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침 느즈막하게 일어난 민화는 자신의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양명군의
기숙으로 염과 같이 있을 수가 없게 되자, 홀로 속상해 하다가 울면서 잠들었기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운 것이 비단 눈만이 아니었다. 얼굴 전체가 못난이 마냥
부어있었다. 이런 얼굴로 아침 식사를 하러 안방으로 가면 시어머니 눈에 띌 것이고, 그러면 괜히
그 화살은 염에게로 갈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애꿎은 민상궁의 발걸음만 바빠졌다. 마침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기에 눈덩어리를 뭉쳐 민화의 얼굴에 얼음찜질을 했다. 하지만 부기를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부름에 의해 부운 얼굴 그대로 안방에 가야했다. 민화는 최대한 얼굴을 시어머니께 보이지 않게
돌리고 들어가 등을 돌려 주춤주춤 앉았다. 그렇다고 그 모습을 못 볼 신씨도 아니었다.
“공주자가, 그 면부는 어쩐 일이시옵니까? 혹여 또 풍천위가.”
신씨의 놀란 목소리에 민화는 더듬거리며 핑계를 대었다.
“아, 아니어요. 잠을 너무 많이 자고 났더니 이리 된 것뿐이어요.”
신씨는 긴 한숨을 쉬었다. 신씨라고 공주의 외로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전 홍문관대제학이 살아생전
딱 지금의 염처럼 그랬기에 누구보다 공주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민화의 처지가
더 나으면 나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신씨는 남편뿐만이 아니라 자식 둘마저 그놈의
책이란 것에 빼앗긴 셈이었다. 아들놈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딸자식인 연우마저 그랬었다.
손수 인형을 만들어줘도 오라비 옷자락 붙잡고 쫒아 다니느라 그것은 본채 만 채 했고, 책만 손에
쥐어주면 활짝 어여쁜 웃음을 보였던 여식이었다. 신씨는 연우 생각에 밥이 돌덩이가 되어 넘어가지
않았다. 민화도 밥맛이 없어서 몇 숟가락 뜨다가 말았다. 지금쯤 사랑채에선 염과 양명군이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고, 자신은 여기에서 식사를 하는 염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 그쳐야 하는 것이 속상했다.
대충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민화는 얼른 얼굴 부기를 가라앉히고 염에게 가볼 생각으로
열심히 얼음찜질을 했다. 그런데 민상궁이 얼음 보자기를 빼앗았다.
“이러시다가 면부에 동상 걸리시옵니다. 어이구, 이를 어째. 시뻘겋게 실핏줄이 섰네!”
“그렇지만 난 빨리 서방님께 가고 싶은데 이렇게 못난 얼굴로는 싫단 말이야.”
“부기 가라앉히기 전에 동상으로 더 엉망이 되어버리겠사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어여뻐
지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민화는 다시 속상해졌다. 어젯밤은 다른 날과는 다른 밤이었다. 앞으로 새해다 뭐다해서 염과의
합방일은 보름 뒤에나 가능했다. 그나마도 민화의 달거리와 겹쳐버리면 건너갈 확률이 많았다.
그 조급증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화가 바라는 것은 꼭 합방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얼굴만 보아도 좋았다. 염의 향기만 맡고 있어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모두 민화에게 참아라, 기다려라, 이 말만 했다. 민화는 이 이상 참는 법도, 기다리는
법도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불퉁해진 얼굴로 거울을 확인한 뒤, 뒷문으로 나갔다. 눈은 그쳤지만
눈의 냉기를 머금은 매서운 바람이 민화의 코와 볼을 새빨갛게 만들고 입안에서 하얀 입김을 뽑아냈다.
하지만 막상 사랑채로 나가는 쪽문에 가까워져서는 부운 얼굴이 밉게 보일까 걱정되어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쪽문을 넘어서려다 참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꾸짖고, 이제 방으로
들어가야지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돌리기를 하루 종일 하였다. 안채와 쪽문 사이의
작은 길에 쌓여있던 눈은 처음엔 민화의 작은 발자국을 하나씩 남기다가 그 위에 민화의 발자국으로
다져지고 또 다져졌다. 그렇게 민화의 발아래의 눈은 푹신하던 형체가 없어지고, 민화의 기다림은
고스란히 얼어붙은 빙판이 되어버렸다.
