어야 한다고.”

“아아, 그렇구나.”

“원래 쓴소리가 더 듣기 싫다는 건 이해하겠지만…….”

똑똑.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책에 열중한 순간, 누군가가 서재로 들어와 제 존재를 알리듯 책장을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환한 낮에는 저택에 출입하는 일이 드문 필립이 서 있었다.

“뭐야. 웬일이야? 네가 여길 다 오고.”

“테아와 얘길 하고 싶은데.”

차분하고 나직한 목소리에 데인이 그럼 그렇지, 하고 체념한 얼굴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할 말이 남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선 뒤통수를 바라보던 테아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기왕 온 거 간만에 회포라도 좀 풀지 그랬어.”

“친애하는 사촌과 나는 놀라울 정도로 공통된 대화 주제가 없어서.”

어깨를 으쓱하는 필립을 빤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생각해 보면 사촌이라고 전부 살갑게 지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까지 서로를 본체만체하며 살아온 세월이 십 년이 넘는데, 갑작스레 가까워져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에드윈과는 곧잘 대화하기도 해. 단지 데인은…… 나하고는 너무 안 맞는 편이라.”

“그럼 됐어.”

말 몇 마디를 얹었다가도 깔끔하게 정리하는 도로테아를 향해 필립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굳이 저택으로 온 것을 보면 무언가 알아낸 것이 있는 거겠지.

그것도 그녀가 꼭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

“메릴린 레어와 함께 습격을 당한 시녀의 증언이 좀 이상해서.”

“시녀?”

그녀의 앞에 스윽 놓인 종이 위에는 몽타주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치안대에서 받은 진술의 일부인데, 습격자를 묘사한 게 몹시 기묘해.”

퀭한 눈과 어딘가 묘하게 엇나가 보이는 몸의 관절들. 듬성듬성한 머리카락까지.

“그녀가 말하길, 걸음걸이가 꼭 사람이 아니라 관절 인형처럼 여기저기 꺾이고 부자연스러웠다는 거야.”

무덤덤하던 도로테아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눈을 마주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새카만 눈동자였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던데.”

“말은 했대?”

“거의 제대로 된 단어를 구사하지 못한 채 이상한 웅얼거림과 간간이 으, 으, 하는 소리를 냈대.”

“시녀는 어떻게 무사했지?”

“그게 좀 이상한데. 마차를 향해 빠르게 접근해 오던 습격자가 별안간 꽥 하는 비명을 지르고는 빠르게 멀어져 갔다는 거야. 메릴린 영애의 부상은 습격자 때문이 아니라, 말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마차가 흔들리며 입게 된 거고.”

“아아…….”

도로테아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사람을 시켜 그녀에게 보냈던 평안부가 떠올랐다.

그녀가 가족들에게 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미미한 수준이지만, 가벼운 재앙이나 사고들을 경고해 주는 용도로는 충분한 물건이었다.

‘제법 열심히 지니고 다닌 모양이야.’

부적과는 다르게 휴대하기 좋도록 노리개 같은 장신구의 형태로 만들었으니 독특하여 예뻐하고 다닌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되었든 평안부가 목숨을 구했네.’

도로테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습격자에 대해 알아?”

“아니.”

물끄러미 종이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짤막하게 답한 뒤 이어 덧붙였다.

“그렇지만 ‘진술’이 사실이라면 습격한 존재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아.”

흰자위를 점령한 검은 동공.

그 희한한 걸음걸이는 제대로 육신을 온전하게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원래 육신과 연결되어 있는 혼에 문제가 생겨 잠시 무언가 쓰였거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씌웠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희한한 곳에서 내가 찾던 이들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네.

도로테아의 중얼거림에 그녀를 살피던 필립이 물었다.

“메릴린 영애에게 갈 거야?”

“그래야겠지. 적어도 ‘습격자’를 만난 건 그녀가 유일하니까. 듣고 싶은 게 더 있기도 하고.”

“지금 마차를 준비시킬까?”

“아니.”

필립의 눈에 의아함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영애의 명예를 지켜 드려야지. 그리고 우리와는 되도록이면 엮이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고.”

줄곧 다른 이들의 병문안을 거절하고 칩거해 왔는데 도로테아가 방문해 그녀를 만난다면 쓸데없는 소문에 불을 붙일 터였다.

모처럼 귀한 정보를 지닌 상대에게 그런 폐를 끼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남들 눈을 피해 몰래 침입하는 게 좋겠어. 한밤중에 창을 넘어 들어가자.”

“…….”

메릴린 영애의 명예는 오히려 한밤중에 몰래 드나들며 밀회하는 것을 들켰을 때 더 실추될 것 같은데.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잖아.”

“그건 그렇지.”

날이 갈수록 묘한 면에서 똑똑해져 가는 외사촌을 보던 필립이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도로테아는 그런 필립의 속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어서 저녁이 되어 메릴린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따름이었다.

