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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61)화 (61/242)
  • 혼술사 도로테아 61화

    비록 황가 사람들이 직접 초연을 관람하는 이례적인 일이 있긴 했지만, 극단 ‘솔레이스’의 첫 공연은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황제가 언급했던 것처럼, 정통성과 사회적 통념을 중시하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이라니.

    파격적이기 이를 데 없는 소재에,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내용은 결국 두 주인공의 비극으로 끝이 났다.

    “저속한 통속극이 그렇지요.”

    “하긴, 서민들을 상대하는 극단이라고 하니까요.”

    “문제는 그런 극을 보고 멋대로 신분 상승의 희망이라도 품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와 비난의 눈초리들이 이어졌지만, 소리 높여 반대하지 않는 까닭이야 분명했다.

    무려 황자가 돈을 대어 극단 건물을 보수하고, 황제가 직접 관람한 후 극단의 창단 이념을 칭찬하며 보상까지 내린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다들 꺼림칙해하긴 했지만 확실히 극은 재미있었다.

    숨길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랑이라든가, 두 사람을 가로막는 현실이라든가, 그 외에 다양한 자극적 요소들은 사람들이 극에 몰입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평소 즐겨 듣는 고상한 연주나 감상회에서 보던 오페라 따위와는 달리.

    다들 모르는 척하면서도 알음알음 곁눈질로 [극단 솔레이스]를 주시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명백했다.

    ‘다음 극은 어떤 내용일까?’

    *   *   *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겁니다.”

    “음?”

    “빨리 새로운 공연을 올리지요. 매일 같은 것만 공연할 수는 없잖습니까.”

    열변을 토하는 레번의 말을 듣던 도로테아가 쥐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제대로 된 공연을 올리자 사람들이 몰리고 돈이 들어왔다.

    근본 없이 그저 닥치는 대로 눈길을 끌어 어떻게든 동전 몇 푼에 집착하던 때와는 달랐다.

    극장을 제대로 열기까지 도로테아는 사람들을 부리고 돈을 써 가며 솔레이스 극단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때만 하더라도 다들 지은 죄가 있으니 꾸역꾸역 애써 따랐는데, 막상 사람들의 반응이 느껴지자 모두 태도가 달라졌다.

    제대로 된 ‘공연’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연습을 하고 배역을 연구하기도 했다.

    “응? 듣고 있어요? 다른 공연을 올리자니까요.”

    난생처음 쥔 액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레번의 눈동자에 욕심이 그득했다.

    이미 탁하게 흐려진 눈을 보던 도로테아가 접은 부채를 집어 던졌다. 정확히 레번의 미간에 명중한 부채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그랬지. 공연은 적어도 이 이야기를 제국의 그 누구도 모를 수 없을 만큼 널리 알린 뒤에 내릴 거라고.”

    “그치만……!”

    “새로운 극을 찾기 전에 공연의 질부터 높여. 주인공 역할을 할 아이들을 여럿 두고, 돌아가면서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극을 연출하는 거야.”

    레번의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 찼다.

    고작해야 그 쓰레기보다도 못한 빵을 주워 먹던 과거를 잊어버린 걸까.

    인간은 참으로 쉽게 과거를 잊고, 현재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다가올 미래를 보지 못한다.

    언젠가 겪은 아주 익숙한 일에 그녀가 담담히 ‘친우’ 아닌 ‘친우’를 마주했다.

    움찔한 그가 눈을 피했다.

    “아니, 그냥. 돈을 많이 벌면 좋은 거 아닙니까. 영애에게도.”

    “내게 돈이 부족하진 않은데.”

    그야 본인은 후작가의 금지옥엽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여전히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투덜대는 레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일어섰다.

    “더 많은 것을 원하다 괜히 다치지 말고. 지금으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지.”

    “네, 네. 누구 당부시라고요.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유순한 척하고 있지만 눈에 득시글한 욕심을 도로테아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욕심에 흐려져 혼탁한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네가 쪼르르 다가와 도로테아의 손을 꼭 잡았다.

    “…….”

    살갑게 대해 주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건만, 아이는 본능적으로 도로테아가 ‘어떻게’ 파티마를 찾아내어 해방시켜 주었는지 이미 아는 듯했다.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가볍게 극장을 돌아보는 사이, 아이는 제 옷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도로테아에게 내밀었다.

