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07)
  • “앗, 뜨거워!”

    발을 잠깐 넣었다가 뺀 아이가 울상을 지으며 제 발을 움켜쥐었다.

    “이런, 데었니?”

    엘리아가 아이의 발을 잡아 살폈다.

    “딱 봐도 뜨거운데 바로 발을 담그면 어떡해?”

    뒤에 서 있던 샤미르가 제레미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 씨. 너, 너…….”

    안 그래도 뜨거운데 샤미르의 말에 더 약이 오르고, 또 그게 서러웠던 건지 아이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곧 엘리아의 걱정하는 눈빛과 상냥한 모습에 기분이 풀렸다.

    “어디 보자. 으음. 빨갛게 달아오르지는 않았네. 괜찮아. 이번에는 천천히 온도에 적응하면서 담가보자. 그럼 괜찮을 거야.”

    엘리아의 부드러운 어투에 아이는 금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아이들은 온천에 발을 담그며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한참 아이들과 온천을 하며 풍광을 감상하던 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캐노피 아래 나란히 앉은 펠릭스와 이사벨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말을 나누길래…….’

    펠릭스의 얼굴 위로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대공 전하와 저 영애는 대체 무슨 사이예요?”

    멍하니 둘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아에게 옆에 있던 샤미르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

    머뭇거리며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엘리아에게 샤미르가 답답하다는 듯 대답을 독촉하며 빤히 바라보았다.

    “……오랜 친우 사이지.”

    엘리아는 자신에게 말하듯 되뇌면서도 굳어버린 얼굴을 풀지는 못하고 있었다.

    “흐음.”

    탐탁지 않은 듯한 샤미르의 숨소리가 들렸지만,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대한 그쪽을 바라보지 않는 것뿐이었다.

    * * *

    이사벨라는 온천 주변에 둘러앉은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설마 흙바닥에 앉은 거야?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기함할 일인데, 참……. 대공 부인께서 너무 순수해서 그러시나? 저래서 어디 사교계에서 버틸 수 있겠어?”

    이사벨라가 펠릭스의 옆에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말 펠릭스가 저 여자에게 관심이 있나?’

    그는 여태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엘리아가 언급되자 이사벨라를 힐끗 바라보았다. 물론 바로 고개가 엘리아에게로 향했지만.

    그에 이사벨라의 얼굴이 더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펠릭스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보기는 좋지만,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을 때도 과연 저럴까 살짝 걱정이 되기는 하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결혼한 지 아직 1년도 안 된 저 대공비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어렸을 적부터 근사한 영웅 같던 그가, 저렇게 미천하고 별 볼 일 없는 여자를 좋아하고 있을 리 없었다.

    “…….”

    이사벨라는 펠릭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이더니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그럼 그렇지. 북부만큼이나 얼음장 같은 네가 마음을 쉽게 열지는 않았겠지.’

    이사벨라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후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무리 대공비의 미모가 빼어나다고는 해도 펠릭스는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다.

    “……어이가 없군.”

    음산하게 들려오는 펠릭스의 목소리에 이사벨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뭐가?”

    “대공비가 아이를 아끼는 게 진심이 아니라는 건가?”

    “으응? 아, 아니. 펠릭스. 그런 소리 아니란 걸 잘 알잖아.”

    “하, 그럼 무슨 뜻이지?”

    놀란 듯 입술을 뻐끔거리던 이사벨라는 순식간에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더니 프릴이 달린 부채를 부러뜨릴 듯 힘주어 잡았다.

    “왜 이렇게 과민 반응해? 평소라면 이런 말쯤은 가볍게 넘겼잖아!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나답지 않다고?”

    “그래! 어차피 이 결혼도 폐하께 괜히 책잡히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한 거였잖아. 그래서 저런 촌스럽고 아무 힘도 없는 여자랑…….”

    이사벨라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펠릭스의 표정은 이미 차게 식어 있었다.

    “이사벨라 로렌츠. 네가 망각한 게 있는 모양이군.”

    “아니.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긴 북부야. 내 영역이자, 나와 함께 대공비가 다스리는 곳이야.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처신 똑바로 하는 게 어때?”

    “…….”

    펠릭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혀를 차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이사벨라 역시 펠릭스를 따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펠릭스!”

    ‘릴리가 떠나고 나서야 겨우 내 자릴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사벨라는 어릴 때도 항상 릴리의 그림자 역할이었다. 모두가 릴리를 사랑했으나, 그 옆에 자리한 이사벨라는 바라봐 주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가문의 이름과 걸맞게 최고의 결혼 생활을 꿈꿨다.

    “내가 네게 최고의 신랑감을 구해주마.”

