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운이 왕 앞에 나타난 것은 훤이 지방관의 윤대를 마치고, 숙직할 관료의 명단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소리도 없이 자신의 자리에 선 운에게 훤은 눈길만 한번 던졌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문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관료들의 명단 아래에 계자인(왕의 공문서 결재도장, 옥새와는
별개)을 찍은 후 오늘밤의 군사암호로 ‘雲淚痕(운누흔, 구름의 눈물자국)’을 적었다. 운은 군사암호를
확인하고 난 뒤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무나 눈치 빠른 왕이었기에 지금 자신이 월과
연우를 생각하는 어지러운 마음까지 읽어내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훤은 공문서를 확인하면서
내관에게 입으로만 말했다.
“지금당장 목욕 준비를 하거라. 추위를 몰아내고 싶다.”
갑자기 목욕준비를 하라는 왕의 말에 모두가 의아 했다. 아직 밀린 공문서와 상소문이 서안에
가득했고, 여섯 승지들의 서안위에도 가득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 시간에 목욕이라니,
그것도 최대한 많은 공문서를 직접 읽기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왕이었기에 더 의아했다.
하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더 놀랐다. 혹시나 감기가 오려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상세내관이 급한 걸음으로 침전으로 달려갔다.
목욕준비가 다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훤은 침전의 북수간으로 들었다. 거대한 함지박 안에서
인삼향이 물씬 풍겨나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운이 문 앞에 버티고 서고 궁녀들이 왕의
옷을 벗기기 위해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궁녀들을 손으로 저지하고
운을 보고 섰다.
“운아, 운검을 풀어 내게 다오.”
운이 운검을 풀어 훤에게 바쳤다. 훤은 운검을 들고 다시 말했다.
“너의 별운검도 다오.”
다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운은 의문제기 하나 없이 순순히 별운검을 왕에게 바쳤다.
별운검까지 받아든 훤은 옆으로 상경내관을 불러 별운검을 들게 했다.
“궁녀들은 모두 이곳을 나가라.”
궁녀들이 젠걸음으로 다 물러나가자 훤은 운검을 칼집에서 길게 빼어 들었다. 칼집 안에 숨겨져
있던 칼날에 음각된, 구름을 휘감은 용의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날을 들여다보던 훤은 갑자기
운검을 휘둘러 운의 목에 겨누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내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목에 칼날이 들어온 그 순간에도 운의 눈썹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훤은 운의 목에 칼날을 바짝 붙여 세우며 말했다.
“의복을 벗어라.”
운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내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상감마마’만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운이 전립과 협수를 벗었다. 그리고 그 밑에 입은 저고리도 벗었다. 검은색 저고리 아래에 하얀
적삼이 드러났다. 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운아,······재미가 없구나. 검을 겨누면 놀라는 시늉이라도 해야 장난으로 검을 겨누는 내가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
그제야 내관들은 안심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훤은 운의 목에
겨누었던 검을 거두어 다시 칼집에 꽂으며 말했다.
“그리 얇게 입고서는 눈 맞으며 어딜 그리 다녀온 것이냐?”
운은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염의 집에 다녀온 것 만이라면 말할 수는 있었다. 이전에도
간혹 다녀왔기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 자체는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에 사전 보고도 없이 굳이 다니러 갔다 온 이유를 궁금해 할 훤이었고, 그러면
이 일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을 성격이었다. 왕의 영민함을 알기에 운은 말할 수 없었다.
월과 연우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순전히 운의 추측일 뿐이었다. 이 추측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증거
따위는 없었다. 그것을 핑계로 두었다. 말하면, 입에 연우와 월을 동시에 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월이란 존재는 운의 눈 끝에서 더 멀리 돌아 앉아버릴 것이었다. 잠시 동안 만이라도, 옆모습만이나마
보고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 어떤 말도 아직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훤은 입을 다문 운이 지쳐보였다.
