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07)
  •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이사벨라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에 거센 파문이 일었다.

    *** 엘리아는 응접실을 나와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응접실 맞은편 복도에서 앤드류가 나왔다.

    “대공 전하께서 함께 산책하시길 원하십니다. 내려가 보시지요.”

    “그래요? 가볼게요.”

    앤드류는 바쁜 듯 인사를 한 뒤 빠르게 물러났다. 1층 현관에 당도한 엘리아는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자 포슬한 눈송이가 흩날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바로 앞 포치 아래, 펠릭스가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공비.”

    그는 엘리아를 놀리듯 짓궂게 웃고 있었다.

    “……일부러 로렌츠 영애 말에 동조한 거죠?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는 거 다 봤어요.”

    엘리아의 뾰로통한 말에 한 발자국 성큼, 그가 다가섰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의 거리는 급격히 좁혀졌다.

    “화났나?”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흐음.”

    대화를 나누는 내내 엘리아의 눈동자는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불그스름한 눈가가 이미 단단히 토라졌음을 알려줬다.

    “뭐, 그래도 당신이 제 편을 들어줬으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

    포옥.

    넓고 따뜻한 손이 엘리아의 손에 닿았다. 당황한 탓에 말끝을 흐렸다. 진한 잿빛의 눈동자가 엘리아 앞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신의 새로운 모습이 궁금했어.”

    “…….”

    “당하고만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안심되더군.”

    엘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다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려 들었다.

    “……당연하죠.”

    한참 뜸을 들이던 엘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붉게 달아오른 뺨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이사벨라 로렌츠는 이제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방문하는 건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엘리아의 뒤늦은 투정에 펠릭스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건 그저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어. 다음부턴 미리 이야기하도록 하지.”

    엘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그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그리 무심하세요?”

    “뭐. 신경 쓸 게 워낙 많으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엘리아의 뺨부터 긴 머리카락까지 연신 부드러운 손길로 매만졌다.

    “……아무튼, 고마워요.”

    “말로만?”

    “…….”

    펠릭스가 엘리아의 입술을 바라보더니 짓궂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엘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바깥에서요?”

    “언제고 해도 된다던 사람이 누구더라?”

    “그, 그래도…….”

    가깝게 다가서는 펠릭스의 얼굴에 엘리아는 두 눈을 꾹 감으며 빠르게 입을 맞추고 떼려고 했다.

    순간 커다란 손에 허리가 잡혀 버렸다. 옴짝달싹할 수 없던 엘리아는 눈을 떠 펠릭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의 혀가 아담한 입안을 훑으며 점차 영역을 넓혀 갔다. 연한 살을 훑다가도 치아를 더듬고, 엘리아의 혀를 옭아맸다.

    부드럽고 달콤한 숨결에 그녀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맞춤은 어느 때보다도 더 긴 것 같았다.

    적나라한 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마다 애가 닳았다. 펠릭스는 엘리아의 귓불과 목덜미, 허리를 차근차근 더듬어 가다가 이내 절제하듯 멈추었다.

    “하아…….”

    “…….”

    그가 입술을 떼자마자 엘리아의 달뜬 숨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엘리아.”

    평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엘리아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햇빛이 등을 지고 반사되어 잿빛 눈동자가 깊은 호수처럼 반짝거렸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도록 해. 대공비의 권위를 누리라고.”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몽롱해 있던 엘리아는 그 말이 주는 안도감이 기뻤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하고 싶어요?”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무렇지 않게 되돌아오는 대답에 엘리아는 조금 붉어진 눈으로 웃었다.

    두 사람은 빛으로 젖어 든 세상 아래 오래도록 서 있었다. 물론, 그 평화는 현관을 열고 뛰쳐나온 아이에 의해 깨져 버렸지만.

    “엘리아 님!”

    아이가 짧은 두 팔을 뻗으며 소리쳤다. 내내 찾았는데, 어디에 있었냐고 조잘거리는 말도 절대 잊지 않았다.

    엘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아이에게 팔을 뻗었다.

    “아, 아까 봤어요? 로렌츠 영애가 막 뛰쳐나갔어요!”

    아이가 방방 뛰며 기쁘게 웃었다.

    “엘리아 님이 이긴 거야!”

    제레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꺄르륵 웃었다. 난처한 듯 웃던 엘리아가 제레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레미. 그게 아니라 로렌츠 영애와는…….”

    “그래. 이긴 거야. 아주 통쾌했지.”

    엘리아의 말을 가로막고 펠릭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아이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반짝반짝 빛이 더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 애한테 그런 소릴 하세요!”

