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07)

“짐 정리는 제가 해드릴게요, 마님.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셔요.”

“고맙구나.”

“고맙긴요, 원래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유리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엘리아는 이내 유리가 내민 드레스를 받아 들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소재의 네글리제였다. 새하얀 바탕에 간단한 프릴이 들어가 있었다.

엘리아는 문득, 자신이 가져온 드레스를 꺼내지 않고 바로 새로운 옷을 내온 유리가 살짝 의아했다.

‘처음 북부에 왔을 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방도 오래 불을 땐 것처럼 따뜻하고…….’

벽난로에는 불을 잔뜩 땐 흔적이 잔재처럼 남아 있었다. 분명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한기가 전혀 가시지 않았는데, 상대적으로 방은 따뜻했다.

“유리, 내가 온다고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구나.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엘리아는 이런 배려를 회귀 전에는 몰라줬던 것이 어쩐지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엘리아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유리가 입을 열었다.

“으음. 이건 대공 전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인 걸요. 자, 이것도 입으세요. 북부는 성안도 많이 추워요.”

모든 일이 펠릭스의 지시라는 말을 듣자마자, 엘리아는 잠시 머리가 멍했다.

‘전혀 몰랐어.’

기억 속, 펠릭스의 첫인상은 무정하다는 말이 통감될 정도로 매몰찬 사내였다.

예전의 엘리아는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잡아먹힐 것 같은 긴장감에 고개를 숙였다.

맹수 같은 줄만 알았던 그의 배려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으음. 전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야겠네.”

“그럼요. 마님! 전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유리는 엘리아를 따라 웃으며 자연스럽게 겉옷을 둘러주었다. 망토 형태의 모직으로 이루어진 옷이었다.

주변으로 훈기가 돌았다. 이들과 16년을 함께 보냈는데, 다시 돌아오니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너무나 많았다.

유리는 그녀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주었다.

엘리아가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북부 성의 창문은 한기를 막기 위해 보통 크기보다 작았고, 틈틈이 두꺼운 커튼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대로네.”

성은 후작가 저택보다 컸으나 황량했고, 오래된 물건들이 많았다. 모두 눈에 익숙한 물건들이었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거야.’

엘리아는 퍼덕이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머뭇거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펠릭스가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제레미에게는 따뜻하고 든든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 똑똑.

“앤드류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한참 감격에 젖은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단정하게 서서 집사를 맞았다.

“전하께서 함께 식사를 하겠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엘리아는 북부에 돌아와 대면하는 모든 순간마다 과거,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고된 여정에 힘겨워 식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이후부터는 바쁜 펠릭스 탓에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잘 없었다.

“……참석하겠다고 전해주세요.”

“네, 지금 가시겠습니까?”

“으음, 아니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엘리아의 말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마님께선 아직 식당 위치를 모르시지 않습니까?”

“……아, 그렇죠.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16년 동안 지내 왔기에 이 성의 지리에 익숙했던 엘리아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집사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아직 이곳 생활에 익숙지 않은 상황이어야 함을 되새기며 짐 가방을 뒤적였다.

엘리아는 장거리를 이동한 터라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도 첫날이 중요할 것 같았다. 그들과 친해질 단 한 순간의 기회조차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레미를 위한 선물도 줘야 하고…….’

짐 가방에서 나온 것은 쿠키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생강을 절인 쿠키. 북부에선 이런 쿠키를 먹기도 쉽지 않았다.

얼어붙은 땅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선 밀조차 쉽게 자라지 않았다.

제국 역시 북부보단 아니지만, 추운 환경 탓에 식물이 잘 자라지 않았다.

그래도 그곳에서 유일하게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 밀이었고, 제국은 밀을 활용해 많은 음식을 할 수 있었다.

‘그저 바다 건너의 땅일 뿐인데, 제국이랑 정말 많이 차이가 나네. 에휴.’

* * *

엘리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어서 제레미에게 달콤한 디저트의 맛을 보여주고만 싶었다.

식사는 북부의 척박한 환경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고 특색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버터로 구운 뒤 약간의 향신료가 첨가된 연어, 바닷가재와 흰살생선 구이, 그리고 여러 해산물이 놓여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펠릭스가 엘리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음식이 입에 맞나?”

“그럼요. 맛있어요.”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어의 살코기를 입에 넣고 씹었다.

“연어가 입에 맞나 보군?”

펠릭스가 엘리아 앞으로 구운 연어 접시를 슥, 밀어주었다.

“아! ……고마워요.”

무뚝뚝한 남자의 배려였다. 예전에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았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 모습들이 마냥 무섭기만 했었다.

그의 배려 깊은 모습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야 보이는 이 남자의 마음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살짝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려 제레미를 보았다.

아이는 식사에 집중한 건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생선 가시를 바르고 있었다.

너무 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제레미, 도와줄까?”

엘리아가 제레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접시를 가지고 오려던 순간이었다.

탁!

“됐어요.”

아이가 엘리아의 손을 밀어냈다. 아프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소리가 컸다.

“제레미!”

펠릭스가 질책하듯 낮은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그 소리에 아이는 안 그래도 통통한 볼살을 부풀리며 엘리아를 노려보았다.

자신 때문에 펠릭스에서 한 소리 들었다는 생각에 뿔이 난 모양이었다.

“이런 혼자 할 수 있는데 내가 괜히 주책이구나. 혹시 화났니?”

“……아, 아니거든요!”

엘리아가 미안해하며 말하자 아이가 당황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훗, 귀여워.’

엘리아는 자신의 기억 속 제레미가 좀 더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조용하지만, 항상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아이.

그때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아이가 나를 따라다녔지?’

제레미가 검술 수업이 싫다고 숨었던 날이 떠올랐다.

“검술 수업은, 여전히 싫니?”

“네?”

엘리아는 본인도 모르게 속으로 생각했던 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런가?”

“아, 아이들은 대부분 싫어하더라고요.”

아차, 싶은 찰나 펠릭스 역시 엘리아를 주시했다.

“……안 싫어요.”

제레미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답했다. 엘리아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아이의 표정에서 검술 수업이 마냥 좋지는 않다는 티가 났다.

‘대체 왜 싫어하는 거지?’

엘리아의 의문은 식사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펠릭스와 제레미는 엘리아가 입을 열 때 아니면 별말 없이 밥을 먹었다.

“……오늘은 일이 있으니, 편히 쉬도록 하시오.”

펠릭스는 가볍게 와인으로 입을 적시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아, 첫날밤…….’

테이블 위로 맴돌던 침묵이 깨졌다. 엘리아는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딱딱했다.

“……!”

시간을 거슬러 보면, 당시 첫날밤에도 펠릭스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엘리아 역시 몸이 좋지 않았고, 그와의 첫날밤이 부담스러워 오히려 안도했던 것 같다.

‘그 이후가 문제였지.’

제국에서는 대를 잇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에 첫날밤을 중시했다.

엘리아는 물론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그래도 그와의 첫날밤은 북부 성 사람들의 인식을 좌우할 정도로 중대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엘리아의 눈에 제레미 뺨에 붙은 흰 살코기가 보였다.

“제레미.”

엘리아가 부르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슥.

엘리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아이의 뺨에 붙은 음식을 떼어주었다.

“다 먹었니?”

“네…….”

아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피한 아이의 귓불이 발그스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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