몸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이 빈틈없던 사내를 힘겹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운검이라 하면 여러 명을 두어 서로 교대로 호위를 하여야 하는데, 내가 너 이외는 아무도
믿질 못하니······. 이는 너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나도 처음엔 여럿을 두려 하였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같이 너와 비교가 되기에 이리 된 것이야. 이제 와서 다시 운검을 선발하기엔 지금
상황이 그닥 좋지가 않구나. 세조대왕 때도 운검에 의한 암살사건이 있지 않았느냐? 운검의 자리는
왕을 사살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기에 아무나 둘 수가 없다.”
세조 때의 사건이란,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과 유응부가 임시 운검직인
운검장군을 맡게 되자, 그것을 기회로 잡아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운검으로 죽일
계획을 세웠던 것을 말했다. 공개적인 연회나 의례행사 때는 운검이란 자리는 반드시 종2품 이상의
무관이 맡아야 하기에 평소 왕을 호위하던 실제 운검은 봉운검수문장(捧雲劍守門將, 당하관의
하급직)직을 맡아 왕의 뒤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도 왕의 진짜 보검인 운검은
봉운검수문장이 지니고, 임시 운검직을 맡은 운검장군은 따로 제작된 의례용 운검을 가지게 되었다.
운검장군을 맡은 계기로 계획된 이 일을 미리 눈치 챈 한명회는 성승과 유응부가 운검을 지니고
연회장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결국 이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바로 세조의
귀로 들어가게 되었고, 즉각 이 계획에 가담되었던 자들을 숙청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곧 사육신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는 운검자리는 특히 조심해서 사람을 두게 되었다. 훤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운에게 말했다.
“운아, 이왕이면 바지도 마저 벗고 저 물 속으로 들어가거라.”
운은 눈을 들어 물을 보았다. 물속이라면 옥탕(玉湯, 왕의 목욕탕)으로 들어가란 말이었다.
옥탕은 왕 이외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중전이라 해도 안 되는 것이었다.
운의 입술은 말이 지나갈 틈만 비켜주었다.
“아니 되옵니다.”
“들어가라. 어명이다! 널 위해 준비하라 명한 물이다!”
“받잡을 수 없사옵니다.”
“네놈이 감히 불충을 저지르려 하는 것이냐? 그리 싸늘한 몸을 가지고 내 옆에 와서는 그 차가움을
내게 옮기려 하다니, 게다가 나를 호위하는 놈은 달랑 너 하난데 만에 하나 네가 앓아누우면 난
어찌 되겠느냐? 그 또한 불충인 것을 모르느냐? 네 발로 아니 들어가겠다 버틴다면 내 손으로
널 끌어다 물속에 넣어버릴 것이다.”
내관들도 고개를 숙여 일제히 운을 종용했다. 운은 마지못해 잠깐만 물속에 들기로 하고 검은색
바지를 벗었다. 바지 아래에 흰 속고의가 드러났다. 위아래 속옷 차림으로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가자, 훤은 운검을 운의 옷 위에 놓았다. 그리고 운의 별운검을 든 내관에게 말했다.
“운검이 이각(二刻, 30분)이 지나기 전에 저 물속에서 나오거든 네가 든 검으로 목을 베어버려라.”
“네에? 무, 무, 무슨 그런 어명을······. 아무리 운검이 맨손이라 하나 천신이 어찌 그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겠사옵니까?”
“하긴 그도 그렇겠구나.······그렇다면 네 스스로 네 목을 베면 되겠구나. 하하하.”
눈이 둥그레진 내관을 두고 훤은 운에게 다가가 한쪽 어깨를 짚었다.
“운아, 내 비록 너에게 높은 품계를 내리진 못하나, 가장 아끼고 있다. 그러니 아프지 마라.
설혹 그것이 마음이라 하더라도.”
훤은 내관 세 명을 남겨놓고 북수간을 나서며 남겨진 내관들에게 명했다.
“오늘, 책임지고 운검을 침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방에서 쉬게 하라.”
“네.”
운은 방문을 닫고 사라진 왕의 느낌이 느껴지자 별운검을 들고 있는 내관을 보았다. 내관은
운검이 물속에서 나올 것만 같아 겁을 잔뜩 먹고 검을 빼어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절대 나오면 안 됩니다!”
“이각은 너무 긴 시간입니다.”
