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5화 (5/47)

#5

운은 뒤뜰 누각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도 설이 이곳 염의 집을 바라보던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차림새 또한 여행을 다닌 듯 하여, 오늘 여행에서 돌아 온 염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만에 하얀 도포와 갓으로 의관을 갖춘 염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운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 흑목화를 신고 아래로 내려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염도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분명 염보다 운이 품계가 훨씬 낮음에도 불구하고

염은 언제나 운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기다리게 하여 죄송합니다. 공무로 바쁘신 분을.”

“아니옵니다. 기다리는 동안 좋은 책을 읽었사옵니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네, 덕분에. 누각에 오르시지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정좌하여 앉아 차를 마셨다. 염은 운보다 한 살 많은 24살이었다.

어려서부터 막역한 지우 사이기도 하지만 검술에 있어선 운이 염의 스승이었다. 보통 검술은

하찮은 것이라 하여 사대부들이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지만 염은 운의 검술을 존경했다. 그래서

검술 속에 녹아있는 운의 강직한 품성을 익히는 것을 감사해 하며 검술을 배웠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라고는 학문적인 것이 전부였는지 검술 실력만큼은 늘지 않았다.

“상감마마께옵서 의빈자가를 뵈옵고 싶어 하십니다. 궁으로 한번 오시라는 전갈을 드리러

왔사옵니다.”

“가 뵈어야지요. 성후 미령하시다는 소문에 민심이 많이 흉흉하더이다.”

운은 설을 본 것이 마음에 걸려 잠시 망설이다가 질문했다.

“여행은 어느 분과 다녀오셨습니까?”

“저의 집 하인 두 명과 다녀왔습니다.”

여전히 부드러운 염의 표정은 거짓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염은 조용히 찻잔을 입에

기울이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에서 떼며 말했다.

“아! 그러잖아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혹여 요즘 의빈부에서 감시를 강화하였습니까?”

“네? 무슨 말씀이온지······.”

“여행 내내 누군가가 저를 미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의빈부에서 감찰 보낸 건가 생각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상감마마의 윤허를 받아 여행 떠나신 의빈자가를 감히 감찰 할 순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운은 더욱 이상했다. 거짓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염이라는 것은 운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미행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면 염도 모르는 사실이란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여종은 어떻게 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길로 이해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생각에 빠진 운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 풍천위(위:공주와 결혼한 의빈의 봉작 명. 봉작 앞에 본관을 붙여 부름. 염은 풍천 허씨)

께서 돌아오셨다고?”

큰 키에 풍채 좋은 모습으로 갓은 뒤로 넘겨 등에 걸치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오고 있는

양명군(陽明君)이었다. 양명군은 훤보다 한 살 많은 배다른 형이었다. 염에게 반갑게 두 팔을

펼치고 오던 양명군은 이내 운을 발견하고 얼굴 한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게 누군가? 우리 운검 아니신가. 이런 횡제가 있다니. 정말 반가우이. 내 자네들이 보고 싶어

병을 하네, 그려.”

운과 염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명군을 맞았다. 염이 공손히 말했다.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풍천위가 한양에 돌아오셨단 말에 미리 기별 않고 바로 달려왔네. 엉덩이가 들썩여 예를 갖출

경황이 있어야지. 풍천위, 자네가 없는 한양 땅은 내겐 향기 없는 난초와 다름없다네.”

양명군은 먼저 운을 껴안을 듯 팔을 펼치고 다가갔지만 운이 차갑게 허리를 숙여 인사 하자

슬그머니 팔을 거두었다.

“참으로 빡빡한 사내일세. 내 자네를 품에 한번 안아보면 소원이 없겠네. 지금 자네 손에

별운검만 없었어도 강제로 안아보긴 하겠구먼, 목숨이 하나뿐이라······. 같은 한양 아래에 살면서

구름을 보기가 이리 힘드니, 원.”

이번엔 염을 안을 듯 팔을 펼치다가 주위를 얼른 둘러보며 말했다.

“내 우리 풍천위도 안아보고 싶은데 어디선가 공주가 눈썹 휘날리며 달려와 나를 팰 것 같아

겁나서······.”