    “이건.”

    품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탓에 조금 녹아내린 초콜릿의 달콤한 냄새가 확 풍겼다.

    비록 손가락 마디만 한 조그마한 것이긴 했지만 극장의 아이들이 갖기에는 고급스런 간식이었다.

    “이걸 누가 네게 줬니?”

    극장을 찾은 귀족이 아이에게 선심이라도 쓴 건가.

    도로테아의 물음에 미네가 다시 제 옷을 뒤적뒤적하더니 이내 금박을 입힌 단추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꽤나 비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일 텐데도, 도로테아를 향한 손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도로테아는 마치 물물 교환이라도 하듯 들고 있던 초콜릿의 포장지를 까 아이의 입에 쏙 집어넣어 주었다.

    미네의 얼굴에 볼이 움푹 패이도록 웃음이 번졌다.

    “문양이 제법 익숙한데.”

    손바닥 안에서 도르르 구르는 단추에 새겨진 것은 어느 귀족 가문의 문장이었다.

    파티마의 기억 속에서 본 적이 있음을 알아낸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게르만 백작.”

    그가 극장에 들렀던가.

    “흐음.”

    유독 들떠 보이던 레번.

    어수선한 극장의 분위기.

    게르만 백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커프스단추까지.

    단순히 관객으로 왔다 간 것이라면 크게 상관없을지 모르겠으나, 게르만 백작은 극 ‘파티마’와 꽤나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파티마와 게르만 백작의 영식은 이미 죽고 없지만, 무대 위에서만큼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을 터.

    “그게 그리 달갑지 않아서 이리도 득달같이 달려오셨으려나?”

    정작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구겨질 체면 탓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더니.

    미네의 바쁜 손짓을 보던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그가 다시 오기로 했어?”

    “…….”

    고개를 크게 아래위로 끄덕이는 아이를 보며 도로테아가 슬쩍 레번이 있던 단장실을 곁눈질했다.

    지난 며칠 내내 그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유독 과장된 태도로 그녀를 대하던 것도 게르만 백작이 온 것을 숨기고 싶기 때문이었나.

    “아무래도 레번이 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야.”

    도로테아의 손이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한낱 귀족 계집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싫었던 걸까.

    아니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기회에 눈이 멀어 버린 걸까.

    “어느 쪽이든 좀 괘씸하네.”

    호선을 그린 도로테아의 눈이 미네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약속된 날이 언제니?”

    미네는 몹시 충실하게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을 고스란히 알려 주었다.

    *   *   *

    메릴린 레어는 몹시도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사냥제부터 의상실에서의 일까지.

    하이클레어 후작가를 향한 귀족들의 관심이 메릴린에게 닿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사냥제에서 관심을 독차지하고 가장 많은 사냥감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평소에 어울리던 영애들에게 은근한 견제까지 받고 있는 신세.

    ‘지나치게 튀는 건 밋밋한 것만 못해.’

    차라리 정말 친분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우리 사이에 빚은 남아 있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느릿한 목소리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자신에게 간간이 말을 건 발레리와는 달리 도로테아는 그녀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자신을 마치 창밖의 풍경처럼 넘기던 무심한 눈동자가 떠오르자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저는 도대체 메릴린 양이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어요.”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사건건 저를 물고 늘어지는 몹쓸 사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게요. 차라리 도로테아 영애와 함께 ‘극장’을 가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까르르 웃음이 이어졌다.

    저마다 올라간 입꼬리를 가리고 있긴 했지만 웃음을 감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메릴린은 저를 향한 시답잖은 농담을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고 한들 믿을 분위기도 아니고.’

    메릴린은 소리 높여 부정하는 것보다 무시로 일관하는 것이 차라리 상대를 덜 자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은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차라리 뻔뻔하게 후작가 앞에 가 무릎 꿇고 자신을 받아 달라고 애걸해 볼까 하고.

    최소한 의상실에서의 도로테아는 그녀에게 악감정 따위는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7황자 전하는 다르겠지.’

