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3화 (3/47)

#3

“상감마마의 옆이 아니라 정확히는 상감마마의 침수 드신 옆이오. 한 달 동안 상감마마께옵선

아가씨가 옆에 다녀간 줄도 모르실 것이오. 아니, 모르셔야만 되오.”

한참을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장씨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쓱 훑고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하이고, 날씨 하나는 징그럽게 좋소. 울긋불긋 단풍도 청승시리 곱구. 지 아무리 곱디고운

단풍이라고 하나 상감마마의 안정(왕의 눈동자)에 들어 있는 아가씨만큼 곱것수?”

어두운 방안에 있던 월도 눈으로만 단풍을 보았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단풍은 눈에만 비춰질

뿐 마음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장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숨을 밖으로

토해내도 속 갑갑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가씨. 궁궐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시오?”

“네,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온양행궁 옆에 있던 휴 지역에 있는 것과는 틀리오. 그곳엔 그저 아가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상감마마의 옥체를 해하는 살(殺)과 액(厄)을 밟아 누를 수 있지만, 상감마마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살과 액을 아가씨가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오.”

“소녀 건강하기에 아무 탈 없을 것이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오. 흐트러져 있던 상감마마의 옥체의 기가 제자리를 잡으면······.

그렇게 되면······.”

“그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중전마마와의 합방을 위해 아가씨가 들어가는 거란 말이오. 기를 제자리에 찾게 하여

중전마마와 합방토록 하기 위해, 그래서 어서 원자아기씨를 보게 하기 위해 아가씨가

필요한 거란 말이오.”

“어서 원자아기씨를 보셔야지요. 그래야 종묘사직이 튼튼해지지 않사옵니까?”

월이 방긋 웃으며 말하자 장씨는 기가 막힌지 허허 거리며 웃었다.

“좋기도 하것수. 자신이 옆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고 한 달을 보낸 뒤, 다른 여인과

합방하는 꼴을 보고 퇴궐을 해야 하는데······. 퍽이나 웃음도 나오것수. 내 가슴이 다 쓰린데.”

“소녀, 비오는 날 밤의 만남에 마지막을 두었습니다. 그러니 쓰릴 가슴이 없사옵니다.”

여전히 미소로 말하는 월의 얼굴이 보기 싫었던지 장씨는 원망어린 눈길을 하늘로 뿌렸다.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마지막은 마지막이 되지 못하오. 그리고 아무리 아가씨 입으로 마지막이

라고 하여도 상감마마께옵선 처음이라 하시었으니······. 왜 하고 많은 것들 중에 하필 달이라

이름하셨는지. 이 염병할 놈의 사명지신(운명을 관장하는 신) 같으니!”

월은 마치 남의 일인 듯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신께 욕을 하는 이는 신모님뿐일 것입니다.”

웃는 월 대신 그 몫만큼 한탄을 담은 목소리로 장씨가 말했다.

“힘들 것이오. 울어서도 안 되고, 말해서도 안 되고······. 그리움과 서글픔에 지쳐죽어도 죽어서도

안 되고. 차라리 죽느니 만도 못한 일일 것이오. 그래도 가보시겠소?”

한동안 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씨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어떤 슬픔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월이었다. 왕이 잠든 모습을 그저 눈으로만 보고 있어야 하는 슬픔, 자신의 존재를 알려선

안 되는 슬픔, 다른 여인을 안게 하기 위해 왕의 기를 다스려야 하는 슬픔, 그저 무녀여야만

하는 슬픔. 월은 이러한 슬픔은 땅 아래로 낮추고 서글픈 미소만 하늘 위로 높이며 말했다.

“이젠 아니 갈 수 없습니다.”

“그래, 보고 오슈. 원껏 용안을 뵙고 오슈. 눈에, 가슴에 가득가득 품고 또 품어 그대로 죽어도

한없을 만큼 품고 오슈.”

“신모님, 죄송합니다. 소녀의 욕심이 과하여 이리 된 듯 하옵니다.”

오히려 따뜻하게 위로하는 월 때문에 장씨의 가슴은 더 아팠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어번 치며 말했다.

“이 잡것의 가슴이 메여 미치것소. 인연으로 묶이는 게 무서워 이름하지 않았더니 그 아가씨란

말이 이름이 되어 버렸는 갑소. 별별 사내놈이 내 밑구녕에 거시기를 쑤셔 박아도 애새끼 하나

내 몸에서 뽑아내지 못하였는데, 밑구녕으로 뽑아내지 못한 신딸에게도 모성애란 것이

이어지는가 보오. 아가씨의 가슴앓이가 이 잡것에게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을 보면······.

다 내 죄야.”

“한 달만 있다가 올 것입니다.”

장씨는 몸을 돌려 방안에 앉아 있는 월의 손을 잡아 쥐며 단단히 당부했다.