결국 민화는 하루 종일 서성대기만 하다가 염의 머리털 하나 보지 못하고 민상궁에게 붙들려 방안에
갇히고 말았다. 도대체 안채는 무엇이고, 바깥채는 무엇이기에 젊은 내외를 각각 분리해 놓고
지내게 하는지 민화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 바로 앞에 사랑채가 있고 그 안에 서방님이
계시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여인의 예라는 것도 화가 났다. 그래서 툴툴거리며
서안 위에 책을 펼쳤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던 민화는 책 위에 철푸덕 엎어지며
소리쳤다.
“이 책들은 모두 엉터리다!”
행여나 공주가 또 사랑채로 뛰어들지 않을까 염려되어 문 앞을 막고 앉아 있던 민상궁과 여종은
공주의 외침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자가, 또 무엇 때문에 그러시옵니까?”
민화는 서안 위에 박고 있던 얼굴을 들어 턱을 괴며 울먹였다.
“민상궁, 이 책들 말이다. <소녀경>이나 <옥방비결>이나, <포박자>나 아마도 사내놈들이 죄다
쓴 것이 아니겠느냐?”
“아무래도 그러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요?”
“그런데, 휴! 아무리 찾아봐도 없구나. 남자가 여자의 몸에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면 여자가
‘아이고, 살려주슈. 나 죽네.’ 이렇게 할 것이란 설명들은 많은데, 여자가 남자의 몸에 어떻게 하면
남자가 ‘아이고, 나 죽네, 한번만 더 해주.’ 이렇게 되는지는 없단 말이다. 여자의 몸의 변화에
따라 어느 정도의 흥분상태에 도달했는지까지 상세하게도 구분지어 설명되어 있건만 사내의
몸 변화는 설명이 없으니. 어째서일까?”
“망측하옵니다! 여인네들이 그런 것을 알아 무엇 할 것이옵니까? 행여라도 생각지 마옵소서.
체통을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민화는 민상궁의 말에 표정을 쌜쭉하게 하여 고개를 다른 쪽으로 획 돌렸다.
“에잇! 숫처녀인 민상궁을 붙잡고 무얼 의논하겠다고······. 내가 사내 후리는 법을 터득하면 서방님도
그 맛에 홀려 나를 매일 찾지 않으시겠느냐? 그렇다고 내가 이 책들을 서방님께 쑥 내밀어
‘이 책에 있는 것처럼 해주시어요.’ 이렇게 말 할 순 없는 노릇이고.”
민상궁이 민화의 어이가 없는 말에, 하지만 실천에 옮길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펄쩍 뛰면서 말했다.
“절대 아니 되옵니다! 만에 하나 그리하시오면 제 입에서 ‘아이고, 나 죽네.’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민화는 민상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오직 염의 입에서 ‘공주, 밤새도록 합시다.’란 말이
나오는 것을 상상하느라 얼굴이 발그레 하기 바빴다. 그리고 화려하게 웃음 짓는 염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도 숨이 막혀, 상상속의 염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혼자서 몸을 비비 꼬았다.
민상궁은 민화의 모습을 보며 가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했다. 그리고 민화의 첫날밤이
생각나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염의 나이 18살, 그리고 민화의 나이 14살에 가례를 올렸다. 철없던 민화는 그저 염과 한집에서
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가례를 올리는 날도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화의 생각과는
달리 가례는 올리되 15살 이전에는 합방은 할 수 없다는 <주자가례>에 따라, 가례만 올리고 한방에
있어보지도 못한 채 그날부터 민화는 안채에 염은 사랑채에 각각 분리되어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염은 여전히 민화 앞에서 신하가 공주를 대하는 예를 갖추었다. 14살의 어린 신부였던
민화는 며칠에 한번 정도도 안 되게 얼굴을 볼까 말까하는 염에게 잘 보이고자, 아침부터 분단장하고
머리엔 화려한 가체를 하고 온종일 있었다. 민화의 얼굴보다 몇 배는 큰 가체의 무게에 목이
아파 눈물이 날 것 같아도 오직 염에게 예쁘게 보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참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때도 사랑채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성거렸었다. 그러다가 혼자서 사랑채로 가는 뒷길에 숨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공교롭게도 염에게 들키고 말았다. 민화가 울고 있어서 인지
아니면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날의 염은 다른 날과는 달리 민화에게
인사만 올리고 가버리지 않고 민화의 앞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공주, 이곳에 어찌 홀로 계십니까? 궁궐이 그리우신 겁니까?”
