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07)

엘리아의 말에 이사벨라가 입을 살짝 벌리며 숨을 들이켰다.

“알, 알고 있었다면 더더욱 심각하네요. 신분 상승을 위해, 펠릭스를 이용하려고 대공비가 되신 건가요?”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그걸 로렌츠 영애께 말씀드려야 할 의무라도 있을까요.”

“대공 부인!”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퍼렇게 물든 이사벨라가 조금 큰 목소리로 엘리아를 불렀다. 이렇게까지 모욕을 줘놓고 되레 흥분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참 뻔뻔하네요. 제레미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

이사벨라가 펠릭스에 이어 제레미를 입에 올렸다.

엘리아는 화를 참아보려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후 차분히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대공님, 아니 남편이 부족한 저를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겠지요. 그게 이용 수단이건, 뭐건 저는 괜찮아요. 왜냐면.”

이사벨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엘리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거든요.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제레미는 말할 것 없이 소중한 제 아이이구요. 전 그것만으로 다 괜찮답니다. 이만하면 원하는 답이 되었을까요?”

이사벨라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엘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 “우리의 티타임은 늘 짧게 끝나 좋군요. 이만 실례할게요.”

끼이익.

뒤돌아서서 응접실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의자의 비명과 함께 이사벨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펠릭스가 로렌츠 공작가의 외동딸인 저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녀의 말에 엘리아는 잠시 멈칫하다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그러시더군요. 펠릭스가 이혼하고 저와 결혼한다면, 북부의 외교권을 돌려주겠다고.”

“……영애, 그 뜻이 무엇인 줄은 알고 말하는 거예요? 대놓고 제게 부정을 저지르겠다고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 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으신가요?”

“하, 책임이요? 제가 왜 책임을 져요?”

흥분해 되는대로 말을 내뱉던 이사벨라가 엘리아를 향해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미 저보다 성인식을 한참 전에 했는데, 당연히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셔야죠.”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약이 오른 듯 이사벨라는 씩씩대며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소리 질렀다.

“……책임지면 되죠. 어쨌든 그에게 더 필요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하, 정말 어이가…….”

벌컥.

엘리아가 입을 연 순간, 거칠게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뒤돌지 않아도 들어온 사람이 펠릭스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사벨라는 그의 등장에 일순간 얼굴에 처연한 기색을 덧씌웠다.

“…….”

그는 말없이 응접실 안에 서서 두 여자를 응시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마침 잘 왔어, 펠릭스. 대공 부인께선 잠시 나가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대화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은데.”

이사벨라가 엘리아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아니요. 제가 있는 곳에서 말씀하세요. 이건 저희 셋의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엘리아도 맞대응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여기서 물러서면 결국 또 펠릭스에게 미루는 꼴이 되고 말 거야…….’

온 신경을 다 쓴 탓인지 속이 메스껍고, 두통이 일었다.

당당한 척, 괜찮은 척했지만, 원체 심신이 약했던 엘리아라 이번 일은 타격이 꽤 컸다.

그래도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은 엘리아는 이사벨라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 *

이사벨라, 엘리아, 펠릭스 셋은 응접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어느 때보다 공간이 삭막하고, 고요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펠릭스였다.

“그래, 외교권 문제로 늘 골치 썩였잖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나요, 부인?”

펠릭스는 찻잔을 꽉 쥐어 하얗게 질린 엘리아의 손을 보며 조금 전 자신을 부르러 왔던 하녀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의 긴급한 구조 요청(?)에 응접실로 온 펠릭스는 예상외의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여린 성격이니만큼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는데, 그의 착각이었다.

‘하긴, 나한테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지.’

여자들의 싸움을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그였지만, 엘리아의 색다른 모습이 무척 흥미롭기도 했다.

“로렌츠 영애. 그걸 제게 묻는 의도가 무엇인가요?”

하얗게 질린 손과는 다르게 엘리아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어머나, 또 대공 부인의 심기를 거슬렀나 보군요. 아까는 제게 무섭게 호통치더니, 그래도 남편 앞이라고 체면은 지키시나 봐요.”

“부인이…… 호통을 쳤다고?”

그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얼마나 매섭게 말씀하시던지, 심장이 쿵쾅거려서 쓰러질 뻔했다니까.”

말도 안 되는 그 말에 얼굴을 굳히며 한마디 하려는 펠릭스에게 엘리아는 끼어들지 말라며 경고하듯 애써 미소 지었다.

그런데 또 그 당당한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조금만 더 엘리아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짓궂은 생각이 들자 펠릭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럴 리가, 대공비는 내 앞에서 화를 낸 적이 전혀 없는데 말이야.”

엘리아가 미묘한 표정으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 왠지 장난기가 묻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네가 정말 여자들을 잘 모르는 거야. 모든 여자는 두 얼굴이 있는 법이지. 그게 얌전한 대공 부인이라고 해서 그리 다르진 않아.”

“흠, 그래?”

“펠릭스. 다만 나는, 그녀의 출신이 조금 걸리기는 하네. 친어머니가 사실 후작 가문에서 일하던 하녀라는 소문이 있더라고.”