    제레미를 꼭 끌어안고 그를 노려보자, 아이가 버둥거리더니 펠릭스에게로 달려갔다.

    “어떻게요? 네? 네?”

    제레미의 질문 세례에 펠릭스는 아이를 안아 들고는 걸어가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린 엘리아가 두 사람 뒤를 서둘러 따라나섰다.

    * * *

    이사벨라 로렌츠는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제국으로 떠났다.

    엘리아는 펠릭스와 단둘이 티타임을 보냈다. 이사벨라가 오기 전 평온했던 일상 그대로였다.

    ‘홀가분하긴 한데…….’

    너무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이내 엘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말자고 다짐했다. 펠릭스가 그런 엘리아를 의문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왜?”

    펠릭스와 눈이 마주치자 엘리아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빤히 쳐다보는 눈길은 내내 떨어지지 않고 엘리아를 향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가 해서요.”

    “……뭐가?”

    “폐하께서 로렌츠 영애에게 외교권에 대해서 말씀하셨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리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펠릭스는 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신은 그 말을 믿는 건가?”

    “……네?”

    펠릭스가 반문하자 엘리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교권만으로 그렇게 단순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란 소리지.”

    “……전, 그런 건 잘 모르니까요.”

    살짝 토라진 듯 웅얼거리니, 펠릭스가 미간에 힘을 주었다.

    “……으음, 외교권을 줘봤자 사사건건 감시하려 들 게 뻔한데, 그게 북부에 무슨 이득이겠나. 애초에 황제가 그렇게 쉽게 손에 쥔 걸 놓을 사람도 아니고.”

    “그렇군요.”

    엘리아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나저나 아무래도 3일 후에 제국으로 갈 것 같아.”

    “네? 이렇게 갑작스럽게요?”

    엘리아의 푸른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폐하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반란을 진압한다거나 그런 위험한 일 때문은 아니죠?”

    엘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펠릭스의 얼굴을 살폈다.

    “위험한 일 아니야. 그저 가야 할 시기가 온 것뿐이지.”

    “그래도, 저번에 다쳐서 오셨잖아요. 마음이 좋지는 않네요. 제국으로 가시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엘리아는 제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시선은 펠릭스가 아닌 찻잔을 향해 있었다.

    “……당신은 지금도 충분해. 그거 아나? 나는 한 번도 내 아이에게 칭찬해 준 적이 없어.”

    “네?”

    “안아준 것도 근래가 처음인 것 같군.”

    “그, 그런가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엘리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장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모든 걸 하녀와 유모에게 맡기고, 나는 제국 귀족들이 으레 그렇듯이 아이를 대했지. 나도 그렇게 자랐으니까 말이야. 아이의 근황은 항상 보고를 통해 확인했고.”

    “…….”

    “그런데, 그 생각이 바뀐 건 당신이 오고부터야.”

    그의 부드럽고 낮은 어조가 방 안에 울렸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당신, 나를 변하게 해주는 당신. 이 이상 어떻게 더 당신에게 바라겠어. 충분하고 충분하게 잘해주고 있어.”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엘리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건 순식간의 일이기도 했다.

    “고, 고마워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요.”

    당황한 엘리아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다, 당신도 훌륭한 아버지예요. 좋은 남편이기도 하고.”

    주거니, 받거니. 엘리아는 그런 상황이 웃기기도 해서 말을 뱉어놓고 혼자 풋, 웃어버렸다.

    * * *

    엘리아가 티타임을 마치고 홀로 방으로 향하고 있을 때, 샤미르가 대뜸 엘리아를 복도 끝으로 끌어당겼다.

    “이능을 보여주세요.”

    “응? 왜 무슨 일이니?”

    “아버지가 집필한 책을 읽다가 계절의 이능이란 걸 봤어요. 계절의 이능 안에 날씨를 바꾸는 힘이 포함될 뿐, 날씨의 이능 같은 건 없었어요. 제게 날씨의 이능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거 확실한 건가요?”

    샤미르는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사실 잘 몰라. 가문에서 내려오는 책은 가주만 읽을 수 있고, 나는 아카데미에 가본 적이 전혀 없어서…….”

    “그냥 그렇다고 추측하신 거군요.”

    “…….”

    샤미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제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이는 어른스럽고, 침착했다.

    “……북부의 계절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정말?”

    엘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늘 그걸 바라셨잖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대신, 제로석을 주세요.”

    아이는 예상치 못한 말로 엘리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도 내 정보를 읽은 거지?”

    낮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하자, 샤미르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 미소만큼은 언제나 아이처럼 해맑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