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벽 4시를 알리는 파루의 북소리가 보루각을 시작으로 4대문에서 일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33天(중앙의 제석천과 사방에 각각 존재하는 8天을 합친 수. 즉, 온 세상을 의미함)을 깨우는
33번의 북소리가 천명을 받은 왕의 목소리를 대신해 둥둥둥 울려대면, 밤사이 조선팔도를
지배하고 있던 어둑시니(어둠의 신)는 양의 기운에 밀려 부리나케 달 너머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달도 별들만 몇 개 남겨두고 어둑시니와 같이 산 너머로 숨어들어야 했다. 월 또한 달과
어둑시니와 함께 해가 깨어나는 33번의 북소리가 끝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왕의 침소에서
물러났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뒷걸음으로 운의 곁을 지날 때도 운은 그윽한 난향만을 느껴야
했을 뿐 눈길조차 돌리지 못했다. 월이 물러난 자리에는 밤사이 어두운 방 구석구석에 몸을
사리고 있던 국화향이 힘겹게 남아 있던 여린 난향조차 지워버렸다. 그대로 물러난 월은 나인
한 명이 던지듯 건네는 쓰개치마를 공손히 받아 강녕전 월대 아래에 버선발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리고 마당에 이슬 맞으며 홀로 뒹굴고 있던 짚신을 단정히 세워 신고는 차가운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33번의 파루가 끝나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훤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계인(鷄人, 궐내의
아침을 깨우는 사람)이 작은 북을 들고 강녕전 앞마당 한가운데서 33번을 연타하고 나서야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시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훤은 그 자리에서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주위 안내를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밤사이 훤의 체온과, 그리고
월의 체온과 같아진 자리끼를 한 사발 들이키니 온전히 정신이 차려졌다. 훤은 다 마신 사발을
지밀상궁에게 주며 대뜸 입을 열었다.
“혹시 밤사이 누가 내 옆을 다녀갔느냐?”
운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깜짝 놀랐다. 그중 상선내시관이 제일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상감의 명과학교수가 잠시 부적을 쓰러 다녀갔사옵니다. 어침(御寢, 왕의 잠자리)
평안하셨사옵니까?”
훤은 잠시 자신의 몸을 느끼는 듯 이리저리 작게 몸을 움직여보더니 놀란 눈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부적을 쓴 것이냐? 훨씬 낫구나.”
밤새 비상대기 중이던 어의들과 관상감의 세 교수들이 같이 왕께 아침문안을 신청했다. 훤은
비록 야장의 차림이지만 그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그들을 맞았다. 어의가 한참동안 맥을
짚어보더니 얼굴 한가득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엎드려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시작으로 기쁨의 인사를 올렸다. 모두 기뻐하는 그 와중에
관상감의 교수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것으로 현재 왕의 건강은 병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자칫 관상감의 교수들 외에 혜각도사, 현 성숙청 대리 도무녀까지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중대 사안이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 모든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침소를 지키고 나온 월의 건강도 너무나 멀쩡했다. 액받이무녀조차 해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왕이 건강해진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만큼은 무녀가
나빠져야 하는데 이 둘이 같이 건강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명과학교수가 바닥에 몸을 붙여 눈물로 호소했다.
“이 천신(賤臣, 신하가 왕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춰 이르는 말.)을 죽여주시옵소서.
상감마마의 옥체를 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사옵니다. 무능한 이 천신을 부디!”
“아침부터 시끄럽다. 성군을 만드는 것도 신하의 덕이고, 폭군을 만드는 것도 신하의 탓이다.
나를 성군으로 만들고 싶다면 죽여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이일에 대해 조용히 밝혀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훤의 말에도 교수들의 손 떨림은 멈춰지지 않았다. 왕의 추궁을 떠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일
자체가 두려웠다. 교수들은 훤의 물러가란 손짓에 두려운 마음을 몰아 쥐고 침전을 나섰다.
훤의 몸을 꼼꼼히 살피던 어의가 물었다.
“번갈(煩渴, 가슴이 답답하고 몹시 목이 마른 증상)은 어떠시옵니까?”