“…….”

선을 넘는 도발에 펠릭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펠릭스가 이사벨라에게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 찰나였다.

“무례에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로렌츠 영애께선, 제가 대공비라는 사실을 잊으신 모양이에요.”

펠릭스보다 한발 먼저 입을 연 엘리아는 말을 마치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후루룩, 차를 들이켰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말귀를 참 못 알아들으시네요.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지금 제 신분이 어디 가겠어요?”

“이봐요, 대공 부인!”

“왜요, 공녀.”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엘리아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뜬 이사벨라가 자기 편을 들어달라는 듯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하하!”

이사벨라의 예상과 달리 펠릭스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펠릭스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자, 이사벨라는 불쾌한 얼굴로 엘리아와 펠릭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뭐야? 두 사람?”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이사벨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펠릭스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하아, 진짜, 웃겨서 참을 수가 없군.”

“뭐, 뭐?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여우와 사슴의 싸움일 줄 알았더니, 그 사슴이 알고 보니 사자였나 보군.”

이사벨라는 구긴 얼굴을 좀처럼 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만하지. 슬슬 지겨운데.”

“펠릭스!”

“그래. 이사벨라 로렌츠. 결혼하면 외교권을 준다고. 하,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북부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나?”

“왜, 왜 그렇게 말해? 나는, 다 너를 생각해서…….”

“나를 생각해서라……. 하지만 내 부인과 북부를 무시하는 친우는 필요 없으니, 그만 제국으로 돌아가.”

펠릭스는 담백하게 제 할 말을 끝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사벨라의 두 눈가가 붉게 충혈되었다.

“내가 할 말은 이게 끝인 것 같군.”

엘리아는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부인은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으니, 이쯤에서 나는 물러서도록 하지.”

일어서지 않는 엘리아를 보니 단둘이서 이야기를 끝맺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둘이 남겨두어도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 행동으로 보면 엘리아가 이사벨라의 머리 위에서 놀 것 같긴 하네.’

입가에 미소를 띤 펠릭스가 걱정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저 이야기를 끝내고 나올 엘리아가 과연 이사벨라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못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 *

“……부인 앞이라 펠릭스가 솔직하지 못할 뿐이에요. 마음속으론 절 원하고 있을걸요?”

“로렌츠 영애.”

“네?”

엘리아는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참아줬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용서를 빌 참인가요.”

“요, 용서라니요? 내가 왜 용서를 빌죠?”

“몰라서 묻는 건가요?”

이사벨라는 엘리아의 단호한 눈빛에 잠시 움찔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이사벨라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떼를 쓸 나이는 지났어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지지 못할 나이도 물론 한참 지났고. 정 로렌츠 영애께서 못 하시겠다면, 공작가에 편지를 부치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이런 사사로운 일에 가문을 끌어들이겠다는 말씀이세요?”

“……로렌츠 영애. 먼저 가문을 들먹인 건, 바로 영애예요. 말씀하셨잖아요. 제 어머님이 누군지 도통 모르겠다고.”

“……?”

“하지만, 전 영애의 어머님을 잘 알고 있답니다. 제국 영애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분을 샤프롱으로 모시기 위해 영애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도요.”

엘리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

“본인의 딸이 유부남에게 꼬리를 흔들고 다녔다고 한다면 얼마나 비참해하실지 제 마음이 다 아프네요.”

이사벨라는 두 손을 꽉 쥐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게 무슨 말도……!”

“왜 말이 안 된다는 건가요? 사교계 소문에 민감하신 분이니, 먼 북부까지 매년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짐작은 하셨겠지요.”

“어머니는…….”

“그 어머니는 아직은 영애를 믿고 싶으실 거예요. 한데 제가 사교계에 살짝 이야기라도 뿌린다면…….”

“그 이야기를 누가 믿는다고…….”

이사벨라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말했다.

“후후, 안 믿어도 상관없죠. 진실이니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은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지요.”

“그럼,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사교계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겠어요? 순식간에 싹 펴져 아가씨 어머니를 흙탕물에 뒹굴게 만들겠지요.”

“네 따위가 감히…….”

이사벨라가 분노에 찬 눈으로 엘리아를 노려보았다. 엘리아는 그런 그녀를 향해 고민하는 듯 말했다.

“음, 부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낼지, 사교계에 소문을 먼저 내버릴지, 고민스럽네요. 이곳이 관광지라 마침 귀족가에서 많이들 와 있더라고요.”

꼿꼿한 자세로 앉아 이사벨라를 바라보던 엘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말씀할 생각이 없으신 듯하니 이만 일어서 보겠습니다.”

“……죄, 송해요.”

이사벨라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어머님 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냥 이곳에서 굴욕을 참는 게 훨씬 나았다.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못 들었네요.”

“……죄, 송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절대로…….”

“아, 영애가 이렇게 사과를 하시니, ……펠릭스의 친우기도 하니 제가 조금 참아드리지요. 그럼.”

엘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미련 없는 몸짓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사벨라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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