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38화
몹시 고단한 하루였다.
필립은 그 모든 일들이 불과 반나절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일행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로테아가 ‘다리’라고 부르는 우드 데버는 여전히 초점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누구도 일행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자연스러웠다.
“걸어 놓은 술법은 곧 깨질 게다. 요령만 익혀 둔, 잡기에 가까운 조잡한 최면이니까.”
피곤한 듯 제 얼굴을 쓸어내린 콜린의 말에 필립은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해야 할 말들이 남아 있다는 건 알지만, 방으로 먼저 돌아가 네 어머니를 챙기거라.”
“…….”
“네가 이 아이를 필사적으로 감쌌던 건 네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 아니냐.”
남자의 손에 힘없이 무너지던 연약하고 가냘픈 몸.
생의 고단함에 지쳐 어느 순간부터는 웃음조차도 짓지 못하던 가여운 어머니.
매일같이 상상을 하곤 했다.
그가 잠든 밤에 몰래 들어가 낮에 숨겨 둔 날카로운 나이프로 내리꽂는 상상.
걸어가는 그의 뒷목에 흉기를 휘두르는 상상.
제 주먹이 그의 정수리를 가격하는 상상.
눈을 내리깐 필립이 나지막이 물었다.
“어머니에게도 ‘보여 줄’ 겁니까?”
“아니.”
“…….”
“굳이 그녀가 알아야 할 영역은 아니다. 실은 너도 그렇지.”
망할 놈의 계집애가 멋대로 눈을 틔워 놓을 줄은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필립과 함께 헤르티아를 만나러 출발한 순간부터 이미 콜린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전직 사신은 몹시도 착잡한 얼굴로 잠든 도로테아를 침대에 뉘여 주며 한숨을 쉬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아지 같은 계집이.’
문가에 서 있던 필립이 말없이 돌아섰다.
실은 줄곧 홀로 남아 있었을 어머니가 걱정되었을 터.
소년의 기척이 사라지고 나자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색색 숨을 쉬던 도로테아가 눈을 떴다.
“필립이라면 내보냈다. 아마 제 어미와 함께 있을 테지.”
“응.”
“이대로 후작가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니 오늘 밤은 이곳에 있거라. 내 서신을 보내지.”
“응, 너도 이제 그만 쉬어도 좋아. 당분간은 할 일이 없을 테니까. 내일 내가 우드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고 나면 다시 부를 때까지는 이 저택에서 지내도록 해.”
도로테아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콜린은 그에 대한 답을 하는 대신 묘한 얼굴을 한 채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너 말이다.”
“응?”
“어딘가 모르게 인간에게 냉소적인 면이 있지 않았나. 네가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이들에게조차 어느 정도 벽을 두고 대한다고 생각했건만.”
타인에게 ‘흥미’와 ‘관심’은 보이되 그것이 호감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두루뭉술하고 또 속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의뭉스러운 태도를 유지했기에 인간과는 다른 존재인 것처럼 보이곤 했는데.
“저 녀석에게는 필요 이상의 것을 베풀고 신경 쓰는군.”
도로테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어려운 눈을 한 그녀가 키득거렸다.
“뭐, 일단은 앞으로 우리 삼촌께서 해야 할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헛소리.”
애초에 멋대로 자신을 인간의 몸에 가둬 권속으로 만든 것이 누구인데.
이제 그의 신기조차도 도로테아의 허락이 있을 때에만 쓸 수 있는 허수아비가 되어 버렸건만.
제 처지를 생각해서 베푼 친절 따위일 리가 없었다.
도로테아가 키득거리던 웃음을 멈추고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나를 도우려고 했잖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고, 상대는 아무리 남보다 못해도 아버지인 것을.
필사적으로 저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았나.
소년의 발버둥은, 한때 자신에게도 그러한 구원을 약속한 존재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구원자’는 내밀었던 손을 스스로 거두어들였지만 필립은 달랐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결코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좋은 오빠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로테아가 살아 있었다면 그를 몹시 따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말에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콜린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너답지 않게 감상적이군.”
“난 좋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한 도로테아는 깨어 있는 것이 힘에 부친 듯 다시금 눈을 감았다.
이내 새근거리며 잠에 빠져든 조그마한 소녀를 내려다보던 콜린이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 찬 머리를 흔들었다.
매 순간이 그랬지만 오늘따라 이 기묘한 소녀의 정체를 더욱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간혹 죽음을 예언하거나 사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예민한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녀가 보여 주는 것들은 또 다른 형태의 힘이었다.
흑마법사야, 마족의 힘을 빌어 힘을 사용한다고 치지만 그녀는 달랐다.
혼을 바친 대가로 힘을 얻는 게 아니라, 그 혼 자체에서 에너지를 얻으며 생과 사의 갈림길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
지금이라도 상사를 찾아가 싹싹 빌며 자신의 죄를 토하고 아이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에 잠긴 콜린이 과거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어느 미친놈이 부인을 살리겠답시고 혼을 가지러 온 사신을 공격해 거의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였었지.’
그놈은 아직도 하데스의 감시를 받으며 제 몸만 한 크기의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벌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문제의 소멸당할 뻔했던 사신의 결말도 만만찮았다.