“어젯밤과는 달리 괜찮다. 이리 앉아 있어도 모현(冒眩, 머릿속이 흐리멍텅하면서 어지러움)도
없고.”
훤은 정좌를 하고 자세를 가다듬고는 내시관들을 향해 말했다.
“내 오늘은 천추전에 나가 만기친람(萬機親覽, 왕이 수많은 정치 일을 몸소 살핌)을 할 것이다.
준비하라.”
어의가 깜짝 놀라 만류했다.
“상감마마, 아직은 이르옵니다. 좀 더 나아진 연후에.”
“나갈 것이다! 또 언제 나빠질지도 모르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괜찮을 때 나가지 않으면 나란
것이 왕인지도 모를 것이다. 오늘은 조강(朝講, 왕이 하는 아침 공부)과 조참(朝參, 아침 조회)은
아니 할 것이다. 대신 바로 천추전에 들어 몸져 누워있던 달장근(지나간 한 달)의 승정원일기
(공문서를 처리한 결과를 기록해둔 일지)를 훑어볼 것이니 당장 대령해 두도록 하라!”
공무에 관한 것에 있어서만큼은 훤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을 옆에서 모시고 있는 이들이
더 잘 알기에 상전내시관(왕의 말을 전달하는 내시)이 얼른 일어나 방을 빠져 나갔다. 왕이
친람을 할 것이라고 말했기에 궁궐 내의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중 제일 먼저
천추전의 아궁이가 바빠졌다. 그리고 승정원에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가장 마음이 조급한 것은
다름 아닌 훤이었다. 그동안 비워두다시피 한 조정의 상태에 미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초조반(새벽에 일어나서 먹는 죽수라)을 급하게 먹고 왕대비와 대비에게는 내시를 보내
문안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부부임에도 서로 간에 애정 하나 없는, 있는지 없는지 조차
느끼지 못하는 중전에게도 문안 올 필요 없다는 전갈을 보냈다. 가끔씩 부인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조정을 통째로 먹으려 드는 자신의 장인, 파평부원군을 볼 때뿐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귀양을 보내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그를 비호하고 있는 훤의
조모인 왕대비와 전쟁을 치러야 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왕대비! 외척세력의 대지주였다.
뛰어난 군주였던 전왕조차도 효라는 유교교리 아래에 묶여 왕대비의 위세를 떨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훤도 파평부원군을 내치치 못하고 있었다. 왕에게는 충의 교리는 없어도
효의 교리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훤이 수시로 나빠지는 건강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실권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충신들에게는 고마운 것이었다.
몸을 정갈하게 하고 의복을 갖춰 입은 위에 곤룡포를 입었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듯 했다.
그리고 머리에 익선관을 쓰고 침전을 나섰다. 왕의 바로 뒤에 검은 옷의 운검이 따르고 그 뒤를
내시관과 궁녀, 선전관, 무예별감들이 따랐다. 편전 영역으로 나가는 향오문을 넘어가는 동시에
왕의 머리 위엔 왕을 상징하는 충천각모(衝天角帽, 왕이 쓰는 큰 붉은 양산)가 받혀 씌어졌다.
훤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천추전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군사들이
천추전을 중심으로 경호 대열을 쌓았다.
훤은 어좌에 앉았다. 내내 아무 말 없이 훤을 따르던 운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월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애타게 월을 찾던 왕의 마음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말할 수 없는 마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마음의 무게에 짓눌려 운의 입술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 갔다. 승정원일기를 펼치던 훤이 운을 보며 말했다.
“운아, 혹시 피곤한 것이냐? 평소와 달라 보이는구나.”
“아니옵니다.”
훤은 한참동안 물끄러미 운을 보았다. 언제나 말이 없는 남자이긴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 말없음이 이상하게 다가왔다. 훤의 옆을 보좌하고 있던 내시관들도 운을 보았지만 그들은
전혀 달라진 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힘들게 하는가 보구나. 난 주위에 사람 많은 것은 싫다. 게다가 보통 운검 다섯의
실력과 너 하나의 실력이 같지 않느냐. 그래서 내 곁의 운검은 딱 너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은 두지 않는데 혹시 그것이 널 피곤하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내금위 군사들이
있으니 이제 들어가서 그만 쉬어라. 정오에 보자.”