“그래도 어명이십니다! 이각이 아니라 하루 동안이라 하여도 따르셔야 합니다.”
운은 긴 한숨을 쉬며 물속에 머리끝까지 숨겼다. 그렇게 물속에 들어간 운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훤은 편전으로 다시 가려던 발걸음을 왕대비전으로 돌렸다. 왕대비전에는 훤의 조모인 왕대비와
모친인 대비가 함께 있었다. 훤이 자리에 앉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마마마께옵서도 여기 계신지 몰랐습니다.”
“저도 문안차 온 것입니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주상께선 어인 일이십니까?”
“저도 할마마마를 뵈옵고자 이리 왔습니다.”
정답게 인사를 나누는 모자 사이에서 왕대비는 불편한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흠! 주상이 이 할미에겐 무슨 볼일이 있답디까? 또 제 친지 중에 누구 하나 귀양 보내고 싶으신 겝니까?”
대비는 왕과 왕대비의 눈치를 보며 서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더욱 방긋 웃으며 말했다.
“청이 있어 이리 발걸음 하였습니다. 아울러 어마마마께도 같이 청을 드리려고 하였는데
이리 더불어 계시니 더욱 좋습니다.”
대비는 왕대비의 눈치를 한번 힐끔 본 후, 최대한 평화롭게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청하시려는 것입니까? 무엇이든 제가 힘닿는데 까지 도와드릴 것입니다.”
“하하하. 어마마마께옵선 할마마마를 도와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왕대비도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조금 전의 불편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져 말했다.
“말씀하여 보십시오, 뒷방늙은이인 이 할미에게 청하고픈 일이 무엇인지.”
“성숙청에 일러 사독제(四瀆祭, 사독에 제례를 올리는 일. 사독:왕조의 운명을 기원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네 강. 동독(낙동강), 서독(대동강), 남독(한강), 북독(용흥강))를 하여 주십시오.”
사독제를 한다는 것은 왕실의 기원을 떠나 백성들에게 왕실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과시하는 계기로
사용하기도 했고, 유학이 아닌 무속신앙을 믿는 백성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훤은 백성들을 위해, 또한 앞으로 외척을 제거하기 전에 미리 왕대비를 위로하기 위해, 매년
새해가 되면 행하는 사독제를 거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훤의 의도대로 왕대비의 표정에 기쁨이 보였다.
하지만 왕대비는 금새 환하게 웃기도 멋쩍은지 시치미를 뗐다. 성숙청에서 하고 싶은 굿이 많아도
왕과 유학자들의 반대에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왕의 말이 더 없이 반가웠던 것이다. 훤은 왕대비의
표정을 보며 더욱 친근감 깃든 표정으로 말했다.
“사독제를 행하면서 아울러 할마마마의 만수무강도 빌 것입니다. 성숙청은 대대로 대비전과
왕대비전의 비호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가장 큰 어른이신 할마마마께옵서
주관하셔야 합니다. 장씨도무녀에게 일러 준비하라 하십시오.”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장씨도무녀라 하셨습니까?”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 왕대비 때문에 훤도 덩달아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훤의 눈빛에 스치는
이상한 예감을 숨기느라 훤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네, 장씨도무녀. 유명하다, 유명하다 말은 들었는데 그리도 유명하옵니까?
어찌 할마마마도 알고 계십니까?”
“예, 예전에 성숙청에 있을 때 본적이 있으니까······, 그런데 장씨를 주상은 어찌 아시는 겝니까?
혹여 그자가 성숙청에 돌아와 있는 겝니까?”
“네, 얼마 전에.”
왕대비의 표정에 미소가 사라졌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심각하게 굳어져 한참동안 있더니 훤에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주상의 말씀은 알겠으니 이 할미가 힘껏 주관하여 보겠습니다. 그러니 유생들의 반발이나
막아주십시오. 이만 가 보십시오, 바쁜 걸음을 떼신 것일 텐데······.”
