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61)

* * *

나는 입 앞으로 들이 밀어진 숟가락을 노려보았다.

“……제가 먹을 수 있는데요.”

“아까 숟가락을 놓쳤잖아.”

“……그건 실수였어요.”

사실은 손에 힘이 빠져 그런 거였지만. 그렇다고 라히트리안이 먹여 주길 바란 건 절대 아니었다.

“주치의 말을 들었으니 알겠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과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어디가 과한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말문이 막혔다. 라히트리안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 남자가 이렇게 변한 이유가 뭐지. 나는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건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어디 한번 당해 보라는 심정으로?

아무래도 해결 방안을 모색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불을 끌어당기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자 라히트리안이 미간을 좁혔다.

“너무 적게 먹는군. 황녀는 본인 팔뚝이 얼마나 가는지 알고 있나?”

“하나도 안 그래요.”

“지나치게 가볍고.”

“라히트리안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치의가 매일 먹어야 한다고 보내 준 약을 들이밀었다.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시커먼 액체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저 맛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손이 가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먹지 않겠다는 의미로 시위하듯 컵을 노려보자 라히트리안이 손에 쥐여 주었다.

“저는 튜니아트 황족이라서 이런 거 안 마셔도 돼요. 이미 몸은 멀쩡하다고요.”

“애도 아니니 고집은 그만 부리고 마셔. 황녀는 피를 토했었어.”

“정말 괜찮은……, 마실게요.”

서슬 퍼런 자안에 나는 얌전히 약을 받아 마셨다.

윽, 써.

뜸을 들이면 더 쓸 뿐이니 벌컥벌컥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데 언제 준비한 건지 그가 사탕을 까서 주었다.

익숙하게 사탕을 먹으려던 나는 흠칫 굳었다.

라히트리안이 하나씩 챙겨 주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없으면 허전하고 서운하기까지 했다.

‘굉장히 큰일이야.’

너무 편해서 이러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기는커녕 그에게 평생 의존하며 살고 싶어질 것 같았다.

위험한 남자. 그를 경계하듯 보자 라히트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안 먹지?”

“안 먹어도 돼요. 제가 애도 아니고 사탕은 됐어요.”

고개를 저으며 쿠션에 등을 기대 누웠다.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잠들어 있던 사이에 들었던 의문은 어느새 모두 맨 뒤로 밀린 지 오래였다.

현재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은, ‘라히트리안이 왜 그럴까?’였다.

* * *

내가 완전히 깨어난 지도 사흘째.

라히트리안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될 정도로 극진하게 나를 보살폈다. 심지어 내게서 떨어지지도 않으려 하고 있었다.

왜! 대체 왜?

세상에 이유 없는 친절은 없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히트리안이 이렇게 나오니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크게 외쳤다.

“와. 이게 얼마만의 바깥 공기야!”

산책을 해도 된다는 주치의의 말에 드디어 사흘 만에 방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무리하지 마, 황녀.”

“주치의가 괜찮다고 한 거 들었잖아요.”

“오래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말은 어디에 빼먹었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눈물겨운 비화가 숨어 있었다.

라히트리안의 과보호로 인해, 나는 의식을 차린 후에도 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했다.

특히 침대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하기 일쑤였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주치의를 불러 확실히 하기로 했다.

“자, 말해 봐요. 제 몸 상태가 지금 정확히 어떻죠?”

“육체적인 부분은 아무 문제가 없으십니다. 깨어나셨으니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하셔도 결코 무리가…….”

그러나 주치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무섭게 노려보는 라히트리안 때문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주치의는 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없다고 판단되오나 오랜 기간 일어나지 못하셨으니 산책도 너무 오래 하시면 안 됩니다. 거, 건강을 위해 조금만 움직여 주세요.”

“그렇군. 유의하도록 하지.”

그렇게 얻어 낸 자유였다. 나는 오솔길을 따라 숲을 산책하다가 내 몸집보다 몇 배는 큰 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라히트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오늘 숲속까지 온 이유는 슬슬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벌어졌던 일을 털어놓고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히트리안.”

“뭐지?”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 잠시 소란스러웠으나 이내 조용해졌다.

“묻고 싶은 게 많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당신한테 물을 게 있어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제가 저지른 일인데 어떻게 지나갔다고 신경을 안 써요. 아니카도 전혀 안 보이고. 설마 벌을 준 건 아니죠?”

“…….”

