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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39)화 (39/242)

혼술사 도로테아 39화

도로테아가 귀찮게 이것저것 참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직접 집까지 쳐들어온 황자를 내쫓겠다고 벼르며 응접실로 향한 길목이었다.

조금만 돌아가면 응접실이 보이는 곳에 서성이는 에드윈과 데인이 있었다.

두 소년 모두 그녀를 발견한 듯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왔구나?”

“응.”

“재밌게 놀았다면서.”

“응.”

결과적으로 얻은 건 별로 없었지만.

일방적인 에드윈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데인이 궁금한 듯 불쑥 끼어들었다.

“콜린 삼촌은 그렇다 치고, 필립이랑도 어울렸다고?”

“응.”

“대체 뭘 하고 놀았길래 녹초가 되어서 자고 온 거야?”

늘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필립이 모처럼 그녀와 어울렸다는 것이 데인에게는 못내 신기한 일인 모양이었다.

“데인.”

형인 에드윈이 짐짓 동생의 어깨를 당기며 점잖게 말렸다.

“미안해, 테아. 그냥 인사만 한다는 게 널 잡아 뒀네. 응접실로 가 봐. 할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셔.”

“응, 나중에 봐 에드윈.”

웃으며 사과하는 에드윈을 향해 선심 쓰듯 평소보다는 조금 더 긴 인사를 건넨 순간이었다.

도로테아의 안색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데인이 별안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너 괜찮냐?”

“응?”

“괜찮냐고. 너 오늘 좀…….”

이상했다.

무엇이라고 딱히 꼭 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분명 평소와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그 미묘하게 ‘달라진 점’을 찾으려는 데인을 본 도로테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응,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응? 으응.”

분명 상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무난하고 상식적인 대답일 뿐인데, 저를 바라보는 눈과 마주하자 묘하게 머쓱해졌다.

허둥거리며 인사할 때를 놓친 데인은 돌아선 도로테아의 뒤로 흐릿한 형체가 맴도는 것을 발견했다.

“어?”

소년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순간, 흐릿하고 안개처럼 보이던 희끄무레한 것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   *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잠시 멈춰 선 도로테아는 차분하게 무릎을 굽혀 예의를 갖췄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후작은 어느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인사를 선보이는 손녀딸을 잠시 기다렸다 자신의 옆자리로 불렀다.

도로테아가 자리에 앉자 미동도 없이 있던 루크가 그제야 그녀의 인사에 고개를 까딱여 간단히 화답했다.

“네 소식을 들으신 7황자 전하께서 황송하게도 친히 걸음해 주셨단다. 그 전에도 대신관님을 설득해 주시는 등 네 소문을 일축하는 데 큰 은혜를 내리셨으니 감사를 표하거라.”

평소와는 달리 사뭇 딱딱한 후작의 말투에서 묘한 떨떠름함이 느껴졌다.

그의 태도만 보아도 오늘 황자의 방문이 사전에 약속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후작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에 도로테아는 말없이 황자를 흘끔거렸다.

대신관을 움직인 것이 황자였나.

후작이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황자를 저택에 들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전하, 신은 약속대로 ‘아주 잠시’ 제 손녀와 전하께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나는 경의 식솔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생각이 없으니 말이지.”

마지못해 일어선 후작이 자리를 비우자 단둘만 남은 응접실에서 침묵을 깬 건 황자였다.

“후작 부인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고 들었는데.”

하이클레어 저택에 돌았던 ‘독’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일이 좀 지나긴 했지만 아직 저택을 휩쓸었던 ‘연쇄 중독’의 여파는 남아 있었다.

도로테아가 솔직하게 답했다.

“괜찮아. 연세가 많으시다 보니 다른 이들에 비해 자정 능력이 떨어져서 해독이 느린 것뿐이야.”

회복은 느리지만 그래도 벌써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녀의 말에 루크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닐 터.