급히 밀어내는 듯한 분위기에 밀려 훤은 왕대비전을 나왔다. 하지만 왕대비전의 월대 아래에
내려선 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금 왕대비전을 차가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성숙청은 왕실의
구복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유학자들의 반발에 밀려 이제는 거의가 대비들의 개인 구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왕대비와 장씨도무녀는 아는 사이일 것이다. 그러니 오랜만에
돌아온 장씨도무녀의 소식에 놀랄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훤의
마음은 그리 녹록하지 못했다. 장씨도무녀는 7년 전 사건이란 훤의 의심 그물 안에 걸려 있는 사람이었다.
아울러 왕대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두 사람을 결코 떼어서 생각해선 안 될 것이었다.
훤은 의문 섞인 발걸음을 힘겹게 들어 편전으로 돌아갔다.
왕대비는 대비마저도 급하게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박상궁에게 말했다.
“박상궁, 지금 당장 성숙청으로 가서 장씨를 불러오너라.”
“네, 알겠사옵니다.”
답을 올린 박상궁은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멀리 있는 성숙청으로 달려갔다.
성숙청으로 들어서는 박상궁을 장씨가 먼저 발견하고는 옆에 있던 잔실에게 급하게 속삭였다.
“잔실아, 혹시 모르니 가서 아가씨를 방에서 못 나오게 해라.”
잔실은 박상궁을 힐끔 본 다음 성숙청 뒤로 빠져 나갔다. 장씨는 박상궁의 시선에서 잔실이
사라지는 곳을 가로 막으며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장씨도무녀. 지금 왕대비마마께옵서 찾아계십니다. 가시지요.”
“몰골이 이러한데 아니 될 일입니다. 목간이라도 하고난 이후에.”
“지금 당장 데려오라 하시었습니다.”
장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박상궁을 따라 나섰다. 박상궁의 뒤를 따라가는 장씨의 표정엔 무서우리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희미하게 웃던 그것마저 사라지고 오직 혼이 없는 몸뚱아리 만 걸어가는 듯 했다.
장씨는 발 너머에 왕대비를 두고 고개를 푹 숙여 앉았다. 왕대비의 내리깐 목소리가 장씨를 향했다.
“오랜만이다. 장씨가 맞는 것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성숙청에 돌아온 줄 몰랐구나. 어찌하여 내게 먼저 기별하지 아니 한 것이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사옵고, 또한 먼 곳을 돌아왔기에 더러운 혼이 여기저기 붙은 몸으로
왕대비마마 앞에 설수가 없었사옵니다. 지금도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기도하는 있는 중이었사옵니다.”
“찾아오지는 못하더라도 돌아왔단 기별은 하여야 하지 않느냐!”
“쇤네의 소견이 짧았사옵니다.”
장씨의 차분한 목소리에 소리를 높인 왕대비가 머쓱해졌다. 장씨가 성숙청에 돌아왔단 말을
들었을 때부터 왕대비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인사오지 않는 장씨는 더 불안했다.
이윽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왕대비가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너와 나의 사이는 이리 소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대가 더 잘 알 게야. 그렇지 아니한 겐가?”
“쇤네는 하늘의 명을 따라 성숙청을 비운 것이었사옵니다. 하여 소원해진 것은 아니옵니다.”
“그래, 그때도 그리 말하고 내 곁을 떠났었지.······아무튼 옛날 일은 접어두는 것이 서로 간에 좋으니까
이만 하고, 이리 부른 김에 상감마마의 뜻도 전하겠네. 사독제를 거행하라 명하셨다. 하여 그대가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사독제라 하시면,······손이 모자라옵니다.”
“그런가? 그래도 자네 재량껏 준비하도록 하게.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명할 것도 있느니.
이상하게도 주상과 중전 사이에 아직까지 합방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원진살(元嗔煞,
부부 사이에 까닭 없이 서로 미워하는 액)이 든 모양인데 자네가 풀어주어야 할 것 같더군.
내 그래서 자네를 애타게 기다린 게야. 자네라면 쉬이 할 수 있을 터이니.”
고개를 숙인 장씨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발이 왕대비 사이에 놓여있었기에 마음껏 비웃는
표정을 방바닥에 지어보일 수 있었다.
‘원진살이란 것도 부부 인연이 있어야 드는 법. 애초에 들 원진살이 어디 있다고, 훗!’
