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07)
  • “……어떻게 가요? 여기서.”

    그윽한 눈빛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엘리아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급히 앞, 뒤, 옆이 꽉 막힌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주변을 살피며 난처한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게. 그 생각을 못 했네.”

    “기사들은 어디 갔어요?”

    “아! 당신 목소리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와버렸네.”

    “……풋.”

    눈썹을 사선으로 찌푸린 그를 바라보며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우습나?”

    “하하, 우습죠. 명색이 대공 부분데, 미아가 되어버린 데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가질 못하니. 얼마나 바보 같아요.”

    웃음이 터진 엘리아를 바라보며 펠릭스 역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하하, 우리 둘 다 바보 같긴 하네.”

    그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어느샌가 새로운 노래의 선율이 흘렀다.

    [그의 키스 한 번에 슬픔과 고통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어. 그래. 당신은 지독히도 찬란했던…….]

    몽환적인 선율과 노랫말에 엎치락뒤치락하던 인파 모두 심취된 듯 사위가 고요했다.

    그리고 엘리아와 펠릭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유난히도 맑은 하늘 아래,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안 그래도 밀착된 상태인데, 펠릭스가 자기 쪽으로 엘리아를 더 끌어당겼다. 그대로 몸이 그에게 빈틈없이 밀착되었을 때 그녀의 뺨 위로 부드럽고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 뭐예요……?”

    “키스 한 번에 슬픔과 고통이 사라진다니, 좋잖아?”

    “……네? 아니, 아니…….”

    뺨에 손을 댄 채 말을 더듬는 엘리아를 바라보며 펠릭스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고, 그녀도 이내 픽 웃고 말았다.

    “이게 무슨 키스예요. 뽀뽀 축에도 못 끼겠네요.”

    괜스레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다시금 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그는 평소답지 않게 살짝 들뜬 것도 같았다.

    “그럼 해볼까, 키스?”

    그의 물음에 화들짝 놀란 엘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 여기서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요?”

    “……흐음. 여기만 아니면 되는 건가?”

    *** “아니, 그게…….”

    엘리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 사이를 메우던 음악이 끝을 알렸다. 인파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단이 두 사람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대, 대공 전하.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로…….”

    “됐다, 가지.”

    살짝 입매를 누그러뜨린 펠릭스가 엘리아를 이끌며 앞장섰다. 그에 뒤처진 기사단은 어울리지 않는 펠릭스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히끅!”

    저 얼굴 뒤에는 항상 실력 테스트를 가장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뭐 하나?”

    “네, 넵!”

    펠릭스가 힐끗 돌아보자 기사들은 빠르게 대공 부부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붙었다.

    “……있잖아요, 펠. 하, 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해도 돼요.”

    엘리아의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 펠릭스가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북부의 바람이 너무도 뜨거웠다.

    잔뜩 달아오른 두 뺨을 꼭 감싸며 엘리아는 그의 눈을 피했다.

    “부끄러우니까, 앞 좀 보시고요.”

    주변 소음과 물러서라는 기사단의 목소리가 유독 컸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걸까.’

    말이 없는 펠릭스를 힐끗 바라본 엘리아는 곧 정신이 멍해졌다.

    그의 얼굴이 농익은 포도주보다 더 불그스름했다.

    “……그만 성으로 돌아가지.”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덩달아 엘리아 역시 빠르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 * *

    “축제를 좀 더 즐기다 와도 될 것 같군. 마차를 따로 보내주지.”

    “아, 아니야. 나도 함께 갈게.”

    펠릭스는 손사래를 치는 이사벨라를 한번 쳐다보고는 별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모두가 마차를 탔다. 아이들은 지쳤는지 어느샌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아까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펠릭스가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면서 뒤돌아서더니 갑자기 뛰어가더라니까요?”

    이사벨라는 엘리아에게 이야기하면서도 곁눈질로 펠릭스를 바라봤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좌석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랬군요.”

    얼굴이 달아오른 엘리아가 제 손등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니, 참 다행이지 뭐예요.”

    “……네.”

    “정말 부인은 복이 많으시네요. 괜찮다면, 도착해서 저와 티타임을 갖지 않으시겠어요? 이대로 침실에 가 있기엔 적적할 것 같아서요.”

    “음, 그게…….”

    펠릭스와 성에서 끝내지 못했던 것(?)을 같이 마무리하기로 했던지라 엘리아는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부탁해요. 꼭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거든요.”

    “하아, ……그럼, 그러도록 해요.”

    이사벨라의 성화에 엘리아는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이 답했다.

    펠릭스는 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엘리아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항상 창백하리만치 새하얗던 얼굴이 붉어지던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엘리아의 얼굴이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생각을 지우려 애꿎은 창밖만 노려보았다.

