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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62)화 (62/242)

혼술사 도로테아 62화

미네와의 ‘가벼운’ 대화를 마치고 극장을 나서려는 도로테아를 향해 시선이 모였다.

극단의 배우들이 하나둘 그녀를 배웅하겠다며 쭈뼛쭈뼛 나와 섰다.

“그럴 필요 없어.”

“그치만…….”

“각자 맡은 일을 하면 돼. 나는 그저 필요해서 여길 드나드는 것뿐이야.”

마치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라도 되는 양 극단을 오갈 때마다 거나한 배웅과 마중을 받는 것은 그리 기껍지 않았다.

폭신하고 따스한 이불이나 아름다운 물건들, 훌륭한 대리석 복도 같은 것을 보는 건 좋아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숙이고 절절매는 모습 따위를 보려 한 게 아니다.

“정 내게 고맙다면 훌륭한 극을 만들면 돼.”

무심한 목소리에 도로테아의 앞에 일렬로 시립해 있던 이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프리드.”

도로테아의 부름에 그답지 않게 멈칫하고 서 있던 아름다운 기사가 재빠르게 마차에 올라탔다.

늘 그렇듯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메마른 눈동자를 마주한 도로테아가 웃었다.

“무언가 흥미로운 거라도 있어?”

“미행이 붙은 것 같습니다.”

“아아.”

“처리할까요?”

“아니, 그냥 둬. 우리를 따라온다면 오히려 일이 편해지지.”

상대가 과연 그녀가 기다리던 인물이 맞는지는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턱을 괸 도로테아가 고민 끝에 슬쩍 ‘리리’를 날려 보냈다.

정령의 장점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투명화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널 알아보는 이들이 있거든, 전력으로 도망쳐. 절대 맞서지 말고.’

설마하니 환한 대낮에 후작가의 마차를 습격할 간 큰 짓 따위는 벌일 수 없을 테니,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아 둘 필요가 있겠지.

그렇게 정령을 보내어 미행하는 이들을 살피라 이른 뒤, 어느새 졸음으로 감기던 도로테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속을 찌르는 듯한 느낌.

발끝에서 올라오는 저릿함에 저도 모르게 흠칫한 도로테아가 얼굴을 굳혔다.

“프리드.”

“예.”

“마차를 세워.”

의아하게도 백주 대낮의 거리 한복판에 마차를 세운 도로테아가 성큼성큼 거리를 가로질렀다.

이제 제법 튼튼해졌다고는 하나, 가녀린 귀족 아가씨의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걸음걸이였다.

제 혼력을 깎아 먹어 가며 바삐 움직인 그녀가 한곳에서 멈춰 섰다.

“……!”

프리드는 제 주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무심코 따라가다 불에 타고 있는 마차를 발견했다.

어찌나 큰 불길에 휩싸였는지, 주변 사람들조차 불을 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리리.”

도로테아의 짤막한 부름에 멀리 보냈던 정령이 돌아와 거대한 물방울이 되어 마차를 감쌌다.

산소가 막힌 채 습기를 잔뜩 머금게 된 불덩어리가 금세 잦아들었다.

“정령!”

“물의 정령이다!”

“설마 저분은…….”

웅성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무표정한 도로테아에게로 향했다.

그제야 불에 그을린 마차의 외벽에 그려진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하이클레어 가문의 마차였군.”

“마차에 타고 있었던 것이 하이클레어 가문의 사람이었던가.”

“너무 늦었어. 저 정도의 불길이면…….”

흐린 뒷말이야 너무나도 뻔했다.

불길은 바로 옆 건물에서도 열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활활 타올랐다.

마차 전체를 다 아우를 정도였으니 생존자가 있을 리 없었다.

도로테아는 뒤늦게 사고 소식을 들었는지 헐레벌떡 달려온 치안병들이 우두커니 선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영애, 영애가 타고 계시던 마차입니까?”

“아뇨, 제 마차는 멀리 세워 두고 왔어요.”

“그렇다면 이건…….”

“데인일 거예요. 오늘 외출하겠다고 말했었거든요.”

아침부터 같이 극장에 가자던 데인은 딱 잘라 거절하는 도로테아 때문에 영 마음이 상했던지 다른 모임에 나가겠다며 마차를 끌고 가 버렸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오늘 이 마차를 타는 건 도로테아 그녀였겠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마차를 바라보는 도로테아의 옆에서 치안병들이 우물쭈물했다.