자신의 권속이 한낱 인간에게 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접한 하데스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결국 그 새끼는 만 년 동안 월급 차압당한 채로 휴일 없이 야근 꽉 채워서 일한다던데.’
나는 그 하찮은 인간 아래에서 부려 먹히고 있으니.
죄를 자수한 자신이 겪게 될 미래를 떠올려 본 콜린이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도로테아의 상태는 확실히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콜린이 밤새도록 그녀의 곁을 지키며 이래저래 끌어모은 혼력을 전이해 준 덕이었지만, 그럼에도 창백한 안색을 온전히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 아직은 신기의 힘을 끌어내기는 어려운가 봐.”
“이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긴 콜린이 옆에서 연신 고개를 갸우뚱대는 우드를 향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당장 마차부터 대기시켜야지. 뭐 하는 건가?”
“아…… 그러지요.”
우드가 뻐근한 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복도를 나서면서도 찜찜함을 쉬이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눈을 떠 보니 자신은 침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자고 있었고, 침대를 도로테아에게 빼앗긴 콜린이 테이블 의자에 반쯤 누운 채 퀭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제 분명 차를 마시니 어쩌니 하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후의 기억들이 모두 흐릿했다.
듣기로는 차를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졸기 시작한 자신이 그대로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었다나.
도로테아의 말이라면 의심해 봤을 테지만, 콜린의 말까지 거짓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분명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데.”
흐릿하게나마 떠오르던 어젯밤의 기억들 몇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다 이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그보다 몸은 또 왜 이렇게 여기저기 쑤시지.”
팔을 붕붕 휘두르는 순간,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 하나가 움찔하고 몸을 웅크렸다.
“아, 실례.”
계면쩍게 건넨 그의 사과에 하녀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우드가 눈을 끔뻑였다.
에이든도 아니고, 그의 얼굴이 첫 만남에 겁을 먹을 정도로 흉악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망설이던 우드는 이미 온데간데없는 하녀를 찾는 대신 조용히 몸을 돌려 마구간으로 향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저택에서도 이런저런 일이 많이 일어났으니 외부인들을 경계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꼼꼼한 콜린 하이클레어가 관리하는 저택의 고용인들이 아닌가.
“직접 말을 몰 겁니까?”
“마부가 없다면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과 함께 우드가 손에 채찍을 쥔 순간이었다.
“헉!”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나가고 있던 하녀 하나가 말채찍을 손에 쥔 그를 몹시 당황한 얼굴로 보고는 재빠르게 지나쳤다.
“…….”
손에 착착 감기는 채찍을 내려다보던 우드는 계속해서 밀려드는 찜찜함을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차가 준비되었으니, 이만 돌아가지.”
그의 말에 침대에서 폴짝 뛰어나온 도로테아가 손을 내밀었다.
조그마한 그녀를 안아 든 우드가 방을 나서려다가, 이내 방 한 구석에 있는 밧줄 뭉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왜 저런 게 있는 게냐?”
“나도 모르지.”
방 주인인 콜린의 취향인가.
결국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고 돌아선 그가 진실을 알게 되는 일은 없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도로테아를 맞이한 것은 후작 부인이었다.
도로테아는 다정하게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린 부인의 품에 한달음에 달려가 안겼다.
“테아, 어서 오렴.”
“필립은 콜린 삼촌과 당분간 저택에서 지낼 거래요. 같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봐요.”
“그래, 그 아이가 원한다면야. 그렇게 해도 좋겠지.”
손녀의 말에 다정히 답한 노부인은 어쩐지 오늘따라 피로해 보이는 도로테아의 안색을 살폈다.
실컷 놀다 뻗어 잠들었다더니.
오랜만에 본 둘째 삼촌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콜린을 그리 따를 줄은 몰랐건만.’
묘하게 겉도는 데다 살갑지도 않고, 종종 가족 행사에조차 참석하는 일이 드물어 그가 이렇게까지 도로테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 줄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긴, 이 아이를 데려온 것도 콜린이었으니.’
어쩌면 두 사람 간에 묘한 유대감이 생겨났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멀어졌던 콜린의 식구들도 가깝게 지내게 된다면 좋은 일일 테지.
“이제 정말 봄이로구나.”
엘렌이 그렇게 쫓기듯 나간 이후로 줄곧 얼어붙어 있던 저택에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따사로운 햇살처럼 자신의 품으로 날아든 손녀가 배시시 웃었다.
“간식 먹고 싶어요.”
눈을 반짝이는 도로테아의 뺨을 살살 쓸어 주던 노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조금 미뤄야겠구나.”
“왜요?”
“오늘, 응접실에 널 보러 오신 손님이 계신단다.”
다정한 목소리가 건넨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손님이라니. 그녀를 방문할 손님이 있었던가.
옆에 있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7황자 전하께서 아가씨를 만나 뵙기 위해 일찍부터 찾으셨어요. 지금은 후작님께서 맞이하고 계십니다.”
“아…….”
외마디를 내뱉은 도로테아에게 노부인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따라붙었다.
성가신 인간의 방문에 귀찮은 마음이 밀려든 것도 잠시, 도로테아는 생글거리며 노쇠한 할머니의 걱정을 가라앉혔다.
“황자 전하께서 제가 보고 싶으셨나 봐요. 잠깐 얼굴만 비추고 다시 올게요.”
후딱 가서 내쫓아 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