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07)
  • “잠이 안 와서요.”

    “……그, 러세요? 이상하다. 전하께선 분명 주무시고 계신다고 했는데…….”

    “네? 무슨 소리죠?”

    엘리아는 놀란 마음에 모두가 잠든 새벽이라는 사실도 잊고 큰 목소리를 냈다.

    “어제 늦은 시간 전하께서 마님의 방을 찾았는데 곤히 주무셔서 돌아왔다고 하셨습니다. 추워서 깨신 모양이군요. 장작을 더 때겠습니다.”

    “아아, 괜찮아요. 그저……. 아니에요.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엘리아는 급히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설마, 날 침대로 옮겨준 게 그 사람인가?’

    엘리아의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혼란스러워서 그런 건지, 자꾸만 미세하게 심장이 떨려 왔다.

    ‘취해서 내가 무슨 짓을 하진 않았겠지?’

    엘리아는 자신의 술버릇이 어떤지 잘 몰랐다. 후작가에서 변변찮은 음식도 대접받지 못했는데 술을 자주 마실 수 있었을 리 없었다.

    “하아…….”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괜히 술을 마신 걸까. 엘리아의 한숨이 입김이 되어 허공을 맴돌았다. 예상처럼 흘러가는 일이 없었다.

    * * *

    어째선지 그날부터 펠릭스와 제레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사 시간마다 엘리아는 홀로 밥을 먹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엘리아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유리.”

    “네, 마님.”

    “혹시 제레미가 지금 어딨는지 알 수 있을까?”

    “아, 도련님 방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이 시간에는 보통 방에 있겠지?”

    “그럼요. 아직 8시면 수업 전이에요.”

    유리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그럼 가볼까?”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눈빛에 엘리아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엘리아는 가는 길 내내 유리에게 제레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도련님께선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러우세요. 예민한 부분도 분명 있지만, 그것도 다 상처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상처?”

    상처라는 말을 듣자마자, 엘리아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도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저, 마님께서 도련님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시는 것 같아서…….”

    그 말을 하는 유리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상처라니, 전 대공비가 제레미를 낳다가 사망한 일을 말하는 건가?’

    어쩐지 마음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왔어도 아이에 관하여 아는 게 없었다.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아…….’

    한심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제레미의 방에 다다랐다. 그 방문 앞에는 방금 나온 것인지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제레미도 엘리아를 발견한 듯 어깨를 움찔하더니 그녀가 부를 새도 없이 뒤돌아 복도를 쌩하니 도망치듯 달려갔다.

    “……유리, 방금 제레미였지?”

    “네, 네. 그, 그런 것 같죠?”

    “저 정도로 나를 싫어하는 건가……?”

    엘리아의 말에 유리가 다짜고짜 덥석,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아요! 분명 부끄러워서 그러신 거예요. 저번에 마님께서 주신 과자가 그렇게 맛있었다면서 얼마나 신나게 떠드셨는…….”

    “정말?”

    “아하하하, 이건 비밀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오해는 좋지 않으니까. 아 그래도 비밀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유리는 자책감이 묻어나는 얼굴로 계속해서 횡설수설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엘리아가 웃음을 참으며 유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유리, 진정하렴. 뭐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아, 제가 너무 정신없이 굴었죠…….”

    “괜찮단다.”

    엘리아는 살짝 미소 지으며, 유리를 토닥였다.

    앞으로 16년이었다.

    ‘일단, 제레미와 조금씩 친해져야겠지.’

    엘리아는 남은 세월 동안 천천히 다가가면 된다고 자신의 마음도 달랬다.

    “마님, 일단 방으로 모실까요?”

    “그래.”

    두 사람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과거로 돌아온 지, 한 달 정도가 지나고 있었다.

    성 바깥은 거센 눈보라가 쳤다. 성 외곽에 흐르던 강이 다 얼어붙을 정도의 눈보라였다.