‘아무래도 이거, 위험한 것 같은데.’

물끄러미 마차를 바라보고 있는 도로테아의 얼굴에는 웃음기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소녀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에 압도된 이들 중 하나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영애, 참 송구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럴 것 없어요.”

말 한 필 없이 달려서 왔는데, 이 정도면 제법 빠릿빠릿하게 움직인 셈이지. 딱히 저들이 적시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도로테아는 그제야 마차에서 눈을 떼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치안병들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어린 티가 나는 것이 치안대에 배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틀림없었다.

“원칙상 사고를 수습한 것이 영애이시니, 영애께 사건 진술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대답이 시원시원했다.

치안병들이 도리어 놀라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사촌과 어디를 가든 떨어지지 않고 함께할 만큼 막역하다 들었는데, 불에 타 통구이가 되어 버렸음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니.

도로테아는 도리어 저를 이상한 사람처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눈을 끔뻑였다.

“영애, 혹시 지나친 슬픔에 잠겨 잠시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신 건…….”

“제가 왜 슬퍼야 하죠?”

진실로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도로테아의 말에 치안병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가 마주한 남색 눈동자에 서린 것은 그 어떤 다른 감정도 없는, 그저 순수한 궁금증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테아!”

고개를 돌린 도로테아의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의 옆에 창백한 낯빛을 한 여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도로테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두 사람이 같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대관절 저 멍청이는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

*   *   *

마차의 불을 끈 것이 도로테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데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마부는?”

“아, 괜찮아. 뛰어내릴 때 살짝 접질리는 바람에 발목을 치료하고 있어. 실은 그것 때문에 근처 치료원에 들렀던 거야.”

순순히 대답해 주던 데인이 이내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금 물었다.

“불이 난 건 어떻게 알고 왔냐니까?”

“가지고 다녔지?”

“응?”

“그거, 내가 줬던 것.”

도로테아의 말에 데인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건넨 ‘손수건’은 유독 빳빳한 데다 피처럼 붉은색의 묘한 문양으로 가득 차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데인은 그것이 도로테아가 꽤 큰 ‘노력을 들여’ 만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풀을 먹였다 다리는 과정을 거쳐 만든 노란빛이 도는 빳빳한 재질의 바탕천부터 해서, 붉은빛이 나는 광물을 손수 갈아 물에 개어 잉크를 만들었다.

시중에도 붉은빛이 도는 잉크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지만, 도로테아는 흘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경면주사(鏡面朱沙)가 아니면 효용성이 떨어져.’

헛소리라며 치부해 버리기에는 도로테아의 진지한 태도가 마음에 걸려 줄곧 손수건을 품에서 떼어 놓지 않았건만.

제 품 속을 뒤지던 데인이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라?”

당황한 듯 품을 뒤지는 사촌을 보던 도로테아가 시선을 거두었다.

다행히도 ‘호신부’는 늦지 않게 발동을 한 모양이었다.

이곳의 광물과 재료들만으로 만든 부적이라 혹여 제대로 발동하지 않을까 했던 염려는 놓아도 될 모양이다.

도로테아의 무심한 눈빛이 곁에 있던 메릴린에게 가 닿았다.

“자주 뵙는군요, 영애.”

“네? 네, 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던 메릴린은 도로테아가 건넨 말에 당황한 듯 흠칫하더니, 이내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데인이 잽싸게 그런 그녀의 얼빠진 모습을 변호하고 나섰다.

“메릴린 영애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해. 불붙은 채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느라 고생하셨거든.”

“…….”

도로테아는 심드렁하니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무는 메릴린을 바라보았다.

무슨 영문인지 유독 자주 엮이게 되는 것이 희한한 일이었다.

그저 몇 번 오고 갔던 설전 이후, 그때의 일을 ‘잊으라.’고 말한 것으로 이미 끝난 인연이라고 믿었건만.

‘억지 인연을 자꾸 잇는 것이 저 덜떨어진 바보인가.’

데인은 메릴린이 몹시 걱정되는 듯 치료사를 불러야 한다는 둥,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는 둥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데인.”

“응?”