민화는 가체 무게에 짓눌려 도리질을 칠 수도 없었다. 그리운 것은 궁궐이 아니라 염이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다정한 염의 목소리에 야속한 눈물은 더욱 흘러내렸다.
민화의 눈물에 당황한 염이 다시 말했다.
“궁궐이 그리우시다면 내일이라도 저와 같이······.”
“아니어요. 그저······, 그저······다리(가체)가 무거워서······.”
미처 염이 보고 싶어서란 말은 못하고 거짓으로 가체 핑계를 대었는데, 염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민화의 머리에 얹어진 가체는 버거워보였다. 염은 울고 있는
민화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민화는 어디로 가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민화가 느낀
것은 오로지 자신의 손을 잡은 염의 따뜻한 손뿐이었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염의 손이었고 염의
온기였다. 그래서 혹시나 놓칠 새라 작은 두 손으로 염의 손을 꽉 쥐었다. 염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민화의 방이었다. 민화를 앉히고 염이 한 일은 서툰 손길로 가체를 장식하고 있던 떨잠 등을
뽑아내고 가체를 걷어 낸 것이었다. 그리고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고 그곳에 뒤꽂이 등으로 가볍게
장식을 해주고는 민화를 향해 더 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말했다.
“공주의 뒤통수는 동그래서 참으로 어여쁘시옵니다. 허니 징그러운 다리로 가리지 마십시오.
저는 다리가 징그러워 싫더이다.”
“하지만······.”
“그럼 집 안에선 이러고 계시다가 출타하실 때 하시지요. 다른 이들에게 어여쁘게 보이고
싶으실 터이니.”
민화는 힘껏 도리질을 쳤다. 무거운 가체가 없어진 도리질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이젠 출타할 때도 안 할 것이어요.”
어차피 염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었기에 염이 징그럽다면 할 필요가 없었다. 염 이외의
다른 누구한테도 예쁘게 보이는 것엔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이대로 염이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염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염은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쥔 민화의 주먹을 보고는 멋쩍은 웃음만 짓다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달리 나눌 말이 없어 염은 방바닥만 보고 있어야 했지만 민화는 너무나 행복해서 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참을 수 없었던 민화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염의 볼에
입을 맞춰버리고 말았다. 민화의 얼굴이 붉어졌는지, 염의 얼굴이 붉어졌는지 서로는 알지 못했다.
때마침 붉은 노을이 어린 신랑신부가 있는 방안으로 몰래 걸어 들어와 둘을 훔쳐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민화는 첫 합방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첫 합방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그것만
거치면 완전한 부부가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자신이 15살만 되면 더 이상 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민화가 15살이 되기 직전에 전 홍문관대제학이 숨을 거두었다.
염은 부친의 삼년상을 무덤 옆에서 치르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고, 삼년간 둘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삼년은 그저 무심하게만 지나가지는 않았다. 민화의 그리움과 눈물을 거름삼아 민화는 꽃 같은 17살,
그리고 염은 21살의 청년으로 변화시켰다. 더 이상 어린 신부도 어린 신랑도 아니었다.
염이 산에서 돌아온다는 날, 민화의 꽃단장은 온전히 민상궁 몫이었다. 가슴 떨림이 손 떨림으로
번져 민화의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왔다는 염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민화의 방으로 와주질 않았다. 민화는 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쪽문 길에 떨어져 내린
붉은 단풍잎을 밟으며 서성거렸다. 혹시라도 염의 머리카락이나마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쪽문
틈새로 얼굴을 빼꼼이 내밀고 열심히 사랑채를 훔쳐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서럽도록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 사랑채에 뭐가 있습니까?”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소년의 목소리가 아니라 근엄한 사내의 목소리로
변해있었지만, 변함없는 그의 난향이 이미 코끝에 다다라 있었기에······.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더욱더 돌아볼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 그 자리에 서서 쪽문만 손끝으로 매만질 뿐이었다.
