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21화 (21/47)

#21

‘금기를 어기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설의 머릿속에서 장씨도무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염이 자신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준 것이

더 기뻐 머릿속 장씨의 말은 조용히 눈 녹듯 사라졌다.

“도련님, 쇤네를 기억하십니까?”

염은 머쓱하여 미소만 지었다. 아마도 어제 운이 물어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기억해 내지

못했을 것이기에, 기억하고 있다란 답을 들려주기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말을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도련님이란 말은 이젠 듣지 못하는 말인데······.”

“그렇군요. 이젠 자가라 하여야 되는 것을······.”

설의 서글픈 중얼거림을 염은 느끼지 못했다. 오직 이곳에 설이 홀연히 나타난 것만이 궁금했다.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이냐? 혹여 담을 넘은 것이냐?”

설은 답하지 않았다. 절대 의빈의 저택에는 가지 말라 하는 말을 어기고 그리운 마음에만 이끌려

온 것이었기에, 게다가 훔쳐보기만 하리라 했지만 넋을 잃고 보다가 염에게 들킨 것이기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리 있으니 기억이 나는 듯도 싶구나. 예전에도 너는 내가 무어라 묻기만 하면 그렇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서 있었지. 그래, 기억이 나는구나.”

불만 가득한 표정. 기억이 나는 듯······. 설은 쓸쓸히 웃었다. 염이 평범하게 내뱉는 말들이 설에게는

설렘이 되고 비수가 되었다.

‘쇤네의 표정을 불만 가득한 것으로 기억하셨습니까? 천한 종년의 몸으로 차마 도련님 앞에 미소할 수

없었음을 모르시겠지요.’

‘이년’이 이름 되어버린 여종 아이가 있었다. 아비가 노비였고, 어미가 노비였다. 그래서 날 때부터

천하디천한 노비였다. 아비는 ‘이년’이 뱃속에 있을 때 어디론가 팔려갔단 말을 들었다. 어미 또한

‘이년’이 세 살 무렵엔가 어디론가 팔려갔단 말을 들었다. 그전에 어미가 자신의 딸을 무어라고

불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노비들이 남겨진 아이에게 ‘이년, 저년’ 천하게 부르다가 ‘이년’이

이름이 되어버렸다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었다.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 하라고 시키면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면 되었다. 구박하면 구박 들으면 되었고,

때리면 맞으면 되었다. 같은 노비들조차 ‘바보 등신 같은 년’이라 욕을 해도 그것이 기분 나빠해야

하는 것인지 조차 몰랐다. 이윽고 ‘이년’도 팔려 이집으로 오게 되었다. 자신을 사고 판 가격이

얼마인지 조차 알지 못했던, 7살 때의 일이었다.

새로 오게 된 집은 전에 있던 집보다 조금 더 큰 것 외에는 별반 다를 것도 없었기에 낯선 것 하나

모르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 집의 누각에 글을 읽고 있는 염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때는 멍하니

넋을 잃고 쳐다만 보고 있었던 이유도 몰랐다.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쓴 대갓집 도령들은 그동안

수도 없이 보아왔었다. 자신에게 나뭇가지로 찌르고 발길로 걷어차도 응당 그것이 당연하려니

생각해왔던 그런 도령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재빨리 도망을 쳐야

했지만 발길과 눈길은 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실제로 벌어진 입에선 침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입에서 침이 떨어져 내리는 줄도 몰랐다. 염이 책을 보던 눈길을 들어 침 흘리는 지저분한

여종을 보았다. 하지만 여종에겐 그 움직임조차 현실 같지가 않았다. 꼼짝하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는 여종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염은 자신의 서안 위에 있는 곶감 접시를 보았다. 염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곶감 하나를 쥐고 일어나 여종에게로 다가왔다. ‘이년’은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도망가야 했지만 자신에게로 가까워지는 아름다운 도령의 미소에 취해 더욱더 멍해졌다.

도령은 다가와 서서 발길질이 아니라 손을 내밀었다. 의아해 하며 본 그 손에는 곶감이 쥐어져 있었다.

“이것이 먹고 싶어 그리도 본 것이 아니냐?”

