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07)

속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와 대공은 살짝 당황하며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그보다, 대공 전하께 아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다시 창가로 향했던 고개를 그녀에게로 옮겼다.

자신과 첫 부인, 릴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한 명이 있었다.

아이는 릴리와 꼭 닮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지녀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옆에 달라붙는 여자 대부분이 아이를 싫어했다.

“그래. 제레미 로이드라고, 5살 먹은 아이가 있지.”

“아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대가 신경 쓸 필요 없는 부분이다. 그대는 대공 부인으로서 대외적인 의무만 다하도록…….”

그저 대공 부인의 자리에서 황제의 시선을 잠시 막아주며 적당한 품위만 지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저에게 부여된 의무는 다할 예정이요. 하지만 우선은 아이와 친해지고 싶어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정도는 알아두고 싶어요.”

펠릭스는 잠시 여자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아이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펠릭스는 앞에 있는 여자가 아들에게 어머니의 의무를 다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도 하고 서두르지 말았으면 좋겠군.”

여자가 어떤 생각으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직은 신뢰하기 힘들었다.

“아……!”

그 이야기에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여자는 신음을 삼키며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의 말씀이 맞아요. 저는 아직 믿을 수 없는 사람이죠. ……제가 너무 섣불렀어요. 죄송해요.”

그의 말에 불쾌한 모습을 보일 만도 한데. 여자는 무척 담담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크흠. 뭐, 죄송할 것까지는 없다.”

“그……, 자리…….”

“뭐? 작아서 안 들리는데.”

여자가 무어라 웅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

다시 마차 안에는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제 자리만 지키는 대공비는 되지 않을 거예요.’

엘리아는 펠릭스가 듣지 못한 말을 속으로 되뇌며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창가로 커다랗고 웅장한 설산의 모습이 비치었다. 아르티젠 영지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었다.

‘드디어, 북부에 왔어.’

오래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다.

엘리아는 한기에 얼어붙은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들뜬 마음을 잠시 가라앉혔다.

*** ‘어린 제레미라니.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이와의 첫 만남은 기억 저편에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엘리아는 그 당시에 멀미와 추위, 그리고 꾸준히 복용한 멜라네시아 탓에 정신이 혼미하고 몸이 아팠다.

“도착했군. 여기가 내 영지이자, 그대가 앞으로 살아갈 곳이기도 하지.”

“그렇네요. 저기, 영지민들이 모여 있어요.”

엘리아는 눈을 깜박이며 이내 미소를 지었다. 요새처럼 외곽을 둘러싼 단단한 벽들 사이, 나무로 된 커다란 문이 활짝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마을 주민이 펠릭스와 그의 부인을 반기듯 오순도순 거리를 서성였다.

‘그땐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펠릭스는 신뢰를 받고 있었구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모여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엘리아는 아주 작은 아이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이 꼭 제레미를 보는 것만 같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런데, 다들 너무 옷이 얇아요. 추울 것 같은데…….”

“이미 이 지긋지긋한 추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야. 당신 몸이나 신경 쓰지.”

“아…….”

엘리아는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북부의 추위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혹한의 날씨부터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은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마을을 둘러보던 엘리아의 눈에 저 멀리 커다랗고 푸른, 고고한 자태의 성 하나가 보였다.

마차가 그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마부가 성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대공 전하 드십니다!”

마부의 외침에 두툼하고 커다란 다리가 내려왔다.

아르티젠 성은 다리가 내려오지 않으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성과 영지 사이에 흐르는 물길 때문이었다. 성은 하나의 요새처럼 독립적이었고, 침입을 막기에 탁월했다.

쿵!

다리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지면에 닿았다. 그에 가슴이 덩달아 쿵쿵 뛰기 시작했다.

다시 주어진 기회, 이번에는 꼭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그들과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 * *

마차가 아르티젠 성문을 통과했다.

그들이 탄 마차가 멈추며, 펠릭스가 먼저 내려, 엘리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엘리아는 그 손을 잡고 한 걸음씩, 꿈에 그리던 아르티젠 성으로 들어섰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서릿발이 내려앉아, ‘얼어붙은 땅’이라는 명칭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있게 하였다.

혹한의 추위 속에 사용인들이 줄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아르티젠 성의 총집사 앤드류 휴버트라고 합니다. 앤드류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반가워요, 앤드류.”

반듯하게 빗어 넘긴 은발, 매끄러운 이마 아래 짙은 눈썹이 돋보이는 사람.

