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61)
  • * * *

    “라히트리안이 제대로 한 방 먹이는군.”

    “황실에서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이카르센 제도에서 그런 소식이 들리냐고 난리입니다.”

    유스티아가 울적하게 말했다. 이러다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리즈벳 황녀가 이카르센 제도에 있는 건 확실해.”

    “그럼 뭐 하나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는데요.”

    “돌아가기 전까지 찾아내야지.”

    “차라리 돌아가고 나중을 기약하는 게 어떨까요?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세이어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황후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소식이군.”

    분노한 황제의 심기를 돌리기 위해서는 다른 소식이라도 가져가야 했다.

    예를 들어, 튜니아트 신성 제국으로부터 고마움의 인사를 받을 수 있는 것 말이다.

    상황이 꼬여 버렸으니 어떻게 해서든 리즈벳의 존재를 확인하고 돌아가야 했다.

    적어도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연락을 넣을 수 있는 정도의 증거가 필요했다.

    “여신이 내게 손을 좀 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여신은 황녀의 손을 들어 주겠지요. 세이어드 님을 왜 도와주겠습니까?”

    세이어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들이 일어나기에 한참 이른 시간이었으나 그는 수련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원치 않아도 일찍 눈이 뜨였다.

    새벽 공기를 느끼며 성 곳곳을 살피던 적안이 어느 한 곳에 멈추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이질적인 기운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저기에 뭐가 있지?”

    “저쪽에는 호숫가가 있다고 한 걸로 기억합니다.”

    “가 봐야겠군.”

    서로 다른 성질의 기운이 동시에 느껴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아주 미약하게 느껴졌지만 아트레시아 혈통을 타고난 세이어드는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이카르센에는 신기한 게 많아. 탐 날 정도로.”

    “저는 세이어드 님이 더 신기하거든요. 가끔은 무섭습니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아트레시아 황족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전장에서 오랜 기간 굴러 예민하게 다져진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가 참전하는 전투에서는 적장이 절대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이기도 했지만.

    호숫가 근처에 도착하자 유스티아가 눈을 반짝이며 구경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군요. 꽃이 마력으로 피어 있습니다.”

    “그래. 살아 있는 건 멀쩡하지 못할 테니까.”

    유스티아는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슬슬 이카르센 제도의 마력을 버티는 게 힘겨웠다.

    만약 오늘 제국으로 떠나는 게 아니었더라면 내일쯤 탈진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세이어드는 호숫가 너머에 세워져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적안이 번뜩이며 한 곳에 멈췄다.

    푸른 첨탑 옆의 새하얀 고궁. 그곳에서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크기가 작고 거리가 꽤 있어 세이어드가 머무는 별궁에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그는 거침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외부인의 출입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 투명한 막에 의해 가로막혔다.

    결계였다. 그것을 손으로 툭툭 두드려 보던 세이어드가 큭큭 웃었다.

    “찾았다.”

    “네?”

    유스티아가 호숫가에 핀 꽃을 구경하다 말고 의아하게 돌아봤다.

    “내가 뭐라고 했어, 유스티아. 여신이 내게 손을 들어 줄 거라고 했지.”

    세이어드가 단전에서 마나를 끌어 올렸다. 폭발하듯 끓어오르던 마나가 검의 형태를 하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멀리 떨어져.”

    “잠, 잠깐만요, 세이어드 님. 지금 뭐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안 됩니다. 소란은 안 돼요! 뒷수습은 어떻게 하려 그러세요?!”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이카르센 성에는 검을 반입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사용해야지.

    세이어드가 마나로 만들어진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충격을 전부 흡수하지 못한 결계가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 * *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폭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아니카가 쿨럭이며 피를 토했다.

    창백하게 질려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 아니카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니카! 지금 이게 무슨 일이에요?!”

    “황녀님, 지금 당장 도망…… 하아, 이미 늦었나.”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일어선 아니카가 겨우 말을 뱉어냈다.

    이미 늦었다니 뭐가? 나는 계속해서 말을 하려는 아니카에게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하지 말아요. 제가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그녀의 손목에 새겨져 있는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완전히 빛을 잃었다.

    아니카는 창문 밖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때 창가 문턱에 발을 딛고 누군가 나타났다.