목소리조차 상냥했다. 그리고 발길질이 당연하다 여겼기에 내밀어진 곶감은 신기한 것이었다.

맑은 목소리가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인지 멍하니 보고 있었던 이유가 어쩌면 정말 곶감이 먹고 싶어서

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곶감을 보긴 했지만 눈에 들어 온 것은 곶감이 아닌, 새하얗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여종은 곶감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려다 말고 재빨리 뒤춤으로 손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손등을 등 뒤에 계속해서 문지르기만 할 뿐 앞으로 손을 내밀지 못했다. 시커멓고

거친 손이었다. 손톱 밑에는 시꺼먼 때가 끼어 있고, 손등은 쩍쩍 갈라져 피딱지까지 앉아 있는

못생긴 손이었다. 하얗고 아름다운 손에 비해 자신의 못생긴 손의 차이를 안 그 순간 ‘이년’은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세상에는 아름답고 추한 것이 나뉘어 있고, 귀하고 천한 것이 나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추하고 천한 쪽에 분류되어 있는 존재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무 말 없이 퉁명스런 얼굴로 있는 여종에게 염이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 새로 온 아이냐? 이름이 무엇이냐?”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차마 ‘이년’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껏 누가 물어보면

잘도 답하던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 싫은 자신의 이름을

안 그 순간, 수치심이 무엇인지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곶감을 내미는 손길을 따라

눈길을 들어 주인댁 도령을 보았다. 박꽃마냥 새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답하여

마주 미소 짓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염의 손에 있는 곶감을 낚아채듯 빼앗아 쥐고

그 자리를 도망쳤다. 도망쳐 달리는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맞으면 아프기 때문에

울어는 보았지만, 누가 때린 것도 아닌데 가슴 한 켠이 아프면서 눈물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추운 응달에 몸과 마음을 숨기고 앉아 곶감을 먹으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소매로 눈물,

콧물 닦으면서 하염없이 먹었던 곶감이 맛을 못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가슴이 아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왜 그런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서글픔을 깨닫기엔 7살 나이는 아직 어리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몰래 눈물 훔치다가 느즈막하게 행랑에 가니, 행랑어멈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년아! 어딜 있다가 온 거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행랑어멈이 바쁜 손길로 ‘이년’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리고 마루에

앉히고는 댕기머리를 풀어 그곳에 이를 잡는 약을 뿌렸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설’이다.”

“네? 왜요?”

“넌 원래 우리 아기씨 몸종으로 데리고 온 거야. 그런데 네 이름은 아기씨께 안 좋으니 도련님께서

‘설’로 바꾸라고 하셨어. 어울리지도 않게 설이라니. 네 년한테는 과분한 이름이지, 암.”

“도련님? 이 댁에 도련님은 몇 분인데요?”

“딱 한 분뿐이지. 어찌나 출중하신지 아직 11살 밖에 안 되셨는데도 벌써부터 온갖 대갓집에서

넣어대는 매파를 거절하느라 골치가 아파. 네 년은 얼굴도 보아선 안 되는 분이야!”

‘이미 보았는데······.’

설······. 입속으로 발음해보았다. 혀가 굽이져 휘어지는 것이 정말 어여쁘게 느껴졌다. 새하얀 눈은

자신에게 과분한 것을 떠나 어울리지 조차 않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입 꼬리는 저절로 올라가 있었다.

며칠 동안이나 때 빼고 광 낸 뒤,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끗한 옷을 입고 아기씨가 있다는 별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안채 중에서도 첩첩이 안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그곳에서 처음 연우를 보게 되었다.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설을 향해 예쁜 미소를 보이던 아기씨는 그 미소뿐만이 아니라 생긴 모습까지

도련님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도 닮아 있었다.

“추운데 왜 그러고 있느냐? 이리 오지 않고.”

주춤거리며 가까이 다가가 앉자 연우는 설의 손을 잡아끌어 화로 위에 손을 따뜻하게 올렸다.

도련님의 손과 닮은 아름다운 손이 자신의 못생긴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얼른 빼내려고 하자

연우는 오히려 더 꽉 잡았다.