“치안대장께서 오시면 직접 메릴린 영애를 안전하게 저택까지 모셔 달라고 할 거야. 그녀에게 들어야 할 진술이 있을 테니 절대 먼저 귀가해선 안 돼.”

굳이 치안대에 맡겨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듯 의아해하는 사촌의 눈을 마주한 도로테아가 조곤조곤 알려 주었다.

“마차에 불이 그냥 붙었을 리 없잖아. 심지어 이렇게까지 불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크게 번졌다는 건 분명히 인위적인 손길이 있었다는 거야.”

“…….”

“그리고 이 마차는 하이클레어 가문의 것이고.”

도로테아의 말에 데인의 얼굴이 그제야 굳어졌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멍청한 녀석은 아닌데.

큰 사고에도 다들 무사한 상황이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로테아는 덜떨어진 사촌에게서 시선을 떼고 메릴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폐를 끼쳤어요, 메릴린 영애. 제 실수예요. 설마 데인이 다른 사람과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할 만큼 사교성이 좋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아, 뇨…… 괜찮아요.”

머뭇거리며 답한 메릴린이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영애께서는…… 이미 영식이 습격당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계셨나요?”

도로테아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메릴린은 생각보다 영민하고 눈치가 빨랐다.

아직 그 정체조차도 드러내지 않은 적은 몹시 신중했다.

도로테아가 웅크리고 있는 5년 동안에도 몇 번이고 저택의 담을 넘으려 들면서도 꼬리를 밟힌 적은 없었다.

이제껏 그래 왔듯이 그들은 그녀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보다 그녀 곁의 사람들을 건드리려 들 터.

이미 한차례 더 정령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으니 곧 행동에 나서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비교적 호위들을 동행시키는 에드윈이나 알몸으로 전장 한복판에 떨궈도 제 한 몸은 건사할 수 있는 에이든, 그리고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는 일 없는 콜린 같은 이들보다야 데인이 훨씬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반쯤은 그것을 의도하고 호신부를 들고 다니게 한 것도 있었고.

들고 다니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목숨은 구하게 만들어 주는 물건이니까.

‘그렇지만 이건 지나치게 노골적인데.’

대낮의 습격은 눈에 띄기 싫어하는 평소 그들의 습성과는 묘하게 어긋났다.

게다가 이런 과격한 공격이라니. 마치 데인이 죽길 바란 것 같았다.

‘왜지? 내가 아닌 데인을 죽여 봤자 별달리 의미도 없었을 텐데.’

애초에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자신의 죽음을 원한 것이 아니라면.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이번 일에 또 엉뚱한 것들이 끼어들어 상황을 흐리고 있는 것일지도.

그 옆에서 가만히 눈을 굴리고 있던 데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로테아를 향해 물었다.

“내가 습격당하리라는 걸 미리 알았다고?”

“…….”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끔뻑였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 맞다.

이렇게 대놓고, 과격하게 움직인 게 조금 의외였을 뿐.

긍정이나 다름없는 침묵에 데인의 눈썹이 올라갔다.

“어쩐지 나한테 호신부랍시고 그 수상쩍은 물건을 매일 같이 가지고 다니라더니.”

“그건 호신부가 맞아. 네가 지금 무사한 것도 그 덕분이잖아.”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습격을 당하는 것까지 예측하고 있었는데?”

얼굴을 일그러뜨린 데인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도로테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에드윈보다는 네가 훨씬 더 습격에 대응하기 좋을 테고.”

“……?”

“에이든 숙부보다는 네가 훨씬 상황 파악도 빠르니 주변을 덜 휘말리게 만들겠지.”

“…….”

“네가 가장 적합했으니까.”

미끼로 쓰기에.

뒷말을 삼키자 굳어 있던 데인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형보다 습격에 대응하기 좋다는 말도, 숙부보다는 상황 파악이 빠르다는 말도, 가장 적합하다는 말도.

“내가 제일 믿음직스럽다는 뜻인가, 그거?”

“응.”

그렇다고 해 두자.

도로테아의 긍정에 데인의 입꼬리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메릴린은 어쩐지 자신을 몇 번이나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장본인이자, 눈치가 더럽게 없는 데인을 향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정말 저래도 되는 건가, 이 남자는?’

대놓고 미끼로 쓰기에 적합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인데.

왜 뿌듯해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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