    아르티젠 북부의 가장 추운 시기가 도래했다.

    *** 그 이후에도 제레미는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도망가느라 바빴다.

    어느 때는 식당에서, 어느 때는 실내 화원에서, 또 어느 때는 서재에서 마주쳤다.

    그때마다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꼬리를 떼고 도망치는 도마뱀처럼 내달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벌써 일주일째였다. 펠릭스고 제레미고 머리카락 한 올 마주하는 순간이 없었다.

    ‘그이는 바쁘다고 하지만, 제레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던 엘리아의 눈에 작은 인영 하나가 보였다.

    짧은 팔다리와 고불거리는 분홍 머리카락. 제레미였다.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슬쩍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후작가에서 받은 상처가 심해 극도로 소심했고, 또 쉽게 누군가에게 다가서지 못했던 그녀였다.

    ‘변하기로 했으니까.’

    이런 자신이 조금은 재미있었다.

    16년을 허송세월로 보냈지만, 다시는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어느샌가 제레미가 엘리아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아이답지 않은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안녕, 제레미.”

    엘리아가 불쑥 한 걸음 걸어서 아이 앞에 섰다.

    “으, 으악!”

    제레미는 많이 놀랐는지, 뒷걸음을 치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당황한 엘리아가 아이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인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같이 넘어져 버렸다.

    넘어지다가 손목을 접질렀는지, 통증이 느껴졌다.

    “아야…….”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제레미, 괜찮니?”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다쳤는지 살폈다.

    “왜 자꾸 이러는 거예요!!”

    제레미는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

    “……?”

    아이가 녹색 눈에 불이 붙을 듯 엘리아를 쏘아봤다.

    “흥, 뭔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알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니?”

    “말 걸지 마요!”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소리친 탓에 말을 마친 후에도 아이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흠, 날 피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구나? 말해줄 수 있을까?”

    엘리아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이의 모습을 가슴에 담았다.

    “……싫어요.”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

    “그럼 제레미. 혹시 나중에라도 왜 그러는지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니? 난 기다리는 걸 아주 잘하거든.”

    아이의 하얀 목덜미는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흥!”

    아이는 벌떡 일어나 엘리아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엘리아는 여전히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새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날 밀어내는 걸까.’

    엘리아는 문득 과거 제레미가 두 번째 어머니에 대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두 번째로 들인 대공 부인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전 대공 부인과 제레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왜 이 차가운 복도에 주저앉아서 그러고 있는 거지? 시위라도 하나?”

    생각에 잠겨 있던 엘리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펠릭스였다. 그는 시폰으로 이루어진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엘리아는 옷 사이로 드러나는 근육질의 몸을 보자마자 어쩐지 최근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술을 마시고 꼬시는 것도 모자라 이젠 시위인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술이 어디가 불만인지 삐뚜름했다.

    술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북부에서의 첫날밤을 되짚어보았다.

    “네? 제가 그날 밤, 무슨 실수를……. 아!”

    엘리아는 여전히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던 엘리아가 다시금 주저앉았다. 팔을 들어보니, 어느샌가 손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 가지가지 하는군.”

    “그러니까, 이건……!”

    엘리아는 다시 일어나 보려 했지만, 무거운 드레스 자락 탓에 손으로 바닥을 딛지 않고는 일어서기 쉽지 않았다.

    엘리아를 잠시 지켜보던 펠릭스의 입에서 또 곱지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

    “종일 여기 있을 건가?”

    살짝 불쾌한 그의 말에 엘리아가 따지려고 입을 열었던 순간이었다. 훅, 하고 엘리아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잠, 잠깐만요, 대공님!”

    “하, 언제는 펠이라더니…….”

    “네? 그게 무슨?”

    “뭐 못 들었으면 할 수 없고.”

    엘리아는 조용히 중얼거리던 펠릭스의 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 그는 제 할 말만 하더니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엘리아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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