“네 손이 너무 차구나. 이러고 있으면 따뜻해질 것이야. 설이라고 들었다. 나이는 어찌 되느냐?”

“이, 일곱······.”

“일곱? 나보다 한 살 어리구나.”

설은 다시 한 번 연우를 보았다. 한 살 많다고 해도 키나 덩치는 자기보다 자그마해 보였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쁜 모습에 설은 다시금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처음 만난

연우는 설에게 ‘자신이 모시는 아기씨’가 아니라 자신에게 새롭게 이름다운 이름을 준

‘도련님의 누이’였다.

연우의 몸종이란 자리는 무척이나 좋은 것이었다. 연우가 설에게 어리다는 이유로 가벼운 심부름만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자주 가까이서 도련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염은 누이를

아끼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에 별당에 자주 와 연우를 돌보면서 책을 읽어주었다. 비록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미소가 아니어서 훔쳐보아야만 했지만, 그것이 서럽지는 않았다. 어쩌다 설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내주긴 해도 설은 그 미소에 퉁명스런 표정으로 대꾸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서러워할 수도 없었다.

한번은 지나가다 염이 혼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서툰 검을 휘둘려 짚으로 된

과녁을 베었는데 그만 검이 들어가다 말고 멈춰버리고 말았다. 염은 끙끙 거리며 검을 다시 빼내려고

애를 썼고 그 모습에 설은 숨어서 킥킥 거리며 웃었다. 그때는 염의 검술이 무엇이 서툴고 어떤

점이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그저 실수하는 그 모습조차 멋있어서 가끔 훔쳐보러 가곤 했다.

그러다가 염과 그 친구들이 함께 검술을 연습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친구 중에서 유난히

말없는 도령의 자세와 비교해서 본 설의 눈엔 염의 잘못된 자세가 확연이 들어왔다.

그래서 염 혼자 연습하는 때는 기다려 다가가 처음으로 자신 있게 말을 붙였다.

“도련님, 도련님의 자세는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잠깐만 검을 빌려주십시오.”

염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검을 설에게 건네주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거라.”

설은 염의 친구들의 자세를 흉내 내어 다리를 벌리고 팔꿈치에 각도를 내어 검을 눈의 시선에 맞춰 들었다.

“도련님은 언제나 팔꿈치가 아래로 쳐집니다. 그러니 검이 가깝게는 시선에 맞춰지는 것 같아도,

멀리로 뻗으면 힘이 들어가지 못하고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후 검을 뻗으며 휘둘러 과녁을 베었다. 비록 검이 다 베지 못하고 과녁 중간에 걸쳐지긴 했지만

어린 여아치고는 상당한 솜씨였다. 염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언제 검을 배운 적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 연습하시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

“나보다 재능이 뛰어난 것 같지만······.”

염은 설에게서 검을 받아들고는 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설이라고 하였느냐? 여인은 검을 쥐면 그 운명이 슬퍼진다 하였다. 그러니 장난으로라도

검을 쥐지는 말아라.”

설은 염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또다시 도망을 쳐 그늘진 곳으로 몸을 숨겼다.

염의 손이 닿은 정수리가 너무나 뜨거워 마치 데인 것 같이 화끈거렸다.

‘여인······.’

설은 여태껏 몰랐던 것을 염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 같이 설렜다. 자신이 여인의 몸이란 것을

새롭게 알게 된 그때,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염은 자신과는 반대로 사내라는 것이었다. 나이 8살에

알게 된 두근거림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두근거림은 이내 차가운 슬픔이 되어 설의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얼굴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그저 얼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설은 그렇게 9살이 되어도 염을 훔쳐만 보았고, 11살이 되어도 훔쳐만 보았고,

13살이 되어도 여전히 훔쳐만 보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염 앞에서는 미소를 보이지 못했다.

미소를 보여선 안 되는, 마음을 보여선 안 되는 천것이란 것을 어린 나이에도 잘 알고 있었기에

염 앞에서는 깊어지는 마음이 더해질수록 그만큼 더 퉁명스러워졌다. 마치 눈이 불꽃 가까이 가진

못하고 그 멀리에만 쌓이고 또 쌓이듯······.