“······삼일 전에 오셨다 들었사온데, 어이하여 소첩에겐 걸음하지 않으셨사와요?”
“산에서 내려와서 삼일간은 안채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하여 오늘 왔습니다. 그런데 내당에 없으시기에
이리 와 보았습니다.······제게 언제까지 등만 보여주실 것입니까?”
돌아보지 않아도 염의 미소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안돌아 볼 수도 없었다. 반쯤 돌아서서
얼른 곁 눈길로 염의 얼굴을 훔쳤다. 삼년 만에 민화의 눈앞에 선 염은 아름답기만 하던 모습에
남자다움이 더해져서 민화의 심장을 숨도 쉬지 못하게 움켜쥐었다. 예전에는 어색하던 갓과 도포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마, 많이 변하시었어요.”
“공주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못 알아 볼 뻔 하였습니다.”
어색한 부부의 사이로 붉은 단풍잎이 떨어져 내렸다. 그중 한 놈이 민화의 어깨위에 살풋 엉덩이를
걸쳤다. 그놈을 떨어내기 위해 염의 손이 뻗어져 민화의 어깨에 다다랐다. 민화는 염의 스치는
손끝에 잡힌 단풍잎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염은 희롱하듯 단풍잎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고 그에
눈길을 맞추던 민화의 시선도 염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염이 눈웃음을 건네 왔다. 그런데 민화는
미소에 답해주지 못하고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눈물에 민망해진 민화는
울먹이는 소리로 단풍잎을 탓했다.
“붉은 것에 입을 맞추고 싶으시오면, 붉은 것이 단풍잎만은 아니어요.”
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번에는 염의 갓 위에 또 다른 놈이 엉덩이를 걸쳤다. 그놈은 민화의
손끝에 잡혀졌다. 그리고 그대로 민화의 입술에 다다랐다. 하지만 민화의 손은 염의 손에 잡혀져
아래로 끌어내려졌고, 단풍잎이 있던 자리는 염의 입술이 차지했다. 너무 놀라 처음으로 와 닿은
염의 입술을 미처 느낄 사이도 없이 다시 멀어졌고, 염은 빙그레 웃는 웃음과 더불어
속삭이는 듯 말했다.
“어찌 아시었습니까? 붉은 것을 탐하는 마음을 달래려 단풍잎을 먼저 쥔 것을.”
염은 민화에게 한 번 더 환한 웃음을 보이고는 쪽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민화는 급한 마음에
염의 도포 자락을 잡았다.
“저······, 저······.”
“말씀하십시오.”
“저 그동안 17살이 되었사와요. 그러니 이제······.”
염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별 말없이 쪽문을 넘어가버렸다. 민화는 한참동안 염이 사라진 문만
보고 있다가 안채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관상감에서 뽑아준 염과의
합방일 날짜였다. 세 날짜 중 한 날을 민화가 지정하면 되는 거였다. 물론 따져볼 것 없이
제일 처음 날짜로 낙점했다.
그 날짜에 맞춰 집안은 조용히 첫 합방식을 준비했다. 민화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몸의 향기를 위해 매일 꼬박꼬박 모향이삭과 잎을 달인 물에 영릉향(零陵香)을 넣은 것을 마셔야 했다.
비록 마실 때는 역해서 싫었지만 먹고 난 뒤에는 몸에서 향기가 뿜어져 나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민상궁에게서 첫날밤을 치루는 사전 지식을 습득해야 했다. 듣기 민망해 하며 얼굴을
붉히곤 했지만 민화는 곧잘 알아들었다. 아니,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민화가 기다리던 첫날밤이
되었다. 염은 민화의 방으로 들어와 민화에게 큰 절을 한번 올렸다. 그리고 민화도 그에 대한 답으로
큰 절을 했다. 제일 먼저 염은 자신의 갓부터 벗고는 민화의 쪽진 머리에서 뒤꽂이 장식들을 뺀 뒤
비녀를 뺐다. 옷고름을 풀어 옷을 하나씩 벗기는 것도 가슴이 두근거렸고 염이 속옷차림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끌어안는 것도 좋았다. 입술이 포개지면서 자신의 입안으로 염의 혀가
들어오는 것도 처음엔 깜짝 놀라긴 했지만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행복했다. 그리고 염의 손이
젖가슴을 쓰다듬을 때도 세상이 안보일 만큼 묘한 황홀감이 들었다. 그런데 황홀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염의 몸과 민화의 몸이 하나가 된 그 순간 민화는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무한정 좋을 것이라고만 여겼던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민상궁이 ‘아플 것이옵니다.
