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07)
  • “맞아, 하지만 이젠 나한테 필요 없는 물건이야.”

    “비, 비쌀 텐데…….”

    제니의 중얼거림에 엘리아는 픽, 쓴웃음을 지었다.

    후작은 엘리아의 생일을 단 한 번도 챙겨준 적이 없었다.

    그러다 딱 한 번, 엘리아의 성년식을 챙겼다. 그것도 연회에 참석한 다른 귀족 가문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참 이상하지? 성년식 선물은 받는 사람의 눈동자 색을 따라가기 마련인데, 골드라니. 마치 급하게 다른 사람 것을 준 것처럼…….”

    “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보석 색깔이 꼭 세레나 아가씨의 눈동자 색을 닮았…….”

    제니는 이야기하다가도 아차, 싶었는지 말을 멈추었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죄송해요. 아가씨.”

    “훗, 괜찮아. 이미 알고 있었어.”

    엘리아는 웃으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때, 찰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제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세레나 아가씨가 찾으시는 모양이에요.”

    그녀가 급기야 엘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어서 가봐.”

    엘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는 조급한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끼익!

    엘리아는 또다시 방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정적이 흘렀다.

    ‘계속 몸 상태도 확인했고, 휴식도 충분히 취했어. 마나도 옅지만 느껴지고 있고…….’

    눈을 감은 엘리아가 한참 동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고갈된 마나가 점차 차오르면서 몸속에 흩어져 체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엘리아는 마나를 한곳으로 모으는 일에 집중했다. 자칫 잘못하면 흩어진 마나에서 저절로 이능이 발현될 수 있었다.

    엘리아는 이전 삶이나 지금이나 마나를 잘 컨트롤하지 못했다. 멜라네시아 찻잎을 복용해 마나가 오랜 시간 고갈된 상태였으니, 어쩌면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이능을 내 마음대로 발현시키기가 힘들어.’

    이능, 그건 아주 특수한 능력이면서도 한정된 것이었다. 주로 이능은 귀족 가문에서 이어져 내려와 발현되는데,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이능이 전승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후작가에서도 발현한 사람은 나뿐이었지.’

    이능은 체내에 있는 마나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걸 배우기 위해서 이능이 있는 사람 대부분이 아카데미에 진학했다.

    사교계와 정치계를 지배하는 곳이라 그런지 다들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곳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들어갈 마음은 없지만…….’

    전에는 불안감을 부추기는 세레나 탓에 이능 자체를 숨기느라 아카데미에 갈 생각을 못 했다면, 이번에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북부에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아카데미에서 보낼 시간이 없었다.

    *** 눈을 뜬 엘리아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새기 시작했다. 푸른 눈동자가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창문을 통과해 청명하던 하늘 위로 올라갔다. 먹구름이 창가 쪽으로 몰려드는 것이 시야에 선명하게 잡혔다.

    툭, 투둑. 쏴아아.

    보슬보슬 이슬비가 내렸다.

    엘리아의 이능은 날씨를 바꾸는 것.

    몇 주간이지만 마나를 조금 회복한 덕에 넓은 공간은 꿈도 못 꾸지만, 창문 밖 작은 영역 정도는 비를 내릴 수 있었다.

    봄비처럼 살갑고 따스한, 얇은 물줄기가 후작가의 화원을 적시고 있었다.

    “예쁘고 따뜻해…….”

    창문을 두들기던 빗줄기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찰나 같은 순간이었다.

    따스했던 바람이 다시 한기를 머금고 엘리아의 방에 들어섰다.

    * * *

    펠릭스 로이드와의 결혼식은 비슈누 대신전에서 치러졌다.

    성대하지만 간결한 예식이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이 마지막 식순에서 엘리아의 입술이 아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꺼칠한 입술이 손등에 닿자, 그 부분만 덴 듯이 뜨거웠다. 엘리아는 결혼식 내내 후끈거리는 손등을 어루만졌다.

    식이 끝나자마자, 엘리아는 펠릭스와 항구로 향했다. 제국의 중심에 위치한 대신전에서 항구까지는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더그덕! 더그덕!

    마차는 쉼 없이 달렸다. 엘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펠릭스를 바라봤다. 그는 말없이 창문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엘리아는 곁눈질로 펠릭스의 얼굴을 조금씩 훔쳐봤다. 엘리아가 그랬듯 세월의 흔적이 사라진 그의 인상은 더욱 차가웠다.

    하지만 엘리아는 그를 알았다.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지.’

    과거를 더듬어보던 엘리아는 점점 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결혼식을 앞두고 쌓여 있던 긴장감이 서서히 풀어지는 듯했다.