장씨가 대답이 없자 왕대비가 다시 물었다.
“왜 답이 없는가? 원진살 정도면 쉬이 없앨 수 있지 아니한가?”
“감히 상감마마와 중전마마의 부부궁합에 쇤네는 간여할 수 없사옵니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이면서 그리 말하다니, 겸손한 것인가? 하여 주게나.
어여 원자를 보기 전에는 내가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야.”
어차피 풀 원진살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짓을 해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지금의 중전 윤씨가
훤의 부인으로 교태전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사주에서는 도가 넘어 선 것이었고, 죄가 넘어선
것이었다. 지금도 그 자리를 견디기엔 중전의 신경은 너무나 가늘었다. 그녀는 숨기고 있어도
장씨는 느낄 수 있었다. 교태전의 동쪽 방에 오랫동안 앉아 있지 못하는 중전이란 것을.
장씨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핑계를 대었다.
“굳이 원진살을 없애는 치성을 드리고자 하시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하옵니다. 쇤네의 씻김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새해에 사독제도 준비해야 하오면······.”
“그럼 그 뒤엔 가능한 것인가?”
“그 또한 아니옵니다. 사독제가 끝나면 다시 씻김을 하여야 하고, 그런 이후에나 원진살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 쇤네가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라도 해 주게. 그럼 이제 자네가 어디에서 무얼 하였는지 담소라도 나눔세.”
“쇤네 아직 씻김이 끝나지 않았기에 혹여 왕대비마마께 해라도 있을까 저어되옵니다.
하여 물러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왕대비는 더 이상 장씨를 잡아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떨떠름하게 허락해 주었다.
해가 떨어지자, 파평부원군의 집으로 외척일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여든
그들은 파평부원군의 노기에 숨을 죽이며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지금의 상감마마를 상대하기엔 우리의 힘이 부칩니다.”
파평부원군은 노기 서린 비웃음을 흘리며 서안 위에 얹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흥! 우리를 밀어내기 위해 사림들을 끌어 들이겠다? 그들이 순순히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눈감아 줄 것 같은가? 어림도 없지!”
“상감마마께옵선 원래부터 원구단의 의미를 각별히 여기셨습니다. 이일을 핑계 삼아 조선의
긍지를 높이고저 하시는 어심도 깔려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긍지를 높이시어도 이 나를 쳐내진 못할 것이다. 그동안 너무 강령하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송구하지만 병상에 계속 계셔주시는 것이 우리를 위해 좋을 것이야. 갑자기 안후가 강령하여지신
원인은 알아냈느냐?”
두 줄로 쭉 늘어앉은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이 고개를 드밀고 말했다.
“혹여 액받이무녀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액받이무녀? 소문으로는 그런 것이 있단 말은 들었는데, 그것이 실제 하였느냐?”
“소인도 관상감에서 흘러나온 말을 들었습니다.”
“관상감에서 반갑지 않은 일을 하였군. 그럼 액받이무녀에 대해 또 들은 것은 없느냐?”
“성숙청 소속의 무녀란 소문이 있었사옵니다. 워낙에 비밀에 부쳐진 일이라 더 이상은······.”
“성숙청? 하하하하.”
파평부원군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방안을 뒤덮었다. 그의 웃는 의미를 몰라 다들 의아해 하며
서로의 얼굴들만 보았다. 파평부원군는 승리에 찬 목소리로 모여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일이 이리 쉽다니. 성숙청이라 하면 왕대비마마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그 액받이무녀란 것의 존재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왕을 강령하게 하는 그것을 없애면
모든 일은 끝나는 것이다. 어찌 이보다 쉬울 수 있을 것인가? 하하하”
“하지만 그게 쉬울까요?”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다. 알아서 할 것이니 인경이 되기 전에 모두 돌아들 가라. 한동안은
상감마마의 눈에 나지 않는 것이 좋아.”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들 물러가는 중에도 파평부원군은 자리에 앉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리 쉽다니. 무녀란 것이 어디 사람이냐, 그런 것 하나 죽이는 것은 일 축에도 들지 않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