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07)

끼이익.

커다란 문이 열렸다. 입구 주변에는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펠릭스와 제레미는 무심하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한 번쯤 손을 들어 인사를 해줄 법도 하건만, 두 사람은 겉치레라도 그러는 법이 없었다.

파티에 참석한 대부분이 가신과 아르티젠 북부에 관광 차원으로 머무는 귀족들이었다. 제레미 또래 아이들도 보였다.

‘명단에 있던 사람들을 모아놓으니까, 꽤 되는구나…….’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하늘에 구름이 그득한 데도 빛이 색색의 유리를 통과해 내부로 흘러들어 왔다. 천장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그 위로 신과 천사들이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날아다니는 그림들이 자리해 사람의 눈을 매료시켰다.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아르티젠 북부에서 연회를 다 열고. 사람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한 노인이 길고 흰 수염을 매만지면서 너털웃음을 쳤다. 엘리아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분명, 북부 성에 자주 왕래하던 귀족 중 한 명이었지.’

노인이 엘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엘리아 역시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뭐, 한 번쯤 이런 것도 괜찮겠지.”

펠릭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인에게 답했다.

노인의 뒤편을 바라보니 귀족들이 무리를 지어 연회장을 누비고 있었다.

‘다들 이쪽을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네.’

특히 여인들은 대부분 펠릭스와 엘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대화는 별 노력 없이도 쉽게 귀에 들어왔다.

“어머, 저분이 새로 오신 대공비?”

“그래, 후작가 따님이시잖니.”

“소문의 ‘그분’ 맞지?”

그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엘리아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 펠이 사교계를 싫어하는 거겠지.’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는 귀족들 사이에 서는 일이 얼마나 힘든 건지, 그녀도 알 것 같았다.

펠릭스가 연회장 중앙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아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따라 걸었다.

중앙에 선 그는 주변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중압감에 사람들은 말소리를 멈추고 펠릭스에게 집중했다.

“알다시피 이런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소. 그런데도 아들의 생일을 맞이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내 아내를 소개하기 위함이오.”

그녀는 바로 옆에서 간단한 말로 관중의 시선을 끄는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짝짝짝!

“환영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환영한다는 의미의 박수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엘리아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 인사를 했다.

슬쩍 옆을 살피니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북부의 잠시 머무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가신들도 전례가 없는 이 상황을 신중하게 살피는 듯 보였다.

엘리아는 가중되는 부담감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 * *

엘리아는 펠릭스와 함께 춤을 추는 것으로 무도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와의 첫 춤이었다.

16년 동안 흔한 춤 한번 못 춰보고 무엇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왈츠의 부드러운 선율과 그의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 그리고 나풀거리는 드레스. 그는 능숙했다. 조금 서툰 엘리아의 몸짓을 모두 수용하고, 이끌어주었다.

가끔 그의 발을 밟을 때마다 엘리아는 민망하게 웃어 보였다.

“앗, 죄송해요.”

“뭐, 이 정도는 괜찮소.”

실수로 당황하는 모습이 무척 새롭게 느껴져 펠릭스는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며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아, 잠시 앤드류에게 가봐야 할 것 같군.”

음악이 끝나고 잠시 아쉬운 눈길을 보낸 펠릭스가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네, 그, 그래요.”

그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엘리아였다.

“신경 쓰지 말고 아이와 함께 편히 파티를 즐기도록 해.”

“네. 펠 당신도 빨리 돌아오세요.”

“그래, 그러도록 하지.”

그의 담백한 대답에 엘리아는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엘리아는 상기된 얼굴을 추스르기 위해 중앙에서 벗어나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나 그곳에 서 있었을까,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황태자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얼마 후, 어느새 다가온 황태자가 엘리아의 바로 앞에 섰다.

“왜 여기 계십니까?”

그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엘리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바쁘시다더니, 와주셨군요.”

“그럼요. 형님의 하나뿐인 아들 생일 연회인데 제가 빠질 수야 없지요.”

“그렇군요. 그럼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턱.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덥석, 손목이 붙잡혔다.

“저, 전하?”

“로이드 부인.”