하지만 절대 표를 내어선 아니 되옵니다, 참으시옵소서.’라고 줄기차게 말해왔던 것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들어온 순간이기도 했다. 민화는 민상궁의 말 때문이 아니라 혹시라도 염이 싫어하지는
않을까 그것만 걱정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염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거둬 갔을 때도 민화는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동침을 베고 누워서도 민화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염이 잠에 들어도
민화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천정만 보았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새벽달이 지기 전에 염은 옷을 챙겨 입고 민화의 방을 빠져나갔다. 아직 민화가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발걸음도 조심하면서 문을 조용히 여닫고 사라졌다. 그렇지만 민화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염이 나간 것을 확인 한 민상궁이 조심해서 건넛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민화의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소리가 나왔다.
“미, 민상궁. 여기······.”
민상궁이 놀라서 사잇문을 열고 민화의 방으로 들어왔다.
“괜찮으시옵니까?”
“민상궁. 나 참았다. 너무나 아픈데도 참았느니. 혹여 서방님이 언짢으실까 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장하시옵니다. 잘 참으시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아프다.”
민상궁이 대견해 하며 미소를 보이자 민화는 누운 그대로 눈물만 흘렸다.
“그런데 다른 여인들도 이리 참겠지? 매번 이럴진대. 나도 참을 것이다. 서방님만 원하신다면
난 매일 이렇게 아프다고 해도 참을 것이다.”
“매번은 아니옵니다. 처음만 지나면 차차 좋아지실 것이옵니다.”
민화의 결심이 가엽게도 그 이후 염의 발길은 매일은 고사하고 한 달에 한 번도 오지 않는 날이 많았고,
민화의 몸 또한 더 이상 아프기는 거녕 염이 주는 쾌감에 젖게 되었다.
민상궁은 첫날밤 치른 뒤 울던 민화가 생각나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젠 그런
모습은 간 곳없고 여러 책을 뒤적이며 염을 이불속으로 끌어들일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성숙한 여인네의 모습이었다. 책을 읽던 민화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추운
바깥에서 서성거리다 지쳐버렸던 것이다. 민상궁이 민화를 이불 속에 눕혔다. 민화도 어차피 약속되어
있던 밤도 아니니 밤새워 기다린다고 해도 오지 않을 염이란 포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얼었던
몸이 따뜻한 이불 아래에서 풀어졌기에 쉽게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얼었던 마음은 아무리
따뜻한 이불이라 해도 녹아지지 않았다.
염은 운동 삼아 검술연습을 한 뒤에 목욕을 했다. 몸을 깨끗이 하고 방안에 앉으니 오늘 하루 종일
공주가 안 보였던 것이 걱정되었다. 한번쯤은 오가다 마주쳤을 것인데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윽고 어제 눈을 맞으며 자신의 뒤를 따라 걷던 것이 기억났다. 염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민화와의 합방날짜를 적어둔 종이를 서안 서랍에서 꺼내 보았다.
“이런, 어제였구나. 양명군이 계셨다곤 해도 내가 약조를 어기다니······.”
염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인지 민화를 떠올리자 오늘따라 몸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몸이 동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민화를 보지 못한 오늘하루가 허전했다. 아직 늦지 않은
밤이니 내당에 걸음 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염은 의관을 정제하고 중문을 지나
안채로 갔다. 그런데 민화의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불 꺼진 방을 보고 있던 염은 발길을 돌리려다가
혹시나 이제 막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작은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어흠! 어흠!”
