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07)
  • 펠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체이스, 이 개자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곧장 입밖에 욕설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너무 안일했어.’

    적어도 언질이라도 해줬어야 했다. 이능이 있다고 안심하고 내버려 뒀던 게 화근이었다.

    “아버지…….”

    아이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펠릭스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거라. 내일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제레미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는 제레미와 엘리아를 한 침대에 눕혔다. 그는 침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한참 잠을 이루지 못했다.

    “흡, 흐윽, 엘리아 님…….”

    방 안에 아이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눈을 꾹 감으며 화를 삼켰다.

    * * *

    달칵, 탁.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앉아 있던 펠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간 건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아이만 눈물 자국이 남은 채로 자고 있었다.

    “……젠장.”

    낮게 읊조리던 그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성큼성큼 문 쪽으로 성난 걸음을 옮겼다.

    엘리아의 가녀린 몸뚱어리는 이미 저 복도 끝까지 멀어져 있었다. 펠릭스는 서둘러 엘리아에게 다가갔다.

    “……여긴 당신이 갈 곳이 아니야. 제레미한테 돌아가지.”

    얼른 두 팔을 붙잡으며 몸을 돌려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아는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 사실에 안심하고 데려가려는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힐끗 뒤를 보자, 체이스 로이드가 팔짱을 끼고 문턱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심한 시각에 외간 남자의 침실을 찾으시다니, 이곳의 대공비들은 항상 이렇듯 단정치가 못하네요. 하하,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제가 좋다는데.”

    체이스의 말에 으드득 어금니를 문 펠릭스가 그 소리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엘리아는 그가 인도하는 대로 잘 따라주었다.

    “……엘리아.”

    나직이 울리는 체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엘리아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아…….”

    엘리아가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탓에 펠릭스는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뒤로 돌아 체이스를 노려보았다.

    “죽고 싶나?”

    “하하, 형님께서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또 처음 보는군요?”

    체이스의 얼굴엔 놀림이 깃든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재미?”

    “물론이죠. 아주 재밌네요. 이런 모습 무척 신선한데요.”

    펠릭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 제 손에 검이 없다는 사실이 심히 안타까웠다.

    “대체, 원하는 게 뭐지?”

    펠릭스가 경멸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걸 이제야 물어보시는 형님도 참……. 여태까진 무시하셨는데, 이번 부인은 썩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체이스가 깔보듯 턱을 치켜들며 여유롭게 미소 짓던 찰나였다.

    “엘, 엘리아 님! 아버지!”

    제레미가 저 복도 끝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잠옷 차림 그대로인 아이의 볼에는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흐끅, 일어났는데, 아무도 없어서…….”

    아이는 눈가를 작은 손으로 마구 비벼대더니, 엘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로이드 부인이, 제레미를 좋아했던가?”

    가만히 서 있던 엘리아가 체이스의 말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

    엘리아가 그만 제레미의 손을 쳐냈다.

    아이의 커다란 두 눈망울에서 뚝뚝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이는 제법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흐윽, 흐어엉. 에, 엘리아 님 돌려놔! 이 악당아!”

    아이가 서럽게 소리쳤다. 급기야 체이스에게 다가가 제 몸뚱어리만큼이나 작은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했다.

    “이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나, 제레미. 그런데 어쩌지? 나는 이 상황이 재밌는데 말이야…….”

    그는 아이의 두 어깨를 짚더니 다정하게 속삭였다.

    “으어어엉. 흐윽.”

    아이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체이스는 귀찮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아.”

    마치 하인을 부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펠릭스가 다시금 위협적으로 그 앞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엘리아의 몸도 함께 움직였다. 가느다란 두 손이 아이의 어깨를 사정없이 밀었다.

    쿵!

    아이의 몸이 쉽사리 바닥을 향해 나동그라졌다.

    “……!”

    아이는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엎어진 채 엘리아를 올려다보았다.

    “히끅!”

    많이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했다.

    펠릭스가 황급히 아이에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엘리아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 몸짓을 포착한 펠릭스가 그녀의 탁해진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푸른 새벽녘 같은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녀의 눈가에 푸른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나가 눈으로 몰리면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제, 레미…….”

    아슬한 목소리와 함께 엘리아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엘리아 님!!”

    제레미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이는 엉엉 울면서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쏴아-.

    빗소리가 울렸다. 이능이 발현되며 엘리아의 흐릿하던 눈동자에서 이채가 돌았다.

    “이건……?”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린 체이스가 이내 미소를 거두며 중얼거렸다.

    서서히 힘이 빠지는 엘리아의 몸을 펠릭스가 품속으로 받아 안았다.

    성 바깥에는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거센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 *

    붉은 연기가 뇌를 지배하는 것처럼 내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푸른빛이 쏟아졌다. 빛줄기 사이로 들려온 것은,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꿈이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이 아이를 매몰차게 내칠 리 없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품이 느껴졌다. 흐릿한 시야에서도 누구의 품인지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펠릭스, 당신…….’

    그의 진한 향이 코끝을 타고 맴돌았다. 흔들리는 시야에 엘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눅눅한 습기가 몸을 감쌌다.

    * * *

    엘리아는 번쩍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팠고, 눈이 빠질 것처럼 뜨거웠다.

    “하아, 하아…….”

    한참 숨을 골라야 참을 수 있는 고통이었다.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양옆으로 누군가 누워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깼나?”

    “페, 펠?”

    엘리아는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 목소리를 따라 옆으로 손을 뻗었다.

    뜨겁고 단단한 근육이 닿자마자,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떼려는데 도리어 붙잡혀 버렸다. 뜨끈한 열기가 차게 식은 손가락 끝을 서서히 녹여주었다.

    “……이번 일은 내 잘못이 큰 것 같군. 미리 언질이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무슨 말씀이에요? 분명 저는 전하와……. 으윽!”

    기억을 더듬던 엘리아가 머리를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일을 떠올리자, 머리가 터질 것처럼 뜨겁고 어지러웠다.

    “체이스 로이드는, 매혹의 이능이 있어.”

    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낮게 깔리듯 울렸다.

    “…….”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구나. 엘리아는 이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엘리아의 덜덜 떨리는 손을 펠릭스가 꾹 붙잡았다.

    “그, 그런…….”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당신, 괜찮나?”

    “…….”

    엘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릎을 세워 웅크리고 앉았다. 여전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끼익.

    침대의 스프링 소리와 함께 훅, 펠릭스 특유의 시원한 체취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바짝 다가선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네.”

    한참 말이 없던 엘리아가 겨우 입을 열어 답했다.

    그러고 보니, 옆에서 색색이며 잠을 자는 아이의 숨소리도 들렸다.

    그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샌가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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