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61)

* * *

으음. 나는 몸을 뒤척였다. 온몸이 무거운 게 잘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끝을 움찔거려 보자 큼직한 무언가가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게 느껴졌다.

뭐지?

미간을 좁히며 더 움직여 보려 안간힘을 쓰는데 이마를 문지르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나는데 어째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그게, 몸은 제대로 회복되었습니다만 정신적인 문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대로 평생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가?”

“…….”

나는 귀를 쫑긋했다. 낯선 목소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뭐라 대답하고 있었다.

내가 일주일이나 넘게 잠들어 있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내 정신은 이렇게 멀쩡한데. 정말 저 사람 말대로 몸은 평생 잠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 해야 일어날 수 있는 거지? 끙끙거리며 뒤척여 봐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가 봐.”

“네, 필요하면 다시 불러 주십시오.”

탁.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게 느껴졌다. 나직한 한숨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설마 라히트리안이 나를 돌봐 주고 있던 건가. 이건 좀 의외였다. 왜 그가 직접 간호하고 있는 걸까.

당연히 아니카가 그 역할을 대신 할 줄 알았는데.

‘설마 아니카한테 벌을 내린 건 아니겠지?’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내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렘무트가 소환되고 난 이후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라히트리안이 제때 나타나 준 것 같은데.

흐릿한 기억 너머로 쓰러지던 몸을 누군가 부축해 주던 느낌이 생생했다.

“황녀.”

그리고 분명 이것과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애타게 불렀었지.

……쓰러지기 전이었으니까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다. 라히트리안이 나를 애절하게 부른다니 말도 안 되잖아.

“언제쯤 눈 뜰 생각이지?”

나는 아직 잡혀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글쎄, 언제 일어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실 일주일이나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기껏해야 하루 정도 지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럼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도 진작 돌아갔겠구나. 튜니아트 제국에 내 존재를 알렸으려나?

머릿속이 복잡해지니 두통이 이는 것 같다. 에이, 모르겠다.

생각한다고 한들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잠자코 누워 있는 게 나았다.

폭신한 이불을 만끽하며 호흡을 고르게 내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히트리안 님, 이안입니다.”

“들어와.”

“말씀하신 마룡은 지금 지하에 잘 묶어 뒀습니다만. ……아무래도 일이 복잡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진작 처리했어야 했는데, 내가 실수했어.”

라히트리안은 진심으로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의 분노의 화살은 당연히 내게 쏠릴 줄 알았다. 그의 눈을 속이고 몰래 움직인 것도 모자라서 렘무트까지 소환해 내고 말았으니까.

어찌 됐든 그의 심장을 점유하고 있는 입장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을 일방적으로 어긴 거기도 했다.

‘일어나면 라히트리안한테 사과 먼저 해야겠는걸.’

“……마룡이 라히트리안 님의 마력에 묶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허술하게 소환했는데 계약이 성립됐다는 건가?”

……허술하다니. 그것참 평가가 박했다. 이쪽은 나름 최선을 다한 거란 말이야.

“……상당히 허술하기는 했죠. 저도 좀 황당했습니다만 그 마룡이 얻어낼 게 있어 적극적으로 부름에 응해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럼 간단하군. 죽이면 계약도 파기될 테니까.”

라히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저…… 그런데 소환자가 황녀님이셔서요.”

“마력은 내 것을 사용했을 텐데.”

“아직 황녀님 상태가 온전치 않으신데 좀 더 미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르고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니…….”

따가운 시선이 뺨 위로 닿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누워 있는 동안에도 계속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터지고 있는 모양이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아주 오래오래 누워 있어야겠다.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부디, 라히트리안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럼 보류하는 걸로 하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나도 몰랐지. 이런 상태로 며칠이나 더 지속될 줄은 말이다.

* * *

정신이 깨어나고 사흘째.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억지로 깨워 주면 안 되는 걸까 간절하게 바라게 될 정도로.

‘후유증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정신이 멀쩡하니 이 정도면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매일 찾아오는 주치의는 이렇다 할 이유를 대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져 돌아갈 뿐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매우 놀랍게도 라히트리안은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다.