운은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물러 나왔다. 천추전 바로 밖에는 어의들이 대기상태로
서 있었다. 왕이 승정원일기를 보게 되면 성격상 언제나처럼 불같은 화를 뿜어낼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직 온전히 좋아진 건강도 아니고 또 언제 갑자기 나빠질지도 모르는 건강이기에
어의들은 긴장상태로 안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를 담은 훤의 목소리가
천추전 밖으로 뚫고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장 승지들을 불러 들여라!”
그와 동시에 내시들이 전 속력으로 승정원으로 달려갔고, 어의들의 긴장은 더욱 심해진 반면,
대궐을 지키는 군사들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그들의 현명한 절대군주가 돌아왔기에 마음
깊숙이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훤의 목소리가 들리면 들릴수록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저절로 머금어졌다. 운이 천추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군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운검이 왕의 옆을 비운다는 것은 그만큼 경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차갑게 우뚝 선 콧날, 그 아래 얼음 같이 한일자로 꾹 다문 입술의 운이 군사들을 스쳐 지나가자
같은 사내이지만 괜시리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운이 월대를 내려서자 관상감의 명과학교수가 천추전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그에게 물었다.
“어디에 있습니까?”
운이 던진 말에 명과학교수는 순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평소 목소리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운검이 자기에게 말을 걸었기에 무엇을 물어보는지 언뜻 이해를 못했지만 이내 무녀가
기거하는 곳이 어딘지를 묻는 것을 눈치 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숙청 주위의 도린곁(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 한 달간만 묶을 것입니다.
절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왕을 모시는 자로서 안심해야 하는 말이었지만 운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도린곁이라는 말에
아릿한 감정이 생기는 듯하였다.
“언제부터 성숙청의 무녀였습니까?”
“무적에 올려져 있은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럼.”
명과학교수가 급한 걸음으로 천추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운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성숙청 무녀가 어째서 궁내가 아닌 온양에 있었는지, 지금 건강은 어떤지, 지금 이일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지, 한 달 뒤는 그럼 어디로 가게 되는지 물을 수가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적을 두고 먼 관령의 무적만 찾아 헤맨 셈이었다.
어느덧 동쪽 산에선 눈부신 아침 해가 돋아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운은 그 눈부심을 보았다.
‘같은 궁궐 안에 있는 이 거리가 그대를 찾아다니던 그 만 리 길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오. 혹시
그대도 지금 저 눈부신 해를 보고 있는 것이오? 그렇다면 부디 보지 마시오. 차라리 눈을
감을지언정 해는 보지 마시오. 그대 눈부심을 가려주는 구름이 되어주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를 것이오. 달을 보고 또 해를 봐야하는 구름보다, 달을 보지 못한 해가 그나마
행복하지 않겠소?’
천추전 안에 들어간 명과학교수는 왕 앞에 붉은 비단으로 싼 문서를 올렸다.
“무엇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합궁일과 입태시 이옵니다.”
훤은 엉망으로 처리 된 승정원일기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에 이런 말을
들었기에 아예 붉은 비단 천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상감마마······.”
“아직 몸이 나쁘다!”
“당장이 아니옵니다. 지금부터 옥체를 안팎으로 닦으시어 부디 종묘사직을 이을 원자를
보시오소서. 그래야 조정도 흔들리지 않사옵니다.”