    눈가를 살짝 가리는 웨이브 진 금발에 적안.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호오. 정말 리즈벳 황녀로군.”

    “……세이어드 아트레시아.”

    “여신이 나한테 손을 들어 준 것 같은데. 이카르센에서의 마지막 날에 이렇게 마주친 걸 보면 말이야.”

    그가 방 안으로 가볍게 들어왔다.

    나는 주춤거리며 아니카를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는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황녀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도와주려는 입장이지. 이카르센 제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나?”

    “이대로는 아니요.”

    나는 생글 웃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런 방식으로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렘무트를 빨리 불러내게 생겼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렘무트.”

    조그마한 목소리에 세이어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이 굳어지며 적안이 바닥으로 향했다.

    검은색 오망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뚜렷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리기라도 하는 듯 일사분란하게 이리저리 선이 그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뭘 불러낸 거야, 황녀. 미쳤나?”

    오망성을 본 세이어드가 미친 여자를 본 듯한 얼굴로 소환진에서 떨어졌다.

    아트레시아 제국에서는 마법을 등한시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그게 아니면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판단이 선 걸까?

    어느 쪽이든 탁월한 판단이었다.

    “마족이 소환되고 있을 때 근처에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멀리멀리 떨어지세요.”

    “황녀님, 지금 뭘 불러내신 겁니까!”

    진동하는 땅에 아니카가 당황하며 외쳤다.

    “마족이 소환되는 동안에는 외부에서도 접근을 못 하는……!”

    숨 막힐 정도로 음습한 기운에 온몸이 짓눌릴 것만 같았다.

    아니카가 휘청이며 입을 틀어막았다. 울컥 하며 다시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기운이 온몸에서 쭉 빠져나가고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으려는데 숨이 가빠 오며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하, 내 신세야. 마족을 소환하면 외부에서 접근을 못 하는지 몰랐지.’

    그런 건 진작 주의사항으로 써 놨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읽은 책의 저자도 마족을 소환해 본 적 없는 어중이떠중이인 게 틀림없다.

    소환에 성공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문구가 있을 때 정보의 정확성을 의심을 해 봐야 했던 건데.

    창밖을 내려다봤다. 소환은 방에서 했는데 정원까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조각상, 분수대, 벤치, 나무 가릴 것 없이 모두 뽑혀 나가거나 날아가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의도치 않은 재물 손괴에 못 본 척 흐린 눈을 시전 하기로 했다. 저건 렘무트가 저지른 거지, 내가 한 게 아니야.

    어느덧 소환진은 완벽한 외양을 갖추었다.

    ‘끝난 건가?’

    마기가 잠잠해지자 세이어드가 무섭게 추궁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황녀. 마족을 소환하면 영혼이 넘어간다는 걸 모르나? 그리고 튜니아트는 마력을 다룰 수 없을 텐데?”

    참 아는 것도 많았다. 그래, 그의 말대로 튜니아트 혈통을 타고난 존재는 마력을 일절 다룰 수 없었다.

    그것은 여신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라히트리안의 마력이 내 몸을 복구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과 내가 사용하는 건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즉, 내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온몸의 장기가 꼬이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퍼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엄청 아프네. ……그래도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아직까지 숨 쉬고 있는 거 보면 명이 나름 질긴 것 같기는 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적발에 적안을 가진 렘무트가 샐쭉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언제 불러 주나 했더니.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잖아, 리즈벳.”

    렘무트는 거슬린다는 듯이 세이어드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급하게 물러나며 마나로 폭발을 막은 세이어드가 인상을 구겼다.

    멍하게 렘무트를 보고 있던 아니카가 하얗게 질렸다. 그의 기운에 완전히 압도된 것 같았다.

    렘무트는 내게 다가오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영광스럽게 생각해도 좋아, 리즈벳. 네가 나를 소환한 처음이자 마지막 인간이 될 테니까.”

    “나한테 닿으면 화상 입는 거 아니었어요?”

    “얻을 게 있으면 살 정도는 내어 줘야지.”

    렘무트의 손이 날렵하게 심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렘무트의 손이 벌써 관통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씨, 아파. ……라히트리안 안 오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울먹이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힘없이 추락하는 몸을 누군가 잡는 게 느껴졌다. 아득한 정신 너머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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