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는 들고 왔던 유리병을 천천히 꺼냈다.
“자, 선물이야.”
“어? 쿠키!”
“좋아하니?”
“……좋아, 아니요.”
제레미의 눈동자가 유리병을 보며 사정없이 흔들렸다.
“오, 이런 네게 가져온 선물인데, 너무 아쉽네. 그럼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나 줘야겠구나.”
엘레나가 유리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자, 잠깐만요!”
“응?”
“그, 어 선물이니까 안 좋아하지만, 그래도 먹어는 줄게요!”
“어머, 그러니?”
엘리아는 귀여운 그 모습에 웃으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고맙네, 먹어줘서.”
“저, 지금 먹어도 돼요?”
아이의 청록색 눈동자가 한층 반짝이며 빛났다.
“호호호, 그럼.”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뚜껑을 열었다. 아이가 동그란 쿠키 하나를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통통한 볼살이 움직일 때마다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흠흠, 나는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펠릭스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 제레미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식당 문을 지나가고 없었다.
“제레미, 쿠키 먹고 있으렴.”
엘리아는 쿠키에 정신이 팔린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고, 펠릭스를 따라나섰다.
“대공님!”
엘리아의 부름에 그가 뒤로 돌았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꽤 먼 곳까지 걸어간 상태였다.
뛰듯이 다가가자, 그 역시 엘리아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아. 저,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뭐지?”
“합방이요. 저는 오늘, 치르고 싶어요.”
뜻밖의 말에 당황한 듯 펠릭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 건가?”
“그럼요? 왜 모르겠어요.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의식이잖아요.”
“흠, 그대에겐, 그게 중요한 건가?”
펠릭스의 물음에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뭐가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말인가.
이미 과거를 거슬러 와서 그와의 첫날밤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처음 그와 관계를 가졌을 때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격렬했기에 힘겹기도 했다. 그래도 별문제는 없었다.
“그럼 뭐가 중요한가요?”
“…….”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한 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두꺼운 눈썹이 조금 움찔했다.
“……대공님?”
“됐어,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지.”
“아니, 저…….”
엘리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뒤돌아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그와 마음이 한번 통했으니,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두 번째는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붕 떠올랐던 마음이 파사삭 내려앉아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에는 일렀다.
오늘은 단지 아르티젠 북부에서 맞이한 첫날일 뿐이었다.
‘분명 다음엔 괜찮을 거야.’
그녀는 다시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제레미는…….”
엘리아가 테이블을 치우는 하녀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쿠키 다 드시고, 올라가셨어요.”
그 말에 엘리아의 입꼬리가 기운 없이 축 내려갔다.
‘하, 부자가 똑 닮았네.’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곧 기운을 차린 엘리아는 두 손을 불끈 쥐며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 그날 밤, 하녀들이 엘리아의 몸을 연신 문지르며 닦아댔다. 단장이 끝나자마자, 엘리아는 유리가 내어준 슬립을 입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곡주 한 병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내 태도가 달라져도, 상황은 변하지 않나 봐.’
살짝 기대하고 있던 그녀는 밤이 깊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펠릭스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에효. 이거나 마셔야겠네.’
마음이 좋지 않던 엘리아가 곡주를 잔에 따랐다.
제국에서는 귀족들이 포도주를 즐겨 마시는 한편, 북부에선 주로 곡주를 마셨다. 신분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즐겨 마시는 술이었다.
콧물이 흐르면 바로 얼어버릴 정도로 추운 북부에서는, 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도수가 높은 술을 선호했다.
“하아.”
꿀꺽.
속상한 마음에 곡주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씁쓸한 액체가 혈관을 타고 몸속 이곳저곳에 퍼져 나갔다.
그 한 잔에 벌써 알딸딸하면서 눈앞이 울렁거렸다.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 혼자 시작했나 보군.”
엘리아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뚫고 동굴에 있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방금 씻고 왔는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고, 가운 사이로 두텁지만 새하얀 속살이 보였다.
“당신은…… 여전히 멋있네요?”
가운이 열릴 듯 말 듯 위태롭게 벌어졌다가 닫혔다. 두툼한 근육이 엘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응? 무슨 말을……?”
“봐요, 펠. 당신 흉터. 징그럽기는커녕, 정말 그림 같아요.”
푸른 동공은 이미 풀린 지 오래였다. 엘리아는 그에게 다가가 볼을 타고, 목까지 이어진 흉터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
엘리아의 손끝이 피부 위를 지분댈 때마다 펠릭스의 목울대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안아줘요, 펠.”
엘리아가 두 손을 뻗어 펠릭스의 목을 껴안았다.
* * *
펠릭스는 북부에 온 첫날인 만큼 엘리아를 찾아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앤드류의 간청에 이곳으로 발길을 돌린 터였다.
펠릭스도 엘리아를 혼자 둘 생각은 아니었다. 첫날밤을 치르고 싶다고 당돌하게 말했지만, 채 숨기지 못한 떨림에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와봤건만…….’
펠릭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헛웃음을 지었다.
펠릭스는 엘리아의 가냘픈 허리를 받치며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축 처진 여자의 몸에는 힘이 없었다.
“사람을, 대체 뭘로 보고…….”
펠릭스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여자의 부드러운 살결에선 아찔한 장미 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가벼운 몸을 들어 올렸다.
‘진짜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이미 취한 사람이었고, 모든 것이 헛소리였다. 다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손안에 놓인 작고 부드러운 몸에 눈길이 갔다.
펠릭스는 엘리아를 침대 위로 올려주었다. 목덜미에서 여자의 손을 떼려고 팔을 들었다.
“으음, 벌써 가요. 펠?”
“……설마, 그 펠은 펠릭스의 펠인 건가? 왜 마음대로 그런 애칭을…….”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취한 여자는 자꾸만 펠이라고 불렀다.
펠릭스가 눈을 뜬 여자에게 한 소리 하려던 순간이었다.
춥.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펠릭스의 볼에 닿았다.
시간이 정지한 듯 움직임 또한 멈추었다. 코끝으로 그녀의 체향이 그를 유혹했다. 본능에 이끌리듯 키스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툭!
여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
“음냠냠, 색색~.”
엘리아는 그대로 눈을 감고 색색, 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있었다.
“하아, 대체 이 여자는!”
펠릭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화가 난 듯 발길을 돌리려던 펠릭스는 다시 돌아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세상모르고 순진한 모습으로 잠든 그녀.
긴 한숨만이 새어 나왔다.
쾅!
거칠게 문이 닫히고 황급한 걸음 소리만이 복도에 울렸다.
* * *
짙은 어둠 속, 엘리아는 한기에 눈을 떴다.
아직 새벽인 것 같은데, 몸이 아직 혹한의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지 자꾸만 떨렸다.
‘어? 내가 혼자 침대까지 걸어왔나?’
엘리아가 보드라운 이불을 끌어당기며 생각했다. 분명한 건, 어제 펠릭스가 늦은 시간까지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북부에만 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는데…….’
조금 기대했는데, 역시나 아직 무언가를 요청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인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아가 방문을 나섰다. 복도는 푸른 새벽 공기가 들어차, 방보다 훨씬 더 냉랭했다.
두꺼운 숄을 두른 엘리아는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촛대에 꽂힌 촛불이 연신 바람 따라 휘청거렸다.
“어? 마님, 왜 더 주무시지 않고……,”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집사가 엘리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