설은 또 다시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팔려가게 되었다. 연우가 세자빈으로 간택된지 20여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연우는 아파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고 염은 숙부 댁에 갇혀 보이지도 않는데,

전 홍문관대제학은 홀연히 설을 무노비로 팔았다며 한 여인에게 넘겼다. 그 여인이 장씨도무녀였다.

설은 처음엔 어안이 벙벙해서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장씨가 설의 팔을 잡아끌고 대문을 나설 때야

자신에게 닥친 것이 어떤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염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더 이상 훔쳐만 보는 일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설은 미친 듯이 집으로 다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전 홍문관대제학의 다리에 매달려 눈물로 빌고 또 빌었다. 몇 배는 더 일할 테니 다른 곳에

보내지만 말아달라며 소리 내어 울었다. 목이 쉴 정도로 울었지만 그는 설을 다시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설은 장씨의 손에 끌려 이 집의 대문을 넘어갔다. 끌려가면서도 설은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가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뱃속에 있을 때 자식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어디론가

팔려갈 수밖에 없었을 노비였던 아비를 떠올렸고, 자신이 세 살 때 어린 자식을 두고 어디론가

팔려갈 수밖에 없었을 노비였던 어미를 떠올렸다. 그들의 슬픔이 더해져서인지 아니면 염을 보지

못하고 가는 슬픔이 커서인지 설은 더욱더 큰소리로 울 수밖에 없었다.

“울어라. 주인이 팔면 팔리고 건네면 건네는 대로, 그리 옮겨 다니는 것이 노비의 팔자.

소 돼지 접붙이듯 아무 놈이나 씨를 붙여도 아무 말 못하는 것이 종년팔자, 그 씨의 아비 되어도

자기 자식이라 말 못하는 종놈팔자, 종년이 낳은 씨는 종년의 자식이 아니라 주인집의 소유에 불과한

노비팔자. 그래, 울어라. 세상이 네년 눈물로 홍수가 난다한들, 네년의 종년 팔자는 바뀌지 못하니.”

설에게 나지막하게 뇌까리며 걷는 장씨의 잔인한 말이 오히려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 후, 설의 주인이 홍문관대제학에서 장씨도무녀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우의 몸종이었다.

단지 연우가 홍문관대제학의 여식이 아니라 이름 없는 무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설에게

연우는 여전히 ‘도련님의 누이’였다. 그 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래서 도련님의 손과 닮은 연우의 손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 그만큼 자신의 손이 망가졌다. 연우에게서 나는 도련님의 향기가 지워지지

않게 수시로 산을 돌아다니며 난초를 구해서 말리고 갈아 목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그리움이

더욱더 사무치는 날이면 홀로 도련님이 하던 몸동작을 따라했다. 도련님이 가지고 있던 검과 비슷한

길이의 나뭇가지로 말없이 서있는 나무를 때리고, 죄 없는 하늘을 찔렸다.

그러다가 결국은 염에 대한 그리움을 못 참고 장씨에게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온양에서 한양까지

물어물어 고생하여 도련님의 집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고서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 너머

서성거리다가 염을 보게 되었다. 담을 넘어 염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거지꼴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또다시 훔쳐만 보고 있었다. 그동안 더욱더 멋있게 변해있었다.

그런 도련님에게 사랑스러운 여인이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서방님,······.”

그 뒤에 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방님’이란 말만 귓속에 맴돌고

또 맴돌아 넋을 잃게 만들었다. 이윽고 염의 소리도 들렸다.

“공주,······.”

그리도 그 뒤의 말도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설은 급하게 응달로 자신의 초라한 몰골과 신분을

숨기며 앉았다. 옛날처럼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웃음만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노비와 가장 존귀한 공주. 그렇게 응달에 앉아 염을 그리워한 자기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사랑마저

마음껏 비웃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였느냐? 이리 온 것을 보니 한양에 살고 있나 보구나. 주인은 좋은 사람이냐?”