    애써 눈꺼풀을 들어 올려봤지만 소용없었다.

    * * *

    “으흠.”

    바다 내음에 눈을 떠보니 항구였다.

    “항구에 도착했소. 이동해야 하오.”

    그가 깨우는 소리에 정신없이 잠들었던 엘리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그는 엘리아와 함께 곧바로 북부행 선박에 올랐다. 엘리아는 예상보다 더 빠른 진행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펠릭스의 커다란 손에 이끌려 다닐 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괜찮나?”

    “흐읍, 하. 네. 괜찮아요. 미리 약도 챙겨 먹었는데, 왜 이러지…….”

    그때와 똑같았다. 제니에게 부탁해 철저하게 약을 먹고 준비를 했어도, 엘리아의 속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그가 어떤 반응이었더라. 굉장히 귀찮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엘리아가 슬쩍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펠릭스는 안색이 시퍼렇다 못해 하얗게 질린 엘리아를 바라보며 한참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선이 잠시 얽혔다가 흩어졌다.

    “안 되겠군. 날이 차서 바깥에 오래 있으면 더 좋지 않겠어.”

    엘리아는 울렁이는 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머,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조금만…… 우욱.”

    헛구역질이 반복되었으나,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쯧, 거슬리게 하는군.”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엘리아의 몸이 단번에 들렸다.

    “어……?”

    당혹감과 수치심이 몰려들었지만,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입을 열면 바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토를 해도 상관없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

    말투는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엘리아는 잠시 오랜만에 느껴보는 단단하고 넓은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아, 그때의 나는 정말 바보 같았구나. 이제야 이 손길을 알아채다니.’

    배려했던 손길을 이제서야 알아차렸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에게서 묵직하면서도 관능적인 향이 났다.

    ‘당신과 꼭 닮은 향이야.’

    엘리아는 이 향만 맡으면 심장이 아플 정도로 애가 닳았다.

    흐트러지는 암흑 속, 엘리아는 파도에 따라 휘청이는 정신을 놓으며 눈을 감았다. 정신이 몽롱한 사이 펠릭스의 향이 주변을 맴돌다가 스며들었다.

    * * *

    펠릭스는 사색이 되어 잠들어 있는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깨어나면 좋겠군.”

    배가 북부에 도착했을 때도 여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펠릭스는 여자를 두 팔로 흔들림 없이 안아 들어 마차에 태웠다.

    마차 안, 창가에 기대어 잠든 여자의 모습은 신비롭기도 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소문이랑 똑같군.’

    눈앞에 곤히 잠들어 있는 여인에 대해선 이미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펠릭스의 보좌관이자, 집사인 앤드류는 그녀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었다.

    후작가 사생아. 불임이라는 소문을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병약한 몸.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작가에선 거액의 지참금을 요구해 결혼이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확실히 그녀는 떨어지면 깨질 것처럼 마르고, 움켜쥐면 바스러질 것처럼 작았다. 가느다란 발목은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앙상했다. 위태로워서, 더 눈길을 끄는 여자였다.

    첫 만남, 화려한 비즈가 알알이 박힌 청색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은 사생아가 아닌, 사랑받고 자란 후작가 영애 같았다.

    하지만 품이 확연히 남는 드레스는 그것이 그녀를 위해 준비된 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

    드레스는 빛났으나, 펠릭스를 붙든 건 여자의 눈빛이었다.

    여자는 유리알처럼 푸르다 못해 청아한 눈동자로 펠릭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을 알고 있는 듯, 이상하지만 그 눈빛에는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의 착각이겠지만, 그래도 자꾸만 그 순간이 떠올라 여자를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도 펠릭스는 여자의 잠든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반듯한 눈매와 콧대,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그 입술 사이에서 색색, 여자의 숨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도 같았다.

    “으음…….”

    여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뒤척였다. 펠릭스는 얼른 눈길을 돌리며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 여긴‥‥….”

    “깼나? 여긴 아르티젠 북부다.”

    펠릭스의 말에 여자는 흠칫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 이런. 깨워주시지 그러셨어요.”

    “……글쎄.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더군.”

    “네? 아,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없어.”

    “……그래도, 혹 앞으로 이런 일이 있다면 꼭 깨워주세요. 대공님께 민폐를 끼쳤네요.”

    “흠…….”

    “저 생각보다 약하지 않거든요.”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음, 약하지 않아도 배에서 기절할 수는 있나 보군.”

    대공이 내뱉듯이 툭 이야기를 던졌다.

    “네?”

    대공의 엉뚱한(?) 말에 그녀의 눈이 약간 커졌다.

    “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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