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40화
개나 소나 사람이 이렇게 우스운가.
어째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목숨의 위협만 여러 번. 심지어 주변 사람들을 통한 협박까지 받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도로테아가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우드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권속으로 삼은 남자였다.
‘물론 주변에 워낙 인재가 없는 터라 급한 마음에 손을 뻗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헛으로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잘 다듬어 쓸 만한 물건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눈을 마주한 우드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의사는 확실해 보였지만 도로테아는 모르는 척 시침을 뗐다.
“어쩔 수 없네. 저렇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자를 차마 내가 품에서 떠나보낼 수는 없지.”
“…….”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걸.”
루크의 눈에 어이없음이 스쳤지만 도로테아는 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널 저주한 인물은 상위의 술사야. 술법에 능숙하고 그걸로 몇 십 년을 먹고 살아왔을 법한.”
저주는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을 갉아먹을 수 있는 부담을 안아야만 하는 일이다.
미숙한 이들의 실수는 때때로 술사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가기도 할 정도로 위험했다.
설령 성공한다 할지라도 혹여 상대가 저주를 되돌리기라도 한다면 스스로가 뒤집어쓰기도 하고, 간혹 저주를 하며 오랜 기간 노출된 탁한 기운에 사로잡혀 악귀가 되기도 했다.
“지금의 나로는 감당할 수 없어.”
헤르티아의 마지막을 보면서 확연히 느꼈다.
이제야 겨우 ‘시작점’에 섰을 뿐이다.
운이 좋아 벌써 권속을 둘이나 채웠지만 단지 그것뿐.
그녀가 이 몸을 차지하게 된 것도 고작해야 일 년 남짓이니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얼마나.”
침묵하던 루크가 나직하게 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있어야 네가 감당할 수 있게 되나.”
“적어도 5년.”
“5년이라…….”
그때가 되면 그녀는 열여섯이 되어 있을 터였다.
어쩌면 길다고도, 또 어쩌면 짧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시간을 언급하자 루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오랜 침묵 끝에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5년이면 충분한가?”
“아마도.”
“좋아, 그렇게 하지. 기다리겠다.”
“조건이 있어.”
루크가 답을 하기가 무섭게 그녀가 새로이 말을 꺼냈다.
협박받는 상황에서 감히 황자에게 조건을 내거는 당돌함에 루크의 눈썹이 올라갔지만 이내 말해 보라는 듯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여기저기 들쑤시며 나왔던 모든 것들, 전부 흔적도 없이 지워.”
“좋아.”
담백한 루크의 승낙에 도로테아가 조건을 이어 나갔다.
“5년 간은 나를 찾아오지 마. 그 어떤 간섭도 해서는 안 돼. 이곳을 찾아와 나를 만나는 일도 없어야 할 거야.”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인가?”
진지한 루크의 물음에 도로테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냥 그 전에 네 얼굴을 보면 재수 없어서 다 때려치울 것 같아.”
“…….”
“협박을 받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니잖아?”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기분은 이미 전생에 충분히 느껴 봤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하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가족들과 함께 멀리 훌쩍 떠나 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저들은 그녀가 아니니까.
그녀와는 달리 지금의 지위와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
이 ‘가족’을 스스로의 경계선 안으로 받아들인 이상 그녀는 그들의 입장까지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성가시고 귀찮은 일에 엮이긴 했지만 그조차도 감당해야겠지.
“네 얼굴을 보면 어떻게든 해 주려고 하다가도 하기 싫어질 것 같아.”
그래도 일국의 황자라고 하니 그런대로 아껴 주려 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이것도 다 그녀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하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뒷덜미를 잡힌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간에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화가 났군.”
“응.”
“이제야 인간 같지 않은 그 얼굴에, 인간미가 도는 것도 같고.”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를.
도로테아가 그와 마주하고 있던 고개를 홱 돌리자 루크가 조용히 물었다.
“네가 5년 뒤에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찌해야 하느냐? 내가 보기에 네게 5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저자의 과거를 지울 만한 능력은 충분한 것 같은데.”
“난 내가 한 약속은 모두 지켜.”