“그럼 렘무트는 어떻게 됐어요?”

“…….”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는요?”

“…….”

“제 질문에 대답해 줄 생각은요?”

이렇게 나오면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으니 예전이랑 다를 게 없었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라히트리안을 보자 그가 한숨을 쉬며 하나씩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니카는 황녀 생각대로 벌을 받았어. 아르고와 같이.”

“……무슨 벌이요?”

“그건 황녀가 들어서 좋을 게 없어. 별로 말하고 싶지 않군.”

“두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저한테 속은 부분도 있고요.”

“아. 속여서 이런 것도 갖다 바쳤나 보군?”

라히트리안이 소매 안에서 보란 듯 낯익은 단도를 꺼냈다.

나는 아차 하며 손을 뻗었다. 저건 아르고가 나한테 준 거였는데!

“어딜.”

라히트리안이 어림도 없다며 물러섰다. 단도를 잡아채려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릴 때마다 라히트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불만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자 라히트리안이 픽 웃었다.

“돌려줄 생각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마. 이건 압수야.”

“치사하게.”

“아르고한테 다시 부탁할 생각도 말고. 황녀에게 위험한 물건이니까. 금단술에 손 댈 생각 하지 마.”

아무래도 내 옷을 갈아입히면서 단도를 발견한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에 둘 걸 그랬다.

에테르온한테 빼앗긴 신성력을 다시 가져오려면 단도가 필요한데.

그렇다고 아르고에게 다시 부탁하자니, 그땐 정말 벌을 받는 수준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돌려줘요.”

“아르고가 대가로 뭘 요구했지? 그냥 들어주지는 않았을 텐데.”

“……당신이 알아서 뭐 하게요. 이건 엄연히 우리 둘만의 거래거든요!”

‘우리 둘만의’라는 부분에서 라히트리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단도를 소매 안에 도로 넣고는 비딱하게 물었다.

“갑자기 황제라도 되고 싶어진 건가?”

황제라니?

나는 황당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하면 그쪽으로 생각이 튈 수 있지?

“저는 그런 권력에는 관심 없거든요.”

“그럼?”

“……말하면 방해할 거면서.”

튜니아트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 잘도 가만히 두고 보겠다.

내가 고개를 휙 돌리고 걸음을 옮기자 라히트리안이 뒤따라 왔다.

“겁도 없이 마룡을 불러낸 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고.”

“말 안 해요.”

“설마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예리한데. 나는 움찔거렸다. 어쩌다 보니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런 의도이기는 했다.

렘무트를 불러내면 세이어드도 기운을 느낄 테니 당연히 와 볼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카르센에 있으니 렘무트는 당연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고.

다만, 세이어드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진작 알아채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도 세이어드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내 흔적이 대륙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새초롬하게 눈을 떴다.

“부정은 안 할게요.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의 관심을 끌려고 한 거 맞아요. 좀 일이 꼬였지만요.”

“하.”

“언제까지 당신에게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트레시아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라히트리안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희미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는 어느새 완전히 일자로 내려온 지 오래였다.

나는 갑자기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왜 그래요, 라히트리안.”

“누구 마음대로?”

“……네?”

“내 심장을 가진 채로, 아트레시아에 가겠다니. 그걸 누가 허락했지?”

아, 화가 난 거구나. 나는 얼른 그게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나도 양심이 있었다.

사실…… 현재 라히트리안의 심장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그리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했지만.

“오해하지 말아요. 방법만 찾으면 심장은 다시 돌려주려고 그랬어요.”

“빌려 달라 한 건 황녀가 아니었나?”

“하지만 당신도 내가 심장을 갖고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또…… 우리가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수도 없고요.”

그런데 어쩐지 해명을 할수록 라히트리안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내 해명이 흡족하지 못한 건가? 당혹스럽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황녀. 한 번만 말해 둘 테니 잘 들어.”

“……네?”

“나는 심장을 돌려받을 생각이 없어.”

“…….”

그게 무슨 뜻이지?

라히트리안의 말을 당장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막연하게나마 짐작되었기에 숨을 흡 들이켰다.

“내가 황녀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황녀도 내 부탁 하나는 들어줘야 하는 거잖아. 나는-, 황녀에게 준 내 심장을 돌려받지 않을 생각이야.”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아트레시아로 갈 생각은 접어. 황녀가 있어야 할 곳은 이카르센 제도이니까.”

미쳤나 봐. 나는 멍하게 라히트리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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