    그녀의 아버지인 로렌츠 공작 역시 그것을 바라며 그녀를 황궁에 자주 데려가곤 했다.

    하지만 펠릭스와 체이스의 시선은 항상 릴리를 향해 있었다.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꿈도 이사벨라의 소중한 꿈도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릴리가 죽고 7년이 흘렀다.

    그가 황제에게 핍박을 받고 있어 그 자리를 빠르게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미적거리는 사이 자기 분수도 모르는 엉뚱한 이가 떡하니 자리를 잡아버렸다.

    ‘더럽고 천한 사생아에게 펠릭스를 넘겨줄 수 없어.’

    펠릭스는 언덕배기를 벗어나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쫓아가는 이사벨라의 마음속은 분노와 열등감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 *

    엘리아는 제레미의 장난에 호응하며 놀다가 어느샌가 비어버린 의자를 발견했다.

    ‘뭐지……?’

    “아까 대공님이 먼저 가시고, 이사벨라 아가씨께서 뒤따라가셨어요.”

    엘리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샤미르가 심드렁하게 본 사실 그대로 알려주었다.

    “그, 그랬니?”

    엘리아는 애써 침착한 척했다.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도통 이런 일은 처음이라 알 수가 없었다.

    “뭐 하세요?”

    “응?”

    “가보셔야죠. 도련님은 제가 돌보고 있을게요. 저기 유리 님도 있고.”

    “나는 싫어! 엘리아 님 옆에 있을래!”

    샤미르의 말에도 제레미가 고집스레 엘리아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샤미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제레미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샤미르의 이야기를 듣던 제레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얼른 갔다 와요!”

    그리곤 오히려 본인이 나서서 엘리아의 등을 떠밀었다.

    “자, 잠깐만!”

    엘리아는 졸지에 아이들에게 떠밀려 펠릭스를 찾으러 나서게 됐다.

    “꼭 이겨야 해요!”

    뒤에서 들리는 제레미의 영문 모를 외침에 엘리아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조그만 아이가 콩콩 뛰며 응원하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엘리아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언덕 아랫마을로 들어섰다. 축제의 거리는 잡상인들과 구경꾼, 거리의 악사들로 붐볐다.

    기사 두 명이 엘리아의 주변에서 호위하며 길을 뚫어줬다.

    주변을 살피던 엘리아는 사람들 사이에 우뚝 솟은 칠흑의 머리카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엷고 고운, 벚꽃 잎을 닮은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펠?’

    둘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틈새로 나아가며 그녀와 점점 멀어져 갔다.

    “펠! 펠릭스!”

    엘리아가 다급히 따라붙으며 소리쳤다. 아무리 불러도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잘 전달되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됐대!”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인파가 거세졌다. 엘리아는 얼떨결에 사람들 틈에 휩쓸려 기사들과 멀어졌다.

    “마님! 그쪽은 안 됩니다!”

    급류처럼 북적이는 사람들 탓에 엘리아는 기사들과 떨어져 혼자 남겨졌다.

    ‘어어? 어떡하지?’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은 처음이었다. 엘리아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거야…….”

    계속해서 인파에 휩쓸린 엘리아는 어느새 공연이 시작된 무대 바로 앞에 자리하게 됐다.

    한 여성이 노래를 부르고 있고, 악사들이 그녀를 둘러싸 감미로운 선율을 더해주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지만, 펠릭스가 신경 쓰여 집중할 수 없었다. 빠져나가려고 움직였지만 쉽지 않았다.

    “잠시만…….”

    연거푸 탈출을 시도했으나,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 탓에 엘리아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앗!”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궁금해하며 앞으로 더 밀고 나왔다. 이에 엘리아는 중심이 무너지며 몸을 휘청거렸다.

    ‘어어? 이러다 넘어지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엘리아의 허리를 누군가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여긴 왜 온 거야?”

    낮고 굵은, 이미 익숙해져 버린 중저음이 들렸다.

    “……펠?”

    엘리아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예상했던 대로 펠릭스가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한 채 주변 사람들에게 떠밀리지 않도록 엘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당신이 부르길래 쫓아왔더니, 음악 감상 중이었나?”

    “……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엘리아는 어버버,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방해한 건가?”

    살짝 서운한 눈빛을 보낸 펠릭스가 팔에서 서서히 힘이 뺐다. 그에 정신을 차린 듯 엘리아가 강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펠,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꼭 잡은 그 손이 그녀의 마음 같아서 펠릭스는 가슴이 살짝 설레었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온 거란 말이에요.”

    그녀의 투정 어린 말투에 그의 잿빛 눈이 초승달처럼 접히고,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엘리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가시지요. 미아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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