눈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건넨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루크가 그녀를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꼿꼿하게 앉아 있는 것이 신기할 만큼 왜소하고 가녀린 체구.
병색이 완연한 얼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 그녀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반드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는.
루크는 짐짓 속내를 감추고 눈앞의 작은 소녀를 향해 제가 잃어야 할 것들을 언급했다.
“너는 약속을 지킬지 모르나, 만약 네가 죽어 버리면 약속이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럼 나는 괜히 시간 낭비만 하게 되는 꼴이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루크가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위기사가 다가왔다.
뭔가를 속삭이는 듯하더니 이내 문으로 나가 누군가를 데려왔다.
도로테아보다도 한두 살 더 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프리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소년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짧은 남색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푸른 눈동자가 몹시도 인상적인 준수한 소년이었다.
도로테아는 그에게서 풍기는 묘한 짐승의 비린내를 맡고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이 아이는 내가 직접 전장에서 주워 온 아이로, 호위에 적합하다. 특히 주변의 기척을 잘 살피고 함정을 걸러 내는 능력이 뛰어나지.”
“…….”
“이 아이를 옆에 두어라. 그렇다면 나도 5년 간 아무런 간섭 없이 기다리겠다는 약속에 동의하지.”
마치 물건을 건네듯 자신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 있는데도 프리드라 불린 소년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도로테아를 담은 건조하게 비어 있는 눈동자를 본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침 주어진 시간이 끝났는지 저 멀리서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찻잔을 비우려는 루크를 향해 도로테아가 불쑥 덧붙였다.
“저건 ‘5년 뒤’에 반환해야 하는 물건이야?”
그녀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루크가 다시 말했다.
“네가 돌려주기 싫다고 한들 저 아이는 내게 돌아오려 할 거다. 신의를 아는 녀석이니까.”
“그럼, 저 아이가 신의를 저버리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하는데 5년이면 제 곁에 있다가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런 음흉하고 못돼 처먹은 주인의 밑에 있다가 자신처럼 친절하고 상냥하며 사려 깊은 주인을 만난다면 당연히 마음이 동하지 않겠는가.
“저 아이가 날 더 좋아할 수도 있잖아.”
그녀의 말을 어린아이의 치기쯤으로 여긴 것인지 픽 하고 웃은 루크가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네가 가져.”
그럴 리 없겠지만. 하는 말이 뒤로 붙어 있을 것만 같은 말이었다.
“그럼, 5년 후에 보겠군.”
“그래, 5년 후에. 아, 그리고.”
“음? 뭔가 더 할 말이 있나?”
7황자는 의외라는 듯, 자신의 앞에서 꼿꼿하게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번 한 번뿐이야.”
“……?”
“한 번은 넘어가 주겠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나에게 강요하지 마. 내 주변을 이용해 협박하지 마. 상응하는 대가 없이 나에게 요구하지 마. 그것이 무엇이든, 날 네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지 마.”
여전히 병색이 완연한 몸.
창백한 피부.
한데 왜일까……
죽음이란 불청객이 바로 코앞으로 닥친 듯,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무수한 위기를 넘겨 온 전장에서조차 경험한 적 없는, 소름이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질곡을 그렸다.
저를 덮쳐 오는 무언의 경고에, 그는 하마터면 검을 뽑아 이 작디작은 소녀를 내려치고 싶다는 충동에 굴복할 뻔했다.
그러나 그 대신,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상대의 경고를 순순히 받아들여 답했다.
“그렇게 하지. 내가 그대를 이렇게 대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소녀는 흡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꼭 지켜야 할 거야.”
* * *
약속을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정원을 몇 바퀴 돌고 온 후작은, 아직 어리디어린 손녀에게 벌써부터 눈독을 들이는 듯한 7황자가 몹시 못마땅했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7황자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 덕에 도로테아가 정령사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자 그녀의 출신을 향한 비방과 비웃음, 깎아내리기 같은 부정적인 시선들도 사그라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번 한 번뿐이다.’
황족 특유의 음험함을 아는 후작으로서는 그의 소중한 손녀를 소리 없는 전장에 들여놓을 생각은 없었다.