염의 이 작은 헛기침을 먼저 들은 것은 민상궁이었다. 바깥쪽 방에 새우잠을 자고 있던 민상궁은
얼른 잠에서 깨어나 낮은 자세로 기다시피 해서 사잇문을 열고 민화에게로 갔다. 이제껏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민화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민상궁은 어떻게 해서든 민화를 깨우고자 했다. 하지만 한번
잠에 빠져든 민화는 민상궁이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발길을 돌려 염이 가려는
것이 느껴졌다. 민상궁은 급한 마음에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미 염은 뒷모습을 보이며
안채의 섬돌 아래로 내려서고 있었다.
“의빈자가!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소서.”
염이 걸음을 멈추고 상체만 조금 돌려 민상궁을 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공주자가께서 일어나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아니다. 내 잠시 지나던 길이었느니라. 공주께서 깨어나실지 모르니 조용히 하라.”
염은 몸을 돌려 안채에서 사라졌다. 민상궁은 민화 대신 염의 하얀 도포자락에 매달려 기다려 달라
외치고 싶었다. 내일 이렇게 염이 왔다 간 사실을 말해야 하는 자신의 마음도 슬프기 그지 없었다.
염은 안채의 뒷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쪽문에 다다르지 못하고 그만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일어선 염의 눈엔 민화의 기다림이 빙판이 되어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고 작은 발로 촘촘하게 닦은 길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서성거렸을 민화의 모습이 에누리 없이
그려졌다. 민화의 생각에 웃음 짓던 염은 이내 내일 이곳에 다시 올지도 모르는 민화가 걱정되었다.
덤벙거리면서 온 민화가 자신처럼 엉덩방아를 찧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염은 삽을 가져다 길에
다져진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삽질도 서툴고 다져진 눈이 꽁꽁 얼어 진도가 나가진 않았지만,
차츰 길이 보였다. 대강 삽으로 길을 내고 난 뒤 다시 빗자루로 쓸어 완전히 빙판을 제거했다.
그리고 혹시나 민화가 쪽문을 넘을지도 몰라서 쪽문과 사랑채로 가는 길의 눈도 깨끗하게 쓸었다.
염은 홀로 쓸쓸히 뒤뜰에 섰다. 조용한 집이었다. 그리고 쓸쓸하리만큼 사람이 찾지 않는 집이기도 했다.
학문을 논하는 이들은 염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었고, 학문을 하지 않는 자들은 주로 향락과
사치를 일삼기에 염이 어울리길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쓸쓸한 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염은 오늘따라 유난히 집안이 쓸쓸함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뒤뜰에 크게 자리한 매화나무가 염의
눈길을 잡았다. 가지마다 눈이 쌓여 있었지만, 그 눈 밑에 싹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섣달의 눈이 외로운 마을에 쌓여 아직 녹지 않았는데, 누가 사립문을 기꺼이 두드리겠는가?
밤이 오자 홀연히 맑은 향기가 일어, 차례로 몇 가지에 매화가 핀 것을 알았구나.”<눈 온 뒤(雪後)
-유방선(호:태재, 뛰어난 학자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유배생활을 했지만 문하에 서거정등의 많은
학자를 배출했음)>
나지막하게 시를 한 수 읊은 염은 매화나무를 향해 쓸쓸한 미소를 보내며 혼잣말을 했다.
“태재가 나를 앞서 내 마음을 읊었는가? 허나 태재는 나보다는 나을 것이야. 그에게는 문하의 많은
제자는 있지 아니 하였는가. 나는 그저 가슴 속의 불꽃만 스스로 삭이는 것 외엔 할 수가 없으니······.”
언뜻 쓸쓸한 눈빛을 가르며 매화나무 뒤의 그늘에 누군가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염이 뚫어지게 그곳을 응시하자 그늘 뒤의 사람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눈길로 훔치는 것도 훔치는 것이라 할 수 있느니. 누군가? 이 나를 훔쳐보는 이가. 청녀(靑女, 눈과
서리의 여신)가 걸음한 것이 아니라면 나오너라!”
어두움이 발을 옮겨 디뎠는지 발아래 밟힌 눈이 뽀드득 하는 농염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며 어두움이 말을 했다.
“쇤네를 어찌 청녀의 걸음에 비할 수 있습니까?”
여인이었다. 하지만 염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염의 시선을 눈이 반사하는 빛이 도와주었다.
희미한 달빛과 눈이 반사하는 빛에 의지해 여인의 형체를 살폈고 이내 염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설? 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