“농은 여전하십니다.”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염의 얼굴을 보며 양명군도 미소를 지었다. 양명군 또한 두 사람과

막역한 사이였다. 염과 운이 정좌를 하고 앉은 것과는 다르게 양명군은 갓을 벗어 던지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양명군은 언제나처럼 멀리 별당으로 슬픈 눈길을 한번 던졌다.

염이 양명군 앞으로 찻잔을 밀며 말했다.

“갓을 그렇게 뒤로 넘겨쓰시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내가 갓을 안 쓰고 다닌다고 하여 왕족이 아니라고 할 자가 있겠는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왕족의 딱지는 떼어지지 못하는 것을. 하긴, 이 몸이 뭐가 그리 억울하겠는가. 풍천위 자네에

비하면 말일세. 아까운 사람 같으니.”

운은 표정 변화 없이 차를 마셨고 염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왕족과 의빈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철저한 금고(禁錮)를 당했다. 풍족한 부를 제공받는 대신 그 어떤 정치적인 활동과

발언도 용납되지 않았다. 만약에 정치적인 발언을 했을 경우엔 바로 삼사에서 탄핵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대외적인 그 어떤 학문 활동도 할 수가 없었다. 일평생 몸을 사리며 조용히 살다

가는 것만이 이들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그래서 의빈을 간택할 때의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가

나라의 동량이 될 뛰어난 인재는 간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염은 의빈으로

간택되어선 안 될 만큼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양명군은 이런 염이 안타까워 한

말이었던 것이다. 운은 찻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양명군은 굉장히 서운해 하며 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왜 벌써 일어서는가? 이리 마주하기 얼마나 힘든데.”

“오래 자리를 비웠습니다.”

깍듯한 말이었다. 양명군은 쓸쓸히 웃으며 손을 놓았다.

“주상은 자네마저도 독차지를 하는군. 언제나 자네를 옆에 꿰차고 놓아주질 않으시니······.

이 마당에서 우리 셋이 검술을 익히던 때가 그리우이.”

“오랜만에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운이 일어나 가는 뒷모습을 염과 양명군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양명군이 조용히 말했다.

“제운······. 나날이 멋있어져 가는군. 검술 또한 일취월장 하였겠지.”

“학문의 깊이 또한 깊습니다. 아까운 사람이지요.”“그래. 염, 자네와 제운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난 복 받은 사람이야.”

“그런데 어찌하여 재혼을 하지 않으십니까?”

양명군은 2년 전 첫 부인이 죽고 홀로 된 몸이었다. 그런데 첩 하나 없이 재혼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삼년상도 끝나지 않았잖는가. 적어도 삼년상은 끝나고 재처를 들이는 것이 법도가

아니겠는가.”

“그런 사내가 드물지요.”

양명군은 슬픈 미소로 다시 한 번 별당으로 눈길을 돌렸다.

“양천위, 자네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면 당장 재혼을 하지. 자네와 닮은 여인이 있다면······.

저 별당이 비어있는 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저곳에 눈길이 가니 어이가 없네. 입에 담으면

안 되는 말인 줄 내 알고 있지만······.”

“네. 입에 담으시면 아니 됩니다. 눈길을 거두시옵소서.”

염은 오직 눈길을 아래 찻잔에만 두고 정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미안허이, 이런 말 해서. 술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취기가 올랐나 보이.”

양명군은 얼른 찻잔을 잡아 한 모금 마셨다. 염도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훤은 천추전에서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승지들과 토의를 하고 있었다. 그 옆은 어김없이 운이

지키고 있었다. 다른 대신들은 하루 종일 훤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퇴궐을 했지만 승지들은

여전히 잡혀 꼼짝도 못하고 들볶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훤은 중간에 빠져나가 저녁을 먹고

왔지만 승지들은 쫄쫄 굶고서 훤의 성질을 다 받고 있었다. 그러니 기운 빠진 여섯 명의

승지들과 뱃속 든든한 훤이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훤은 4년 6개월 전, 19살의 어린 나이로 왕으로 등극했다. 원래 왕이 20살이 되기 전에는 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첨정을 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었다. 그런데 훤은 나이가 수렴첨정을 맡기기엔