다소 무거운 얼굴로 그가 다시 응접실 문을 열자, 부른 적 없던 우드가 두 사람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후작이 재빠르게 도로테아를 살폈지만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이었다.
마치 한가한 시간에 별 의미도 없는 수다를 떠는 것처럼 아무것도 나눈 것이 없는 얼굴.
눈을 가늘게 뜬 후작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가운데에 끼어 있는 우드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제가 초대했어요. 예전에 7황자 전하를 뵈었을 때 인연이 있었거든요.”
“음…….”
도로테아의 재빠른 답에 후작의 떨떠름한 눈이 우드를 훑었다.
안 그래도 저 녀석의 군적을 빼니 마니 하는 문제로 펠릭스와 이야기를 나눈 상태인데 황족과 접촉해도 상관없으려나.
속으로 복잡한 셈을 하는 사이, 도로테아가 명랑한 목소리로 그의 상념을 몰아냈다.
“할아버지!”
그녀는 제 뒤에서 한 걸음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소년을 가리키며 후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7황자 전하께서 제게 친구를 소개해 주셨어요.”
“친구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가.”
도로테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천진한 눈을 하고 들뜬 어린아이처럼 높은 목소리를 냈다.
7황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자꾸 제가 위험에 빠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어서 마음이 너무 아프시대요. 되도록이면 제가 안전하게 있길 원하는 만큼 친구를 선물해 주신다 하셨어요!”
“…….”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시 말해서 지금 도로테아가 여러 번 위험에 처하는데도 후작가에서는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저택의 치안을 믿지 못하니 직접 호위를 내린다는 뜻이 아닌가.
황제조차도 혹여 뜻을 오인할까 하여 함부로 제 사람을 신하에게 내리지 않는데.
뜻밖에도 7황자가 후작의 뺨을 치다 못해 멱살을 쥐고 흔든 셈이었다.
모욕을 당한 후작은 생글거리는 손녀의 얼굴을 보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도로테아를 빗겨 나간 형형한 살기가 루크를 향해 쏟아졌다.
저를 엿 먹이고자 꺼낸 말임을 분명히 알아챘을 텐데도, 루크는 담담하게 그의 살기를 받으며 묵묵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굳이 선물을 주실 것까지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곧 출정이 예정되어 있어 당분간 이 저택에 오게 될 일도, 저 아이와 만날 일도 없을 것 같기에.”
루크가 들고 있던 차를 다 마시고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제법 쓸 만할 테니 받아 두지. 내가 돌아온 후 적어도 무사한 채로 재회했으면 하는 약소한 마음일 뿐이야.”
“그렇습니까? 오랜 기간 출정이 예정되어 있다니 무탈하게 돌아오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디 한 군데 부러져 꼭 무사하지 않기를 비는 얼굴을 한 후작이 보내는 덕담에, 루크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서 후작과 황자의 피 말리는 대화를 듣고 있던 우드는 여전히 입이 ‘닫힌’ 채로 도로테아를 힐끔거렸다.
말 몇 마디로 후작과 황자를 싸움 붙이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목격하자 더더욱 도로테아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차를 마시다 흘끔 저를 보고 다정히 미소 짓는 소녀와 마주한 그가 부르르 떨었다.
‘내가 어쩌다 저 아이와 이렇게 엮여서.’
그의 시선이 문득 그녀의 뒤에 말없이 서 있는 인형 같은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는 어두운 미래가 뻔히 보이는 소년을 향해 연민어린 눈빛을 보내며 속으로나마 경고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쳐.’
그러나 그런 그의 마음을 전달받지 못한 것인지 소년은 그저 바른 자세로 아무 말 없이 앞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 * *
7황자가 이종족과의 분쟁 지역으로 훌쩍 출정을 떠나고, 도로테아는 5년 동안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다.
한동안 그녀의 칩거와 전쟁에 중독된 듯한 7황자의 행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다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인지도 가물가물하게 여길 즈음이 되었을 때, 전쟁터를 떠돌던 7황자가 5년 만에 황도로 돌아왔다.
잠시 멈춰 있던 시곗바늘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