빙빙 돌려 탐색하는 건 도로테아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넌 여전히 무엄하군. 후작 앞에서는 내숭이었나?”

“네 체면을 세워 준 거야.”

다른 사람이 있을 때에는 황자라는 지위에 맞게끔 대해 준 거지만, 지금은 단둘뿐이었다.

“정 거슬리거든 법도에 따라 처벌하면 그만이잖아?”

“…….”

황족 모독죄로 걸고넘어져 보시든지.

애초에 처벌할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걸 꿰뚫고 있는 도로테아의 말에 루크가 침묵했다.

코웃음을 친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혀끝을 자극하는 달콤함에 만족한 그녀가 나른한 미소를 보냈다.

“운이 좋은 줄 알아. 널 내쫓을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거든.”

피곤함에 내쫓으려던 것도 잠시, 할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서 좀 더 함께해 주기로 결심한 도로테아의 말에 루크가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래서 날 찾은 용건이 뭐야?”

달콤한 간식을 입안으로 굴리며 묻는 도로테아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네가 정령사라 들었다.”

순간 멈칫했던 도로테아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이 세계에는 ‘혼술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을 받아들이라고 한들 쉽게 납득해 줄 리 없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았으니 차라리 잘된 거겠지.

루크의 회색 눈이 그녀를 낱낱이 분석하듯 훑었다.

“네 그 희한할 정도로 기묘한 능력은 정령을 다루는 것이었나?”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그 편이 네가 더 납득하기 쉬울 테니까.”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언제나 쉽게 답을 주지 않는 영악한 아이가 슬며시 웃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도 따라 흔들렸다.

그 십자가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루크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게 도움을 받았지. 황도에 막 들어왔을 때도, 대신관의 일도.”

그렇게 운을 뗀 순간 몸을 까딱이던 도로테아가 자세를 고치고 바로 앉았다.

과연. 처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몰라도 이번에 대신관을 부를 수 있게끔 다리를 놓은 것은 이게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도로테아는 그가 자신에게 유독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 희한했다.

‘원하는 것이 있는 건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병색이 완연하고, 비쩍 마른 데다, 상대에게 제대로 된 예의도 갖추지 않고, 또 상대를 두려워하지도 않는 도로테아에게 무엇을 바라며 다가오지는 않을 텐데.

그는 명확하게 바라는 것이 있어 그녀를 도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그의 말에 반박했다.

“난 이미 너를 도운 전적이 있잖아. 내가 청하지 않은 도움은 받은 거라고 칠 수 없어.”

“그런가.”

“내가 뭘 도와주길 바란다면 상응하는 대가를 가져와야지.”

고작해야 열한 살짜리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냉정하고 담담한 말이었다.

상대가 황족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나올 만한 말이 아니기도 했고.

아마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그가 아닌 리처드였더라면 이미 즉결 처분을 하겠노라 펄펄 뛰며 날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그렇게 하는 대신 조금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다면, 이건 어떨까.”

황자가 말을 끝낼 즈음, 우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로 가라는 말을 듣고 왔…….”

접객실로 들어온 우드는 도로테아를 한 번,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7황자를 한 번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네 주위의 사람들을 조사하다 뜻밖의 정보를 알아냈지.”

“…….”

“저자, 제법 명성이 있던 백인장이더군.”

우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그를 다시금 조여 오기 시작한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이 군에서 탈영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던 인물인지 알아낼 정도라면 더한 것도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문제지.

감흥 없는 눈으로 우드를 훑던 루크가 천천히 몸을 기울여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황실에 한마디 보고 없이 홀로 군을 나와 살인까지 저지르고 다닌 죄인을 옆에 두다니.”

“……!”

“후작의 힘을 너무 믿었군.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살인은 중죄다.”

나지막한 경고에 우드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나 정작 황자의 냉담한 눈을 바로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도로테아는 겁을 먹기는커녕 태연히 눈을 깜빡였다.