    * * *

    생각보다 이른 귀가에 앤드류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곧이어 정중하게 그들을 맞았다.

    엘리아는 티타임에 앞서 드레스를 갈아입기 위해서 서둘러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두르는 엘리아의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느낀 엘리아가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펠?”

    펠릭스가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엘리아의 눈을 응시했다. 엘리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우리의 약속은 어쩌고?”

    “네?”

    “당신이 언제든 해, 하지 않았나.”

    “어, 엄밀히 말하면 약속은 아니죠.”

    짓궂은 물음에 엘리아는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볼이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그럼 아까 그건 농락인가? 변명이라도 해보시죠? 대공 부인?”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긴장이 풀린 엘리아가 작게 웃음 지었다.

    ‘우리의 거리가, 제법 가깝게 느껴져.’

    사이에 놓인 딱 다섯 계단의 거리만큼. 그만큼은 가까워진 게 아닐까.

    엘리아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와 같은 계단에 서기까지 고작 한 걸음 남았을 때쯤, 엘리아는 그곳에 멈춰 섰다.

    쪽!

    두 입술이 맞닿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가 펠릭스의 어깨 위로 살포시 손을 짚었다가 금방 떼었다.

    “됐죠?”

    엘리아는 민망한 마음에 빠르게 뒤돌아서서 계단을 올랐다.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엘리아가 살짝 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쪽 손은 가슴을 짚고, 다른 쪽 손으론 입을 가린 채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그의 양쪽 귀 끝이 아까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이사벨라는 응접실에 미리 와 앉아 있었다. 엘리아가 그 앞에 앉자, 옆에 대기 중이던 유리가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신기해요. 그렇지 않나요, 대공 부인?”

    “네?”

    “사교계에서 얼굴도 드러내지 않았던 후작 영애와 전쟁 영웅인 대공의 결혼이라니.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도 못 했거든요.”

    “글쎄요.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요?”

    엘리아는 찻잔을 든 이사벨라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화가 난 사람처럼, 오늘따라 유난히 낯빛이 붉었다.

    “그럼요. 놀랄 일이죠. 제가 재밌는 소식을 하나 더 들었었거든요. 아르네스 후작 부인께서 몇 년 전부터 딸로 장사를 하려 한다고 연회 때마다 말이 참 많았거든요.”

    엘리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

    “무도회에 참석도 하지 않고, 무작정 편지로 혼담을 이야기하고 엄청난 지참금을 요구하니 어떤 남자들이 결혼하고 싶어 했겠어요.”

    “……말을 좀 가려 하시지요!”

    “맞는 말이잖아요? 거기다 돈만 많이 준다면 노인네들이라도 상관없이 보낸 것 같던데. 후후후, 그러니 모두 후작가의 사생아다, 뭐다, 말들이 참 많았어요.”

    이사벨라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엘리아의 아픈 과거를 입에 올렸다.

    “로렌츠 영애,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엘리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어머, 제 말이 어려우신가 봐요. 이런 간단한 말도 이해를 못 하시는 걸 보면 말이에요.”

    얄밉도록 싱긋, 웃어 보이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네요.”

    생각지 못한 반격을 당한 듯 이사벨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유, 유치하다고요?”

    “그럼요. 로렌츠 영애. 참으로 유치해요. 가문을 들먹이며 절 욕보이려 애쓰는 모습이 마치 8살 아이 같아요.”

    엘리아는 화를 누르며 차분하게 이사벨라에게 맞섰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나무라는 눈빛이었다.

    “아이?”

    이사벨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탓인지 찻잔 안에 파문이 일었다.

    “허, 나잇값 못 한 김에 하나 덧붙여도 되죠? 펠릭스는, 예전부터 황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걸 지긋지긋해 했어요. 결혼도 그래요. 늘, 황제파 사람들과의 혼담이 오갔죠.”

    “영애, 대공님의 이야긴 대공님께 들을게요.”

    이사벨라의 이야기를 끊어내자, 그녀는 급기야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엘리아를 쏘아보았다.

    “아니요. 제게 들으세요.”

    이사벨라는 막무가내로 말을 이었다.

    “부인의 생각보다 사교계 소문은 꽤 정확하답니다.”

    “…….”

    “대체 이 결혼이, 왜 성사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엘리아는 찻잔을 한 모금을 들이켰다. 새삼스러운 것 없는 질문이었다. 처음 이 결혼에 사랑은 없었다. 돈과 필요만이 오갔을 뿐.

    그래도 엘리아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북부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들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권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 저를 택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 잘 아시네요.”

    “영애께선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줄 아셨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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