후사가 없는 왕의 건강이 나쁜 것만큼 국가 안위가 위험한 것은 없었다. 지금 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도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나뉘어 지고 그것으로 인해
왕권이 서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칫 사화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훤은
가례를 올린 지 이미 7년이 가까워가고 있었지만 중전과의 합방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왕과 중전은 자신들이 합방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합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왕이 될 원자가 자칫 폭군이 태어날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주를 결정하는
난시만큼이나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입태시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기에 이렇게 관상감에서
택일해주는 날에만 합방이 가능했다. 그런데 합방하면 안 되는 조건 중에 보름, 그믐, 초하루,
각종 절기, 큰 비가 오거나 심한 바람이 부는 날, 가물거나 홍수로 민심이 흉흉할 때, 상중,
천둥번개가 치는 날, 왕과 왕비 중 한명이라도 건강이 나쁘거나 기가 흐트러져 있을 때,
기타 등등. 이러한 날을 제하고 또 합이 맞는 날짜를 뽑으면 합방일이 한 달에 하루도 나오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이 날은 왕이 아무리 하기 싫어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힘쓰러
가야했다.
그런데 다른 왕들과는 달리 훤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유도 없이 중전이 싫었다.
그리고 힘들게 합궁일만 받으면 그날은 어김없이 왕과 왕비 중에 어느 한쪽이 심하게 아프거나,
아니면 하늘이 날씨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대신들은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리고, 이에 맞서 아직 안된다며 버티는 외척간의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자칫 후궁에게서 왕자를 보게 되는 날엔 외척세력의 중심인 파평부원군의 위치가
흔들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싫어도 중전과의 사이에서 원자를 보아야 하는 것.
이것은 왕이 된 자의 의무였다. 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왼손으로만 툴툴거리며 성의 없이
비단 천을 풀어 안의 문서를 읽었다. 그 많고 많은 글자들 중에 유독 ‘月’이란 글자들만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왔다.
‘보아라, 월아. 나란 것도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새끼를 낳기 위해 씨를 붙이는 소, 돼지와 내가
무에 그리 다르겠느냐. 그날 네가 싫다고 하여도 한 번 안아 볼 걸 그랬구나. 정말 안아보고
싶었다. 몸이 아닌 마음이 안고 싶었다.’
관상감에서 뽑은 세 날짜의 합궁일 중, 중전을 모시고 있는 상궁이 보경(寶經, 왕비의 달거리)
기간을 피해 한 날짜를 낙점한 것이 뒤늦게 보였다. 다가오는 보름의 바로 그 전날, 즉 월이
궁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밤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훤은 알았다며 상선내시관에게
그 문서를 건넸다. 이 이후부터 수라에 올려지는 음식들이 달라질 것이고, 마시는 차도 달라질
것이고, 목욕물도 달라질 것이고, 심지어 옆에서 연주하는 음악까지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하루 종일 힘든 공무를 마치고 밤늦게 침전에 든 훤은 더 이상 달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아예 달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음날의 공무를 위해 내의관에서 올리는 국화향이 가득한 차를
오히려 반가이 달게 마시며 깊은 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보고파 하는 달이 자신의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깊고 깊은 잠을 잤다.
한양의 북촌(北村, 고관대작들이 주로 촌락을 이뤄 살던 곳), 의빈(議賓, 조선시대 왕의 사위를
일컫는 말)의 저택.
민화(旼花)는 열심히 흉배 수를 놓다말고 한숨을 쉬었다. 손끝 솜씨가 없어서 인지 아무리 봐도
엉성하고 보기 흉했다. 분명 공작을 수놓았는데 뚱뚱한 닭이 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자신의
낭군인 염의 관복에 붙일 수는 없었다.
“하! 언제쯤 내 손으로 수놓아드린 관복을 입으실까. 내 손으로 옷은 고사하고라도 버선 한 짝도
못해드리니, 정녕 미운 손이로구나.”
민화는 옆에 놓아둔 염의 저고리를 끌어안았다.
“서방님, 보고 싶사와요. 여행 떠나시온지 어언······, 어언······, 아! 달포(한 달)에 불과하구나.
그래도, 그래도 소첩에겐 일 년보다 더 긴 시간이어요. 돌아오시면 제 손으로 만든 흉배를
자랑하고자 하였는데 완전히 망쳐버렸어요. 이제 자랑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어여 오시어요.”
끌어안은 염의 저고리에선 이제 염의 향기는 간 곳 없고 민화의 향기만이 배어있었다.