이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얌전히 자신이 주는 목줄을 걸고 제 말에 따르라는.

‘확실히 이것만큼 좋은 협상 카드가 없지.’

그녀는 당황한 기색은커녕 찔리는 구석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듯 맑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살인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저자가 마을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일가가 죽고 불탔다. 잔혹한 범행 수법과,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깔끔한 뒤처리까지.”

“…….”

“정황으로 보아 외부인의 짓이다. 그 시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인물은 저자, 하나뿐이고.”

천천히 듣고 있던 소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을에서도 인적이 드문 지역에서 증거 하나 없이 일어난 사건이었다.

결국 범인을 찾지 못했으니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텐데 이 정도로 자료를 알뜰히 모은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제 머리카락을 꼬며 여유롭게 반박했다.

“모두 다 가정일 뿐이잖아. 그냥 우연이 여러 번 겹쳤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어?”

“그렇다면, 좀 더 깊이 파 봐도 상관없나?”

“황자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팽팽하게 이어져 가는 대화에 주변 분위기도 얼어붙었다.

뒤에 시립해 있던 친위기사의 얼굴은 물론이고 우드의 얼굴도 이미 새파랗게 질린 지 오래였다.

루크의 회색빛 눈이 사냥감을 탐색하듯 도로테아를 훑었다.

그 순간 우드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내가 자수하겠소. 자수하면 될 것 아니오!”

“넌 닥쳐.”

도로테아의 단호한 말에 순간 우드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녀는 왜인지 열리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보려 안간힘을 쓰는 우드를 두고 씁쓰레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꽤나 충성스러운 부하를 뒀어. 널 위해 자수까지 하겠다니.”

루크의 여유로운 말에 도로테아가 침묵했다.

쓸데없이.

콜린을 시켜 아예 사건을 무마하라고 하거나 그게 아니어도 시침을 떼고 있으면 앞으로 드러날 것들도 모두 정황 증거에 불과할 텐데.

‘어쩌겠어. 저런 치인 걸 알고도 들인 내 잘못이지.’

자백이나 다름없는 우드의 말에 루크가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본인이 자수하겠다는데?”

“됐어. 애초에 저자와 협상하려던 게 아니잖아.”

쓸데없는 수작은 관두라는 도로테아의 직설적인 말에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쓸데없는 이야기는 관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다시 한번 말한다. 내게 협조해라.”

강압적인 건 변하지 않았네.

최소한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부탁이라는 걸 했더라면…….

뭐. 그래도 하진 않았겠지. 귀찮을 테니까.

어떤 면에서 보자면 자신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이 눈앞의 황자였다.

도로테아가 그를 바라보다 건조하게 물었다.

“협조라니. 어떤 것을, 어떻게?”

“너는 그때 내 십자가의 내력을 한번에 알아봤다. 그것이 나를 해하는 물건이라는 말도 했었지.”

도로테아가 제 목에 걸린 십자가를 손에 쥐었다.

오랜 시간 지니고 있으면서 조금씩 목걸이에 담긴 부정하고 탁한 기운을 정화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가끔 이 안에 들어 있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자신의 꿈자리를 어지럽히곤 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진작 잡아먹혔을 테지.

그러니 이 목걸이를 지니고도 이제까지 멀쩡하게 살아온 황자도 녹록한 인간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 목걸이가 내 어머니의 것이 아님을 어찌 알았나?”

“유모를 처형했다며. 물어보지 않았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렇구나. 그 때문에 내게 자꾸만 찾아오고 관심을 주었던 거군.

그는 어머니까지 이용해 가며 자신을 살해하려 한 배후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눈이 뒤집힌 거로군.

루크의 눈에 열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네 그 기묘한 힘이 필요하다. 정령사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어.”

“…….”

“내게 협조해라.”

그러지 않으면 저자를 다시는 못 보게 될지니.

그의 눈이 입으로 뱉지 않은 남은 말을 보태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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