상당히 애매하긴 했지만, 세자시절 장난 심하기로 악명 높은 악동이었다. 외모 또한 나이에

비해 앳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파평부원군 일파는 왕대비가 당연히 수렴첨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고, 훤을 믿을 수가 없었던 다른 대신들까지 가세해서 거의 왕대비가

조정의 실권을 잡을 위기로까지 몰렸다. 훤은 외척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갈며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왕의 시호(諡號)를 결정하는 문제로 기회포착을 했다. 봉상시(奉常寺,

죽은 왕의 시호를 결정하던 기관)에서 올린 시호에 살아생전 받았던 존호(尊號)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무지한 왕대비가 모르고 넘어가려고 했다. 훤은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경들은 감히 왕대비마마를 속이려드는가!”

갑자기 호통 치는 훤이 어리둥절했던 신하는 서로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훤이 다시

호통을 내렸다.

“지난번에 안으로 일어난 난을 진압하고, 바깥으로는 정이(征夷, 오랑캐를 징벌함)한

은위(恩威)로 분명 4자의 존호가 바쳐진 바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 이를 빼고 8자의 시호만

바치려 드는가! 이는 왕대비마마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국왕인 이 나를 능멸한 것이다!

그리고 분명 내가 친히 봉상시에 글자 수에 구애되지 말라 일렀거늘 왜 8자로만 하였는가!

내가 어리다고 하여 그런 것인가?”

왕의 위엄을 갖춘 훤의 모습에 왕대비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훤은 대신들은 한번 훑어보고는 그중 왕대비의 사촌, 외척의 중심인물의 한명인 좌의정에게

물었다.

“좌의정! 너의 왕은 누구인가?”

좌의정은 놀라서 훤을 보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물론 천신의 앞에 계옵신 상감마마시옵니다.”

훤은 물어 놓고는 침묵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으니 좌의정을 비롯한 대신, 왕대비까지

긴장이 되었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훤이 화를 내며 호통 쳤다.

“누가 나를 보라 일렀는가!”

“네? 무슨·······.”

“누가 허락 없이 군주의 얼굴을 본다 하던가? 고래로부터 그러한 예를 나에게 말하라! 분명

이러한 예는 없을 것이다. 허락 없이 왕인 나의 얼굴을 본 것은 분명 왕을 능멸한 죄에 해당한다!

여봐라, 저 놈을 당장 하옥토록 하라!”

왕대비가 만류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 일을 빌미로 전왕조차 건드릴 수 없었던 왕대비의 측근을

옥에 가둔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귀양을 보내버리고,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결국 훤이 정권을 잡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 절대군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듯

했지만 이 또한 얼마가지 않아 건강이 나빠지고 말았다.

승지들은 건강한 훤을 상대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훤은 어떻게 말을 돌려서라도 자신이

의도하는 쪽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는 왕이었다. 그리고 일 처리가 마음에 들기 전에는 끝내지

않는 집요함도 있었다. 그렇게 지쳐있던 승지들에게 바깥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상감마마, 성록대부 풍천위가 입궐하였사옵니다. 어찌 하옵니까?”

화를 내고 있던 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승지들이 지옥에서 헤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기록 중이던 사관 둘의 얼굴도 밝아졌다. 염은 성균관 시절 이들의 우상과 같은

인물이었다. 염의 얼굴을 직접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사관들은 기뻤던 것이다. 그런데 훤의

얄미운 답이 들렸다.

“내 정리하고 갈 터이니 풍천위를 침전으로 모시도록 하라.”

사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침전은 사관이 넘어갈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상감마마, 어찌 침전에 드시려 하오십니까?”

“나의 매제로 만나는 것이니 당연히 침전에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이쯤하고 나머지는

내일 모든 신료들이 있는 경연(經筵, 왕의 공부를 위한 학문토론. 정치토론도 하였음)에

붙이도록 할 것이니 철저히 준비하고 오라.”