    무려 황실의 목걸이를 모독하지 않았나. 그것도 단순히 값비싼 장신구가 아닌, 황자 전하의 생모가 물려준 물건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꺼려졌다.

    도로테아의 곁에 있으려면 자연적으로 7황자를 마주칠 일도 많아질 터. 그의 눈에 거슬리게 굴었다가는 정말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어머, 저기…….”

    “데인 공자네요.”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적차손이자, 그녀를 사냥제의 꽃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메릴린은 애써 모른 척 돌려놓은 시선들이 다시 제게로 집중되는 것이 느꼈다.

    ‘지난번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저 사람은 나와 전생에 원수가 아니었을까.’

    꼭 가장 중요한 순간 일을 망치거나 그녀를 몹시 곤란한 상황에 밀어 넣곤 하니까.

    몇몇 영애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메릴린을 향한 비웃음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시선을 가진 영애 하나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흘끗 얼굴을 확인하자 적어도 메릴린을 비웃던 무리에 속한 인물은 아니었다.

    “데인 공자가 이런 음악 감상회에 참석하시는 건 드문 일인데, 메릴린 양과의 친분 덕분에 오신 걸까요?”

    “감상회는 그 누구든 참석할 수 있는 곳이고, 저는 데인 공자께서 참석하신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어요.”

    오히려 그가 참석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오지 않았겠지.

    메릴린의 답에 물음을 던졌던 영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알거렸다.

    “이번 감상회에 참석한 영애들 대부분은 ‘극장’에 그리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걸요. 메릴린 양이 이곳에 참석한 것도 다들 도로테아 양의 부탁 때문이라고 하고요.”

    과연, 그녀를 향해 탐탁하지 않은 시선을 보낸 까닭은 이것이었나.

    피곤함을 느낀 메릴린은 눈을 깜빡이다, 그녀를 발견한 듯 다가오려는 데인을 흘끔 확인했다.

    ‘차라리 잘됐어.’

    자신을 둘러싼 거짓된 소문도 진저리가 나고, 태도가 확확 달라지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싫었다.

    “저는 도로테아 양이 굳이 극단을 설립해 운영 전반에 나선 것에 그리 찬성하지 않아요.”

    데인의 걸음이 멈칫했다.

    “직접 운영에 나서시는 것 외에도, 도로테아 양이 후원을 할 다양한 방법이 있었겠죠. 게다가 극장에 올라간 극이 지나치게 통속적이라 비난의 여지가 있어요. 자칫하면 귀족 영식들에 대한 편견마저 심어 줄 수 있고요.”

    “어머.”

    “무엇보다 도로테아 양의 입장을 고려해 봤을 때에도 그 극단과의 인연을 밝히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고 봐요.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잖아요.”

    거침없는 말에 당황한 듯 주변의 영애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발언이 어떤 의미인지 확인하려는 듯 분주한 눈빛이 오고 가는 가운데, 이윽고 걸음을 멈췄던 데인이 느릿하게 다가와 메릴린의 앞에 섰다.

    ‘응?’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호의를 담뿍 담고 있는 눈과 마주하고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헛기침을 몇 번 뱉은 데인이 그녀에게 점잖게 인사를 건넸다.

    “격조했습니다, 레어 남작 영애.”

    “…….”

    친근한 목소리에 움찔한 메릴린이 침묵하자 데인이 싱긋 웃었다.

    “방금 그 말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발언이셨습니다. 영애께서는 테아의 진정한 친우로군요.”

    “지금 제 말을 듣긴 하셨나요?”

    “진정한 친우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소중한 이를 위해 아낌없이 바른말을 하는 법이죠. 설령 미움 받을지도 모르는 곤란함까지도 무릅쓰고요.”

    데인의 말을 듣는 순간 곁에 있던 귀족들의 얼굴에 깨달음의 빛이 어렸다.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긴가민가했던 메릴린의 태도를 확신한 듯 보였다.

    순식간에 쓴소리도 아끼지 않을 만큼 참된 우정으로 가득 찬,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둘도 없는 친우가 되어 버린 메릴린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데인이 손을 내밀었다.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사촌 누이의 친우에게 이 정도의 배려는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정중한 제안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메릴린은 이내 체념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듭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힘으로는 풀리지 않을 만큼 꼬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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