가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해 주었는데 그중 내가 관심 있게 귀를 기울이는 건…….

“황녀를 당장 돌려보내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더군. ……튜니아트를 지도에서 없애 버리면 황녀가 슬퍼할까?”

……뭐라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튜니아트를 없애 버리면 내가 슬퍼하냐니.

지금 그 말을 한 사람이 진정 라히트리안이 맞는 건가?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이 떨어졌다.

라히트리안이 갑자기 왜 이러지?

혼란스럽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때였다.

“이카르센으로 모든 마법사가 귀환했어. 당장 전쟁을 치러도 문제될 게 없지.”

그 순간 놀랍게도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침대맡에 앉아 있던 라히트리안과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자안이 크게 뜨였다. 숨을 쉬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나또한 방금 들은 말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카르센으로 모든 마법사들이 귀환한 상태라니! 정말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인 거냐고!

“라히트…….”

그를 부르려는데 건조한 목이 긁히며 통증이 느껴졌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그런 듯했다.

나는 몇 번 마른기침을 하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라히트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물 좀 주면 안 될까요? ……그리고 설마 진짜 전쟁을 하려는 거 아니죠?”

“…….”

“라히트리안?”

그의 얼굴 앞에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 봤다.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 남자가 진짜. 언제까지 사람을 무시할 생각이야.

“알았어요. 알아서 물 떠 오면 되잖아요.”

내가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깨닫기도 전에 나는 침대에 풀썩 눕혀졌다.

“……어?”

나는 놀라 허공에 손을 허우적댔다.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손을 내려다보자, 라히트리안이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씨익 웃었다.

“이제 겨우 일어났으면서 어딜 가려고. 황녀는 여기 얌전히 누워 있어.”

“…….”

“할 말이 아주 많을 거야. 그렇지?”

“…….”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라히트리안이 다시 한번 반복했다.

“아니. 황녀는 많아. 내가 들을 게 많거든.”

오, 안 돼. 왜 일어나자마자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나요.

나는 울상을 지었다.

“라히트리안,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지금 일어났잖아요.

환자에게 이런 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나 라히트리안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튕겼다.

“안 돼.”

나는 이마를 감싸면서 울상을 지었다.

그간 묘하게 라히트리안의 태도가 부드럽다고 느꼈는데, 기분 탓이었나 보다. 이렇게 단호한 걸 보면.

나는 방을 나서는 라히트리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나는 그대로 굳었다. 라히트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딱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도망을 시도하는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는 내 침실이라 감히 황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는 두 번째 충격에 휩싸였다.

* * *

렘무트는 녹이 슨 쇠 목줄을 만져 보다가 눈을 번뜩였다.

“깨어났군.”

리즈벳이 깨어난 게 느껴졌다. 그럼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현재 그가 갇혀 있는 곳은 사방이 모두 암흑이었고, 그동안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했다.

당연히 그런 건 렘무트에게 그리 치명적인 게 아니었다. 다만…….

렘무트는 자신의 가슴 중앙을 내려다보았다.

하마터면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파괴당할 뻔했다. 그때의 섬뜩한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괴물 같은 놈.”

그의 손이 리즈벳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 강렬한 통증과 함께 상처가 그대로 반사되어 렘무트의 심장이 뚫렸었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에는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쓰러진 리즈벳을 안아 들고 단번에 렘무트를 튕겨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을 초토화시킨 라히트리안은 가히 미친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렘무트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으나 모르지는 않았다. 그가 재밌다는 듯 큭큭댔다.

“그런 놈이랑 엮인 황녀가 불쌍하군.”

아니, 정정하겠다. 그런 두 사람과 엮여 버린 제 처지가 제일 안타까웠다.

“이런 젠장.”

그가 현실 파악을 끝내고 욕을 내뱉었다. 그래, 사실 제 처지가 제일 불쌍했다.

리즈벳 튜니아트와 계약이 성립되어 버린 탓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마족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더는 리즈벳을 해칠 수 없고, 리즈벳의 말이라면 개처럼 따라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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