한 달 내내 이 저고리만 부둥켜안고 있었다. 갑자기 그리움이 덮쳐와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천장으로 들고 눈을 부릅떴다.
“눈물아 들어가라, 눈물아 들어가라. 안방 부인이 눈물 흘리면 먼 길 떠나신 바깥양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느니.”
힘들게 눈물을 다시 넣고자 애쓰고 있자니 바깥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여종이 바깥에서
소리치는 것이 민화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공주자가, 공주자가!(자가:마마보다 한 단계 아래 칭호. 참고로 ‘마마’는 왕과 왕비, 대비,
세자 뒤에만 붙일 수 있는 칭호였음) 오셨습니다. 의빈자가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민화의 귀가 번쩍 떠졌다. 그 소리를 들은 민상궁이 놀라서 문을 활짝 열었다.
“정말이냐? 지금 오신 것이냐, 아니면 오실 거라는 말이냐?”
“지금 대문을 들어오십니다.”
민화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그만 치마 앞자락을 밟고 앞으로 자칫
꼬꾸라질 뻔했다. 옷을 추슬러 올리며 바깥으로 나가려다 말고 분대함을 꺼내 얼굴에 대충 분을
말랐다. 그리고 다른 부녀자들과는 달리 특이하게 가체를 하지 않은 쪽진 머리를 정돈하고
상궁에게 물었다.
“어떻느냐? 미웁지 않느냐?”
“어여쁘시옵니다.”
민상궁의 칭찬에 민화는 치마를 위로 걷어붙이고 바깥으로 뛰기 시작했다. 민상궁이 당황하여
뒤를 따르면서 소리쳤다.
“공주자가! 부디 체통을, 체통······.”
하지만 민화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얼굴 화장은 살펴볼 시간은 있어도 혜를
신을 마음의 시간은 없었기에 버선발 차림으로 뛰어갔다. 체통을 부르짖으며 민상궁이 뒤를
따르고, 그 뒤를 여종이 놀라서 민화의 온혜(왕족이 신는 비단신)를 들고 따랐다. 염은 많은
하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허 염(許炎). 민화공주의 남편이자
훤의 매제인 의빈이었다. 한 달 전 떠날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들어서는 자신의 낭군을
발견한 순간, 민화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버렸다. 그 뒤를 차례로 민상궁이
멈춰서고 여종도 온혜를 뒤춤에 감추면서 멈춰 섰다. 민화는 이렇게 급하게 뛰어 나오긴 했지만
막상 눈에 보이니 가까이 가진 못하고 부끄러움에 그만 몸을 돌려 섰다. 하인들의 인사를 받고
난 뒤엔 자기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주리라, 특유의 깊이 있는 다정한 목소리로 ‘공주.’라고
불러줄 것이리라 생각하면서 옷고름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기다리는 그 순간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바로 뒤까지 염이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추(羽?, 날짐승 깃털로
만든 비)로 갓과 도포를 털어내는 것도 느껴졌다. 이제는 말을 걸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야속하게도 염은 민화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모친이 계시는 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화는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속상했지만 그는 효자이므로 돌아와서 당연히
어머니께 먼저 문안을 드리는 것이 예이니 아내인 자기는 참아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위로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어머니 방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애써 꾹 참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인들이 각자 자기 자리로 다 돌아가도 민화는 염이 나오기만을 마루 앞에 서서 기다렸다.
민상궁도 여종에게서 온혜를 받아 민화의 발에 신겨주고는 옆에서 같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염은 어머니인 신씨부인에게 절을 올린 뒤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았다.
“소자가 불효하여 그간 문안도 못 드렸습니다. 곁을 떠나 잠자리 하나도 펴드리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이리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고맙다. 네 심정을 어찌 모르겠느냐. 여행 다녀오니 마음은 조금
괜찮으냐?”
“네.”
염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신씨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동안 의빈부(의빈을 관리하던 부서)에서 몇 번이나 다녀갔다. 왕족과 의빈은 한양 땅을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거늘······.”
“허가를 받아 다녀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공주자가를 뵈올 낯이 없더구나. 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신 줄이나 아느냐?