훤은 어린애 마냥 신난 표정으로 냉큼 일어나 침전으로 달려갔다. 방금까지 위엄 있던 왕의

모습은 간 곳 없었다. 그 뒤를 운과 내시관들이 따랐다. 침전 앞에 어두운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염을 발견하자 훤은 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염은 훤을 발견하고 읍(揖, 두 손을 맞잡아

들고 허리를 공손히 구부렸다가 펴면서 두 손을 내리는 인사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훤의 손에 두 손이 덥석 잡히고 말았다.

“왜 이제야 왔소. 한양에 돌아왔단 기별은 며칠 전에 받았는데. 그리도 얼굴 보여주기 싫었소?”

“아니옵니다. 여행에서 몇 권 얻은 책을 보느라 그만.”

훤은 염을 강녕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운도 같이 들어가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염은 운과 눈이 마주치자 특유의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인사를 보냈다. 운은 아주 조금 고개를

움직여 인사를 했다. 염이 네 번의 절을 하자 훤도 세 번의 절을 했다. 염이 만류해도 훤은

고집으로 세 번의 절을 끝냈다. 염이 당황하여 말했다.

“어찌 이러시옵니까?”

“내 아무리 군주이나 스승의 예는 아는 사람이오. 그대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 아니시오.”

“소신은 잠시 머물렀을 뿐이옵니다.”

“비록 잠시이나 더 오래 나를 가르친 그 어떤 스승보다 나는 그대에게 많이 배웠소. 현재 나의

생각 모두에 그대의 말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소이다.”

훤이 한참 말썽 부리던 세자 시절, 염은 전왕의 어명으로 세자시강원(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기관)의 문학(정 5품의 세자를 가르치던 직책중 하나)에 제수 받았다. 그렇게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염은 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상감마마께오서 강녕하시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훤도 염의 미소에 마음이 상쾌해 졌다.

“내가 정사를 처리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이는 아바마마가 아니라 바로 그대요. 그대의

바로 이 미소. 그리고 가장 무서운 사람도 바로 그대요.”

염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훤은 그 모습이 안타까운지 조용히 말했다.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백성이어야 한다는 말을 왜 아니하는 게요. 난 그대의

청량한 목소리가 듣고 싶소.”

“신, 의빈이옵니다. 어찌 입을 명하시옵니까?”

“난 아직도 아바마마를 이해할 수가 없소. 그대의 능력을 누구보다 귀히 여기던 분이 아니시오.

그런데 어찌 의빈으로 간택하셨는지······. 의빈이 되지 않았다면 그대는 지금 뛰어난 재상이 되어

나를 보필하고 있을 터인데. 나를 꾸짖어 가며 힘이 되어주고 있을 터인데. 아니면 학문의

발전을 이루었던가······. 생각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이오.”

염은 여전히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주안상이 들어와 둘은 잠시 말을 중단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훤이 물었다.

“여행은 즐거우셨소?”

“상감마마의 성택(聖澤, 왕의 덕택)으로 즐거웠사옵니다.”

“한 달 전이었나? 연우낭자의 기일이······.”

염은 들던 술잔은 다시 소반 위에 올려 두었다. 흔들리는 촛불 속에 염의 표정도 흔들렸다.

훤이 슬픈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그래서 그대가 여행을 떠난 것이리라 생각하였소. 아직 가슴에 있으니······.”

“상감마마께옵서 어찌 아직 그 이름을 기억하시옵니까? 구중(口中, 왕의 입)에 담아서는 아니

되는 이름이옵니다. 이제 세상에 없는, 차가운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제 누이의 이름을 어찌

아직······.”

술을 한 모금 머금은 훤의 입술에 경련이 일 듯 미세하게 떨렸다.

“나에게 그 이름을 잊으라 하는 것만큼 잔인한 건 없소. 연우낭자는 나의 정비(正妃)였소.

나의 유일한 정비.”

하늘의 달은 손톱자국만 남겨놓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훤은 술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달을

마셨다. 하지만 눈을 들어 하늘의 달을 보진 않았다. 하늘에 떠있는 사라질 듯 가녀린 달을 보는

이는 유일하게 운뿐이었다. 염은 어느새 평정을 찾았는지 다시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훤의 표정은 그 옛날의 시간에 발목 잡혀 참담하게 굳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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