매화나무 아래에서 염은 여전히 미소로 설에게 물었다. 설은 그동안 계속에서 염에게 다니러 와서

훔쳐만 보고 갔던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그의 앞에 다가가 서지 못하고 눈 쌓인 발아래만 보았다.

“네, 좋은 주인 밑에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어느 댁에 있느냐?”

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답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퉁명스런 얼굴로 가만히 있자 염이 다시 말했다.

“네가 언제 이곳을 떠났던가? 우리 연우가 죽기 전인가, 후인가?”

“전입니다.”

“······그래, 죽은 것은 알고 있구나.”

설은 염의 슬픈 표정을 외면했다. 그리고 자신의 향해 보인 표정 모두가 연우가 생각이 나서임을

설은 모르지 않았다. 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처녀가 다 되었구나. 머리에 댕기가 있는 것을 보니 아직 혼인은 아니 한 것이냐?”

“네.”

“이런, 어찌하다?”

염이 설을 물끄러미 보았다. 하지만 설은 염이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의 눈동자는

설이 아니라 연우를 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연우가 살아있다면 자기처럼 처녀가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염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설은 퉁명스런

얼굴로 고개만 숙였다.

이때 멀리서 하인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이 먼저 그쪽을 보고 염도 따라서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빈자가, 추운데 여기서 무얼 하시는 겁니까?”

“아, 예전에.”

염이 소개시켜 주려고 설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미 설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네?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염은 이상한 예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흔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몇 달 전, 여행을 떠났을 때

자신을 따르던 정체 모를 무언가가 생각났다.

‘설마, 저 아이가? 노비의 몸으로 나를 어찌 따라다닐 수 있단 말인가? 이상 하구나······.’

설이 염의 눈길이 돌려진 틈 사이로 담을 넘어 도망친 곳은 누구의 집인지도 모르는 담장 어두움이었다.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염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몇 마디 주고받은 기쁨보다는 여전히 변함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었다.

“이년의 몸뚱아리를 이 땅에 점지하신 천주제신이시여! 이년이 그리도 천합니까? 살도 천하고

피도 천하고 뼛속 깊이 천하니, 이 마음마저 천한 것입니까? 어찌 이리도 천하게 점지 하셨습니까!”

다음날 새벽 무렵, 잠자던 염은 가늘게 눈을 뜨다가 희미한 사람 형체에 깜짝 놀라 몸을 반쯤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형체의 주인이 민화임을 곧 알게 되었다. 민화는 자다 깬 모습 그대로였다.

“고, 공주. 예서 뭐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이러고 계신 겁니까?”

“조금 전에. 어젯밤에 내당에 오시었다 들었사와요. 그래서······.”

“잠시 지나가다 들린 것입니다.”

“미워요!”

“네? 무엇이요?”

어리둥절해 하는 염의 가슴팍을 민화는 성난 얼굴로 때렸다. 비록 때리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진

않았지만 염이 밉다는 민화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젠 단 하루도 마음 놓고 기다리지 않을 날이

없게 되었다. 이제껏 안 기다린 날은 단 하루도 없긴 했지만, 이제껏 보다 더욱 지극하게 기다리게

되어버렸다. 어제처럼 아무리 졸려도 이젠 잘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만큼 더 가슴

아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약속일도 아닌 어제, 내당을 찾아준 염이 고맙기 보다는

하염없이 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민화는 염의 가슴팍을 때리다 말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민상궁이

흥분한 말투로 어제 염이 다녀간 말을 해주었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즉시 사랑채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막상 사랑방에 들어와서도 염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느라 깨우지 못하고 있었다.

염이 황당한 듯 미소 지으며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쳤다.

“공주, 추운데 이리 들어오시지요.”

민화는 냉큼 이불 속으로 들어가 염의 품안에 얼굴을 묻었다. 염은 이불을 푹 덮어주고는

그 이불 속에서 싸늘한 민화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아직 제가 미우십니까?”

민화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손은 어느새 염의 적삼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아닌 밤에 홍두깨마냥 적삼차림으로 사랑채로 뛰어간 공주 탓에, 민상궁은

혼비백산하여 공주의 의복을 챙겨들고 사랑채에 도둑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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