도착해서 인사는 드리고 이리 온 것이냐?”
“아닙니다. 어머니가 먼저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 어서 나가서 다독여 드려라. 필시 바깥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계실게다.”
“씻고 난 뒤에 뵈올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염은 빙그레 웃으며 물러나왔다. 염이 바깥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 민화는 다시 몸을 돌려
옷고름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괜히 대청기둥에 붙어 서서 눈치만 살폈다.
하지만 염은 이번에도 곁을 지나쳐 사랑채로 걸어갔다. 민화는 염의 뒤를 주춤거리며 조금
따라갔지만 이윽고 사랑채 문을 닫고 모습을 감추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일하는 하인들이
주위에 있었기에 눈물을 애써 감추고 내당으로 몸을 돌렸다. 민상궁이 옆에서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는 체통을 지키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끅끅거리며 눈물을 참고 내당으로
다가가는데, 울음은 그 사이도 참기 버거웠던지 입술사이를 삐죽거리며 터져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겨우겨우 방으로 들어간 민화는 이불에 얼굴을 박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기쁘고,
반갑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울음을 만들어 내었다. 민상궁은 행여나
울음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갈까 노심초사했다. 한참을 울고 난 민화는 그 사이 다시 염이 보고
싶어졌다. 이제 사랑채에만 달려가면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정돈하며 바깥에 있는 여종에게 말했다.
“의빈께서 지금 뭐하시는지 살짝 알아보고 오너라.”
부리나케 달려갔다 온 여종이 방안에 들어와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 막 정방(대갓집의 집안에 설치해 둔 목욕소)에 드셨다 하옵니다.”
민화가 일어서려 하자 민상궁이 놀라서 팔을 잡았다.
“또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혹시······? 아니 되옵니다! 지금 공주자가께서 어쩌시려는지 저
눈치 챘습니다. 의빈자가께선 점잖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아니 될 일이옵니다.
제발 체통을······.”
“다른 사람들 앞에선 있는 힘껏 체통을 지킬 것이니 서방님 앞에서만큼은 그딴 것 필요 없다.
난 지금 당장 서방님을 뵙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 같단 말이다. 민상궁은 따라오지 마라!”
끝끝내 민상궁을 뿌리치고 정방으로 달려갔다. 주위를 살펴 일하는 하인들이 눈에 띠지 않자
도둑 마냥 살그머니 정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목욕하는 모습을
서로 보인다는 것은 내외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욕을 할 때도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벌거벗지 않고 목욕용 적삼을 완전히 갖춰 입어야 했다. 염은 누구보다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어김없이 적삼을 입은 채로 목욕통 안에 들어가 있었다. 머리를 갓 감고
통 안에 들어갔는지 물기를 머금은 긴 머리카락이 염의 목 줄기를 타고 어깨를 감아 아래로
떨어져 통 안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물 안에 있는 적삼은 환히 비쳐 하얀 살결이 드러나 보여
오히려 더 숨이 막혔다. 아름다운 콧날과 턱 선을 따라 떨어지는 물방울이 곱게만 느껴졌다.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 아래의 깊이 있는 검은 눈동자는 상념에 젖었는지 민화가 들어온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민화도 자신의 낭군을 감격에 겨워 넋을 잃고 바라보며 서있었다.
이윽고 염이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다. 이내 곧 민화인 것을
알아채고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놀란 표정은 민화가 우물쭈물 거리며 서있자 난감한
표정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염이 바깥에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놀랐습니다. 여긴 어떻게 온 것입니까?”
“이, 인사를 하고 싶어서······.”
“잠시 후에 그럼.”
“싫어요. 지금······. 소첩은 서방님이 보고파서 잠시 후까지는 기다릴 수가 없사와요. 지금 이렇게
보고 있어도 보고파서······. 보고파서······.”
기어이 민화가 눈물을 쏟아내자 염은 이런 차림으로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난감해 하다가 물이 툭툭 떨어지는 팔을 들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민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앞으로 가서 염이 내민 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따뜻한 염의 손이 민화의 손을
꼭 쥐었다.
“혹여 제가 서운하게 하였습니까?”