“이게 무슨…… 놔주세요.”

지난번에 이은 그의 돌발 행동에 살짝 날카롭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펠릭스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제국의 황태자이니 이 손을 그대로 뿌리칠 순 없었다.

“연회가,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네요. 북부 조사도 마쳤고, 이제 슬슬 좀 즐기고 싶은데……. 후후, 저랑 어울려 주시지요.”

엘리아는 영문 모를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어? 왜 눈동자가 점점…….’

순식간에 엘리아는 박제된 나방처럼 손끝 하나, 발끝 하나 꿈틀대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붉은 기운이 차오르고 있었다.

마치 엘리아가 마나를 끌어 올릴 때와 흡사했다.

‘이능……?’

황실의 아이들은 대부분 이능 보유자로 태어났다. 이능 보유자가 아닌 펠릭스가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황태자가 이능 보유자였다니. 자신의 안일함에 자책하는 것도 잠시 엘리아의 벽안이 점차 흐려져 갔다.

* * *

제레미는 지금, 5살 인생 처음으로 난감한 일을 겪고 있었다.

“제레미 님은 엘라랑 놀 거야!”

“아니? 엘라, 너는 선물도 없잖아! 고집 좀 그만 부려!”

프릴로 수놓은 분홍 드레스를 입은 두 영애가 제레미의 손을 양쪽에서 붙들고 늘어졌다.

졸지에 가운데 낀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아는 어서 아이들과 친해지라는 듯이 제레미가 있는 방향 쪽으로 손짓을 했다.

‘힝, 내 맘도 몰라주고…….’

제레미는 서운한 마음에 말없이 눈썹을 찡그렸다.

“쟤들 또 시작이다. 가자.”

주변에 있던 영식들은 제레미를 붙잡은 두 꼬마 영애들을 보며 슬금슬금 도망치기 바빴다.

루카스가 소속된 엘라드 백작 가문의 리아, 엘라는 제레미가 대공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서슴없었다.

마치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 그만, ……그만!”

한참 어찌할 바를 모르던 제레미가 급기야 빽!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꼬마 영애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제레미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아이들의 손을 한데 그러모아 꼭 움켜쥐었다.

“사, 사이좋게 놀라고 그랬어. 다, 다 같이…….”

엘리아와 함께할 때와는 달리 제레미의 표정은 한없이 유약하고, 소심해 보였다.

어리둥절하던 두 꼬마 영애들이 이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씩 웃었다.

“그럼 다 같이 놀자!”

“그럼 다 같이 놀아!”

아이들은 춤을 출 때도, 초청한 광대를 볼 때도 제레미를 사이에 두고 싸워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응, 그, 그래.”

그때마다 제레미는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를 시키며 순서를 정해주어야만 했다. 자칫하면 누구 하나 울먹이며 눈물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들리는 목소리에 제레미는 귀가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상황이 조금 나아진 듯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리아와 엘라는 제레미보다 한두 살씩 나이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제레미가 동생처럼 살뜰하게 두 사람을 챙겨주어야 했다.

‘엘리아 님은……?’

두 영애에게 시달리던 아이는 극적 화해(?)를 시킨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엘리아를 찾았다.

***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의 눈에 엘리아와 황태자가 보였다.

‘어어? 같이 있으면 안 되는데…….’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이는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한번 겪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두 팔을 붙잡고 있던 아이들의 손을 치우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엘리아 님!”

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황태자와 눈을 맞추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푸른빛을 품고 있던 벽안이 반쯤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제레미는 어쩐지 겁이 나 눈물을 글썽거렸다.

“제레, 미?”

“네! 제레미예요! 우리 저기 가서 춤춰요.”

아이가 엘리아의 차가워진 손을 잡아끌 때쯤이었다. 목석처럼 굳어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씨익,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허락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다녀오시지요.”

황태자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아가 몸을 움직였다.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움직임은 아니었다.

“……엘리아, 님?”

아이가 통통한 아랫입술을 깨물며 엘리아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란스럽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아이는 재빨리 엘리아를 끌고 중앙홀에 섰다.

저 멀리 리아와 엘라가 제레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황태자 전하에게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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