‘적어도 이 척박한 북부에서만큼은 가장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지.’

그는 펠릭스의 정보통이자, 북부 대부분의 내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일개 집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내가 내팽개쳤던 북부의 안살림 역시, 이 사람이 거의 도맡아서 해 왔었지.’

엘리아는 가만히 그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앤드류는 추운 북부의 날씨에도 검은 정장과 새하얀 장갑을 끼고, 한쪽 손을 가슴 위에 올려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쪽은, 대공 전하의 아들 제레미 로이드 님입니다.”

그가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서며 뒤에 서 있던 아이를 두 손으로 앞세웠다.

그녀의 눈가에는 반가움이 가득 차올랐다.

엘리아는 아이를 보자마자,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싶었다.

아이는 생각보다 더 키가 작았다.

“……제레미 로이드?”

겨우 허리춤에 닿는, 아주 작고 뼈대가 가녀린 아이였다. 아이를 보자 마지막 제레미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엘리아는 잠시 멈춰 심호흡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짧은 팔다리와 옅은 분홍빛의 통통한 볼살은 엘리아의 마음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제레미, 안녕!”

엘리아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갑자기 다가온 그녀의 얼굴에 아이는 놀란 듯 살짝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녹음이 짙은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당혹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나는 엘리아라고 해. 만나서 정말 반가워.”

엘리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이의 풍성한 분홍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음, 근데 왜 이렇게 얼굴이 붉지? 혹시 춥니?”

아이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곧 터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아니에요!”

엘리아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타고 불그스름한 뺨까지 닿는 순간이었다.

탁.

제레미가 손을 뿌리치며 집사 뒤로 숨었다. 엘리아는 이내 주춤, 몸을 물렸다.

“흠흠. 제레미 님께서 많이 쑥스러우신가 봅니다.”

“……후후훗, 낯선 사람이라 당황했나 봐요. 그럼 조금 천천히 친해져야겠어요.”

불편할 수 있는 상황에도 그녀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웃음에 집사가 당황한 듯 연신 헛기침을 했다. 엘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에게 닿아 있었다.

‘어릴 때는 더 예뻤었네…….’

너무도 앙증맞고 귀여운 모습, 저 토실토실한 볼을 조물조물 만지고 싶었다.

그 시절에는 왜 이 예쁜 아이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는지 바보같이 흘려보냈던 시간이 너무나 아쉬웠다.

아이가 그녀의 관심을 바라며 그렇게 주변을 서성거렸는데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제레미는 13살이 되어 아카데미에 가서도 늘 엘리아에게 편지를 보냈다.

펠릭스에게 단 한 번도 편지를 부치지 않는 아이였지만, 엘리아에게는 항상 편지를 보내왔다.

「친애하는 어머니께.

안녕하세요. 제국은 이제 한결 추위가 가셨어요. 북부는 여전히 춥죠? 이곳에서 어머니를 닮은 여자아이와 친해졌어요.

말로는 맨날 틱틱거리는데, 저를 유일하게 챙겨주는 친우랍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저, 어머니의 소식이 조금 궁금합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편지 한 통 남겨주세요.」

엘리아가 도통 답장을 주지 않자, 보낸 편지 내용이었다. 엘리아는 그렇게 밀어냈는데도 다가오는 아이가 두려웠다.

아이가 다가올 때마다 후작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눈치를 보고 노력했던 자신이 생각났다.

아이의 행동은 엘리아에게 있어 과거의 상처를 상기시키는 매개체였기에 그때는 아이를 피하기 바빴다.

참 미련하고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인사는 이쯤하고, 부인께 방을 안내해 드리도록.”

다소 가라앉은 듯한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붙잡고, 아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안녕하세요, 마님. 제가 마님께 배정된 임시 하녀랍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유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 유리. 반갑구나.”

유리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전 삶에서도 엘리아의 담당 하녀로 배속받았다.

‘그때 느꼈던 거지만, 속이 꽤 깊은 아이였어.’

대체로 아르티젠 성 사람들은 하나같이 엘리아가 팔려 왔다며 무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접해 주는 쪽에 가까웠다.

엘리아는 유리의 안내에 따라 성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엘리아는 누군가의 손길이 익숙지 않아 주어진 모든 것을 거부했었다.

‘후작가에선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대우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아르티젠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 대공가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사용인들은 극진했고, 북부 주민들은 대공가에 남다른 신뢰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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