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07)
  • “그게……!”

    제레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경쾌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하필이면 쉬어 가는 박자마다 짝이 교체되는 댄스였다.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렸다.

    순식간에 짝이 바뀌었다. 아이가 저 끝으로 멀어지는 엘리아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제레미는 아까 봤던 황태자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붉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네겐 물론 통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체이스 로이드의 눈을 오래 쳐다보지 말아라.”

    잠시 잊고 있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엘리아 님은 그 눈동자를 보면 아파지는 걸지도 몰라.’

    그때, 누군가 제레미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드디어 만났어!”

    “헉!”

    “만났다!”

    리아와 엘라였다.

    “나랑 놀자!”

    “아니 나랑 놀자!”

    제레미의 양팔은 또다시 당겨졌다.

    “어, 어 애들아 잠깐만!”

    아이는 놀란 눈을 끔뻑대다가 순식간에 울상을 지었다.

    * * *

    엘리아는 홀 중앙에서 벗어나 테라스가 있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로 된 문을 열자마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추운 북부의 날씨 탓인지, 테라스에는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잘 익은 밀밭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이 유려하게 바람을 타고 흐드러졌다.

    엘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곳에? 몸이 왜 마음대로 움직이지……?’

    잠시 혼돈이 찾아왔다. 그녀는 손을 다시금 오므리며 눈을 꾹 내리감았다.

    “……오셨군요. 이런, 너무 추운 곳으로 불러낸 걸까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발이 저절로 황태자를 바라보게끔 움직였다.

    “걸치세요.”

    그의 두꺼운 외투가 어깨를 감쌌다.

    “…….”

    도무지 입을 열려고 해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대체,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황태자가 걸쳐준 외투가 세찬 바람에 날려 머리카락과 함께 펄럭였다. 엘리아는 목을 쥐어짜 내듯이 하여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능입니까?”

    엘리아의 추궁에도 황태자는 여유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오, 이능에 대해서 잘 아시나 보군요. 이리 단박에 알아채시는 것을 보면.”

    말로는 놀랍다고 하지만,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테라스 난간 위에 여유롭게 몸을 기댔다.

    누군가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이유가, 뭔가요?”

    황태자를 바라보던 엘리아가 울컥, 치미는 화를 터뜨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더 이상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힌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혀로 제 입술을 훑었다.

    마치 먹이를 앞둔 포식자가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위협적인 분위기가 엘리아를 옭아맸다.

    “가끔은 말입니다. 내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갖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

    엘리아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낯빛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럴 땐, 심장이 뜁니다. 아. 나도 못 갖는 게 있구나.”

    “…….”

    그가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섰다. 황태자는 여전히 상냥한 얼굴로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뚜벅.

    정적이 흐르는 테라스 안, 그의 구둣발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런 걸 두 번이나 못 갖는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부인.”

    황태자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그녀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싫, 어…….”

    다시 한번 그의 눈동자 위로 엘리아의 얼굴이 비치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에 발버둥을 치려는 찰나였다.

    “엘리아.”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린 탓일까. 엘리아는 무언가에 홀리듯 그와 눈을 맞추었다.

    “착하지? 우리 둘이서, 연회를 즐겨보자고.”

    분명 그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붉은 기운이 맴도는 눈동자와 푸른 눈이 마주쳤다.

    ‘안 돼……!’

    엘리아의 외침이 무색하게 서서히 그녀의 의식이 흐려져 갔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엘리아는 황태자의 리드에 따라 테라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지, 내가 왜…….’

    그녀는 그의 명령에 따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 손을 잡으세요. 즐거운 연회이지 않습니까.”

    놀리듯 읊조리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데도 들어야만 했다.

    “엘리아 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흐릿흐릿, 세상이 붉은 막에 감싸여 있는 느낌이라 정확하지는 않았다.

    아이의 작은 손이 엘리아를 마구 흔들었다.

    ‘제레미, 위험해…….’

    붉은 연기가 엘리아의 머릿속을 좀먹듯이 점점 강하게 삼켜 가고 있었다.

    * * *

    펠릭스는 집무실에 들러 급한 서신을 처리하고 다시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연회장의 문을 열자마자, 그는 소란스러운 장내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중앙홀에는 제레미와 그 양옆에 엘라드 백작 가문의 영애들이 있었고, 아이들 앞에는 엘리아와 체이스 로이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펠릭스는 어두운 낯빛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슬슬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다.

    그러자 아이가 엘리아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 하는 거지?”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단 한 사람, 엘리아의 눈은 여전히 체이스에게 향해 있었다.

    “형님, 오셨습니까. 갑자기 아이가 울기 시작해서,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체이스가 난처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손이나 놓고 말하지.”

    “아, 아아. 하하하, 누가 보면 제가 부인을 빼앗기라도 하는 줄 알겠습니다.”

    “…….”

    펠릭스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능청스러운 체이스의 전신을 훑었다.

    “흠흠. 저는 그럼 이쯤에서 물러서도록 하지요.”

    체이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엘리아의 손을 놓았다.

    그는 그녀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한 뒤, 유유히 뒤돌아 연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엘리아 님이……!”

    아이가 펠릭스 근처로 다가와 소리쳤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려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능이 있는데도 걸려든 건가.’

    체이스는 매혹의 이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나 통이 크지 않아 그 이능이 같은 핏줄이나 이능 보유자에게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 더 주의가 필요했던 걸까.

    “……엘리아 로이드.”

    수군거리는 홀 내에서도 유독 낮은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리 오시오.”

    성큼, 앞으로 다가선 펠릭스가 엘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제야 그녀는 펠릭스와 눈을 맞추었다.

    청량한 호수처럼 맑았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고 굳어 있었다.

    그는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엘리아를 물끄러미 내려 보다가 또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체이스 로이드…….’

    기분이 더럽다 못해 화가 났다. 그는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펠릭스는 무릎을 굽혀, 여자를 안아 올렸다.

    “실례하오. 아내가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야.”

    그의 말 한마디에 웅성거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그가 발걸음을 내딛자 사람들이 물러섰다. 아이는 빨개진 눈가를 비벼대며 펠릭스의 뒤를 따라나섰다.

    *** 연회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펠릭스는 제 뒤를 바짝 따라붙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쉬, 괜찮을 거다. 제레미.”

    무심하고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아이에 대한 염려가 섞여 있었다.

    “그, 훌쩍, 그렇죠?”

    “…….”

    아이는 연신 훌쩍거리며 눈가를 비벼댔다.

    펠릭스는 말없이 자신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미간은 생각에 빠진 듯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끼이익, 탁.

    방 안에 들어선 펠릭스는 엘리아를 침대 위에 앉혀주었다. 창밖에는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엘리아 님!”

    아이가 엘리아의 무릎에 두 손을 올리며 울먹울먹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초점을 잃은 채 눈동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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