*   *   *

깊은 밤, 폐부까지 스며들 만큼 찬바람이 자고 있던 메릴린의 뺨을 때렸다.

추위에 덜덜 떨며 일어난 그녀가 대기 중이어야 할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벨!”

후다닥 달려와야 할 시녀는 좀처럼 응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메릴린의 눈에 활짝 열려 있는 창이 들어왔다.

“저게 왜 열렸지?”

의아한 마음과 함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창을 닫으려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잠들 때만 하더라도 보이지 않던 낯선 편지 봉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봉투 위 붉은 인장이 어딘가 낯익었다.

불길함에 서둘러 봉인되어 있던 실링을 떼어 내자 간결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친애하는 메릴린 레어 남작 영애에게.

금일 새벽, 귀댁을 방문하겠습니다.

편지 아래에 쓰여 있는 방문 날짜, 방문 시각을 곱씹던 메릴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드디어 읽으셨네요.”

“꺄……!”

텁, 하고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은 도로테아가 웃었다.

“물론 다른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게끔 할 수도 있지만, 당분간 되도록이면 ‘힘’을 아낄 생각이라. 조용히 해 주셨으면 해요.”

조곤조곤한 말에 식은땀이 난 메릴린이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낮에 방문할까 했는데, 영애가 저희와는 되도록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불가피하게 도둑 방문을 하게 되었어요.”

“…….”

“이편이 훨씬 더 나으시죠?”

나을 리가 있나.

메릴린은 산발이 된 머리카락도, 잠옷 차림도, 앓아누운 터라 초췌할 낯빛과 소리를 지를 뻔한 추태도 몹시 신경 쓰였다.

성장한 후엔 제 식구들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던 최악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다 내보인 셈이니.

“앞으로도 영애가 원한다면 이렇게 조심스럽게 방문할게요.”

또 방문할 일이 있을 거란 말인가.

메릴린이 창백해진 얼굴로 간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낮에 정식으로 서신을 통해 방문해 주세요.”

“저와 엮이기 싫어하셨잖아요?”

“누가 그래요? 제가요? 아니요, 저는 영애가 낮에 사람들이 전부 보고 있을 때에 정정당당히 방문해 주시면 몹시 기쁘고 감사할 것 같은데요.”

도로테아는 묘하게 울먹거리는 메릴린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밤중에 몰래 오려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배로 늘어난다.

저택의 호위들도 적당히 재워야 하고, 그러려면 쓸데없이 혼력까지 써야 하는데, 본인이 저렇게 애타는 얼굴로 원한다면야 낮에 방문하는 것이 그녀로서도 더 편했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꼭! 방문하시기 전날 서신을 주세요…….”

메릴린이 흐느꼈다.

“꼭 그렇게 할게요.”

이번만큼은 데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고급스러운 꽃과 훌륭한 선물을 동봉하여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한 서신을 보내야 한다던 데인의 말이 떠올랐다.

‘저 간단한 서신이 그토록 서러웠던가.’

하긴 대개의 여아들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납득한 도로테아는 조만간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선물과 꽃다발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메릴린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 그래서 어쩐 일로 방문을 하셨나요?”

“아아, 큰일을 당하셨다기에 위로 차원에서요.”

“…….”

도로테아는 퀭한 눈으로 저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메릴린에게 다시금 말했다.

“습격자를 정확하게 목격했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메릴린의 얼굴에는 이 이상 창백해지기 어려울 만큼 핏기가 사악 가셨다.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던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그 사람의 얼굴…… 많이 변하긴 했지만 분명 본 적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요?”

“요즘 두문불출하는 게르만 백작의 영식이요. 연회에서 몇 번 얼굴을 익혔어요.”

“…….”

두문불출.

게르만 백작가에서는 결국 그의 죽음을 인정하는 대신 ‘실종’된 상태로 놓아두었다.

백작도, 그의 아들인 소백작도 사교계에서 멀어졌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메릴린이 이야기하는 두문불출하는 게르만 백작의 영식은…….

“레이몬드 게르만.”

“맞아요. 그 이름이었어요.”

얼굴까지 훼손되었던 시체를 누군가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복구했다.

이미 그의 넋은 삼도천을 건너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을진대, 죽은 자의 육신을 가지고 장난치는 무도한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아무래도 우리 백작님께서 내게 무언가를 깊이 숨기고 계신 듯한데.’

그렇다면야, 이쪽에서도 굳이 정중하게 나갈 필요가 없는 건가.

도로테아의 입꼬리가 위로 솟아오르자 메릴린이 겁먹은 듯 움츠린 채 간절한 눈으로 열린 창문을 바라봤다.

‘추워 죽겠는데 좀 닫지.’

무심한 눈을 하고 서 있던 프리드가 말없이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 열린 창문을 닫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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