민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세차게 옆으로 저으며 염의 목욕통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염이 다정하게 민화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몸을 닦고 난 뒤에 인사하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들어오실 때 저에게 한번이라도 눈길만 주셔도 되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했을 것이어요.”
“주위에 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주, 아무리 바빠도 혜는 신고 다니셔야 합니다.”
민화는 놀란 눈으로 염을 보았다. 염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니 그동안의
서운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혜를 신지 않은 것을 보았다는 것은 민화가 보지 못한
사이에 염의 눈길이 민화에게 다녀갔다는 말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염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염의 표정은 이제
인사를 했으니 나가달라는 표정인데 민화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눈을 촉촉이 빛내며
바라보고 있었다. 염은 민화의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염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민화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정방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염의 상식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었다. 평소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어쩌면 지금 이 표정이 화가
난 것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쯤에서 정방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물기가
떨어지는 염의 입술이 눈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시, 시, 심알잇기(키스) 하고 싶사와요!”
이번엔 염도 제대로 놀란 모양이었다. 목욕탕 물이 염의 놀란 몸짓에 크게 출렁거렸다.
이제 내뱉은 말이기에 염의 심판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염의
기척이 없었다. 대신 목소리가 들렸다.
“허허! 공주는 어떻게 하면 저를 놀래 킬 수 있을까 그 궁리만 하는가 봅니다.”
“구, 구흡(口吸, 프렌치 키스)을 원하는 것이 아니어요, 그냥 서방님답게 젊잖게 라도 좋으니······.”
이렇게 까지 일이 벌어지자 민화는 염이 혹시나 자신을 음란한 여자로 생각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음이 너무 앞섰다는 생각에 서서히 괴로워지고 있었다. 염은 민망한지
젖은 머리를 손으로 한번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전 이리 벗은 채 물속에 있고, 해도 하늘에 떠있습니다. 이는 예가 아닙니다.”
민화의 숙여진 고개는 들어지지 않았다. 또 다시 창피함에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염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질 것 같아 애써 눈물은 참았다. 다행히 숙이고 있는 민화의
이마에 염의 입술이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염이 움직일 때 마다 풍겨 나오는 그윽한
난향도 마음이 설레었다. 만족하고 일어서려 고개를 든 민화의 입술에 염의 입술이 겹쳐졌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염의 입술은 언제나 촉촉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향기로웠다.
염의 입술이 멀어지자 민화는 생끗이 웃으며 염의 목을 끌어안았다.
“공주, 옷이 물에 젖습니다. 어서 목욕을 마치고 나가야 됩니다.”
염이 아무리 당황해도 민화는 염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저고리
따위는 염의 몸에서 나는 향기에 비하면 우습기 그지없었다. 난향을 풀어 놓은 목욕물에서 보다
염의 몸에서 나는 난향이 더 그윽했다. 오히려 염의 몸에서 향기가 씻겨 목욕물로 흘러들어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방의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남장으로
변복하고 있는 설(雪)이었다. 한참을 슬프게 문을 보고 있던 설은 하인이 오는 기척이 들리자
재빠른 몸짓으로 순식간에 담을 뛰어넘어갔다. 담을 넘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을 뒤돌아 염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설은 이쪽으로 누군가가 오는 것이 느껴져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바쁜 걸음을 떼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던 사람은, 염이 한양에 돌아왔다는
소식에 왕의 심부름을 오고 있던 운이었다. 운과 설이 스쳐 지날 때는 괜찮았지만 몇 걸음
걸어가다가 순간 둘 다 걸음을 멈추었다. 설은 운의 손에 쥐고 있던 별운검을 보았던 것이다.
당황한 설은 태연한 척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운은 여인이 남장을 하고 있는 것이
수상해 본능적으로 돌아보았다. 봇짐 뒤에 있는 환도와 어디선가 본 듯한 뒷걸음걸이가 눈을
잡았다. 검을 지닌 여자는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온양에서 월과 같이 있던 여종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운은 염의 저택을 보았다. 분명 설은 이 집을 보고 있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설은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