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07)

‘이게 무슨 상황…….’

엘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큰 보폭을 따라 엘리아의 길고 가느다란 금발이 허공에서 물결쳤다.

* * *

엘리아의 가느다란 팔목에 붕대가 칭칭 감겼다. 의원은 당분간 팔을 쓰지 말라는 소리와 함께 침실에서 나갔다.

사용인들도 방을 벗어나자, 펠릭스와 엘리아만이 남아 주변에 정적이 맴돌았다.

“저,”

“당신,”

둘 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

“먼저 말씀하세요.”

이내 엘리아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 그 사람을 옮길 때요. 미리 이야기 좀 해주시겠어요?”

“그런 것도 이야기하고 해줘야 하나? 잘해줘도 문제군?”

펠릭스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네. 저를 배려해 주는 행동이란 거 알지만, 저도 잘 걸어갈 수 있거든요.”

“그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다리로?”

펠릭스가 가녀린 다리를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치마폭에 가려진 다리를 움츠렸다.

‘하,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좀 더 점잖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엘리아 자신도 16년 전과 성격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녀가 알고 있던 그의 성격도 많이 달라 보였다.

‘원래는 좀 더 말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알던 바른 모습의 펠릭스가 조금 비틀려 보였다.

그런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펠릭스는 엘리아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술 마셨을 때는 기억을 못 하는 건가?”

“……네.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던 건가요?”

“흠. 진짜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연기인 건지 모르겠군.”

그의 말에 엘리아는 작은 손을 꾹 움켜쥐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의심하는 투에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됐어. 이 얘기는 그만하지.”

“네? 말하다 말고요?”

엘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보다 제레미를 왜 그렇게 찾는 거지?”

“그야 당연히 아이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죠? 아이가 너무 예쁘기도 하고요.”

이야기를 하며 입가가 슬며시 풀어지던 엘리아는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몽실몽실 귀여운 아이의 부풀 볼이 생각났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고?”

그 모습을 펠릭스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가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 건데 거기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건가요?”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목소리가 조금은 까칠하게 튀어나왔다.

“글쎄. 그 속을 내가 알 수는 없겠지.”

“휴, 그냥 사랑스러운 걸 사랑스럽다 말하는 거예요.”

“…….”

“말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요.”

“…….”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고 적어도 여기에선 내가 어떤 기분이고, 어떤 마음인지 말하면 알아주잖아요.”

의욕만 너무 넘쳤던 걸까? 의심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속상했다.

지난 삶에서 유일하게 소속감을 느낀 곳이 아르티젠 북부였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에 본인 혼자 너무 들떴던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그대는 조곤조곤 자기가 할 말은 다 하는군.”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짧은 한숨과 함께 펠릭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떤 아이든, 계속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할 수는 없지.”

“……그렇기는 하죠.”

“더군다나, 당신이 세 번째 대공비로 들어왔으니까.”

“……혹시 제레미와 전 대공 부인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생각에 잠기듯, 엘리아의 물음에 한참 말이 없었다.

“……글쎄, 알려준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 모르겠군.”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에 엘리아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대공님. 전……,”

똑똑.

노크 소리가 엘리아의 말을 끊어냈다.

“전하, 검술 시간인데 제레미 님께서 또 사라지셨습니다.”

“제레미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이야기를 전한 이는 집사였다. 대공은 놀라며 앤드류와 같이 방을 나섰다.

그들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예전에도 검술 수업이 싫다고 도망치더니. 그 모습은 그대로네.’

엘리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풀숲을 떠올렸다.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레미는 그렇게 정신적으로 나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검술 수업이 왜 싫은 거지?”

엘리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같이 찾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가시처럼 잔가지들만 남아 있던 풀숲으로 향했다.

*** 꽤 추운 날씨였다. 거세던 눈보라는 그쳤지만, 그 폭설의 여파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엘리아의 종아리가 들어갈 정도로 땅에 눈이 쌓여 있었다.

“제레미?”

아이가 새하얀 눈 속에 웅크리고 주저앉아 있었다.

“히익, ……뭐예요.”

아이는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다가와 놀랐지만, 엘리아인 것을 확인하고는 금세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제레미, 여기 왜 숨어 있니?”

“치,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양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유리는 제레미가 어른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겉모습과 말투뿐이었다.

아이는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 모습이 보이다니, 가슴이 아파 왔다.

엘리아는 제레미가 앉아 있는 눈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여, 여기 차갑고 더러……!”

얼결에 그녀를 걱정하는 말을 건네다 놀랐는지 급히 말을 멈추었다.

아이는 양 볼과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걱정해 주는 거니?”

엘리아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아닌데요.”

“에이, 걱정해 주는 거 맞는 것 같은데.”

“아닌데.”

“호호호, 그래 그럼 아닌 걸로 하자.”

그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경계하고 있던 아이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져 있었다.

“이상해…….”

엘리아는 생각보다 훨씬 솔직한 아이의 말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제레미,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겠니?”

“……?”

분홍 머리가 몽실몽실 기우뚱하며 그가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혼자서 밥 먹으니까 너무 심심해. 혹시 나랑 앞으로 함께 식사해 줄 수 있겠니?”

“……음. 그건…….”

제레미가 망설이듯 입만 벙긋거렸다.

“아, 싫구나.”

엘리아는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같이 노는 건? 그것도 안 될까?”

노골적인 그녀의 눈빛에 아이는 민망한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른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부탁하는 건 처음이었다.

“……것도 뭐.”

“그럼, 네 생일날 연회를 여는 건?”

“……생일? 생일 연회요?”

연회라는 말에 제레미의 맑은 물빛 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래. 곧 네 생일이잖아.”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명색이 대공 부인인데,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

“정말요?”

기대를 담은 눈빛이 빛났다.

“대신, 조건이 있어.”

엘리아의 말에 아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펠릭스를 닮았다.

“……됐어요. 그냥 안 할래요.”

아이의 아랫입술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엘리아는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호호호, 아주 쉬운 거야. 날 엘리아라고 불러줬으면 하는 거야. 너무 힘든 부탁일까?”

“……네?”

실망으로 사그라졌던 눈빛이 다시 반짝반짝 빛을 되찾고 그녀를 향했다.

“안 될까?”

“저기 그건 괜찮아요.”

“어머, 정말 고마워.”

“엘리아 님이라고 부를게요.”

아이는 선심 쓰듯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호호호, 고맙네. 그럼 거래 성립?”

“네. 거래 성립이요.”

아이는 그 귀여운 분홍 입술을 움직이며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들어갈까?”

엘리아가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얼결에 손을 맞잡으려던 제레미는 빠르게 손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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