“딱 한 달만 이어야 하오, 딱 한 달! 그 이상 지체하면 큰일 나오.”

월의 손을 쥔 장씨가 느끼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월로서는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매일을 술과

더불어 고통 속에 지내고 있는 장씨를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월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장씨는 급하게 분위기를 바꿔 최대한 털털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설이 년은 또 어딜 싸돌아다니는 게요?”

“잠시 여행 다니러 갔습니다.”

“쯧쯧. 또 숨어 보러 간 게로군. 팔자에도 없는 역마살이 낀 겐지, 원.”

이렇게 거칠게 말해도 설을 걱정하는 장씨의 마음이 느껴져 월은 조용히 미소로 말했다

“자유로운 품성을 지닌 여인입니다.”

“흥! 한곳에 매인 마음을 지녔는데 무슨 자유로운 품성이란 말이오? 그 집착하는 마음이 그년의

숨통을 조일게요. 가엾은 년 같으니! 계집주제에 뭐 하러 검을 쥐어서는. 하긴, 여자란 자고로

바늘을 쥐어야 하는데 검을 쥔 설이 년이나 책을 쥔 아가씨나 팔자 더럽기는 매한가지지.”

월에게서 정표로 빼앗듯이 받아 온 둥그런 보름달이 다시 훤을 찾아왔다. 건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아 제대로 나라일은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두고라도 오래 앉아 있으면

숨이 가쁜 것만 해결되어도 천추전(사정전, 만춘전과 함께 왕의 집무실. 온돌이 깔려 있어서

주로 가을, 겨울에 업무를 보던 곳.)에라도 나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고, 그 화가 또 다시 숨 가쁨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나라일을 돌보지 못하면 현재

국구(國舅, 왕의 장인)인 파평부원군 일파가 조정을 마음대로 유린하기 때문에 훤의 마음은

조급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근 한 달 동안 훤이 하루에 처리한 문서는 고작 한두 개에 불과했다.

하루 쏟아지는 공문서와 상소문, 탄원서들을 다 합하면 수백 개에 달하는 분량이기에 하루에

한두 개 정도라면 거의 일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나머지 문서들은 분명 파평부원군과

그 일파가 다 처리했다는 뜻이고 이는 곧 조정이 파평부원군의 조정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훤이 한 달 전 온양행궁으로 온천욕을 가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건강이 나쁘지 않았다. 온천욕을

가게 된 것은 순전히 훤의 핑계였다. 경복궁에만 갇혀 있다 보니 궐 밖 백성들의 형편을 알 수가

없었다. 행궁은 그나마 빠져 나가기 쉬웠으므로 온천욕을 고집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건강이

좋아지라고 갔던 결과가 경복궁에 돌아오고 난 뒤부터 급격히 나빠지고 만 것이다.

병의 원인조차 내의원에서 알아내지 못하자 주위에서는 귀신이 쓰인 것이라 수군거리는

사람들까지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밤만 되면 하늘의 달을 보며 우울해

하는 왕이 정상으로 보일 리는 만무했다.

보름달과의 재회가 반가워 훤은 오늘도 경성전 안의 달이 잘 보이는 방에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술도 마시고 싶었지만 내시관들 전원이 오늘따라 무릎 꿇고 앉아 강력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포기해야만 했다. 창 밖에 운이 버티고 서자 왕은 더욱더 애처롭게 달을 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운이 들으라는 듯 한숨과 같이 원망하는 말도 내쉬었다.

“달은 이지러졌다가 사라진 후 다시 저리 나에게 돌아왔는데, 정작 와야 할 달은 오지

아니하는구나.”

주위의 누구도 월에 대해 아는 사람 없이 오직 운만이 알고 있는데, 운은 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귀찮아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창 밖에 서있기만 했다.

운마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월은 정말로 귀신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었기에 맞장구를

쳐줬으면 하는데도 워낙에 말수가 없는 운이라 거의가 혼잣말로 끝나버렸다. 또 다시 숨이

가빠왔다. 훤은 갑갑함에 창밖으로 팔을 뻗어 뒷모습을 보이며 서있는 운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나를 좀 봐다오. 그리 등을 보이며 서 있지 마라. 너도 달을 보았지 않느냐. 나와 같이······.

너도 보았잖느냐?”

운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훤을 보았다. 하지만 답은 간단했다.

“네. 보았사옵니다.”

“어땠느냐? 네가 본 달은 어떻게 생겼더냐? 헛것은 아니었더냐?”

꿀을 머금었는지 입을 봉합한 운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무엄한 놈. 세조대왕 때, 종부시 첨정 최호원이 임금 앞에서 말하지 않았다 하여 옥에 갇힌

것도 모르느냐? 내가 성군이었기 망정이지 다른 임금이었다면 넌 옥에만 살아야 할 것이다.”

훤의 협박을 받고도 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달빛을 반사하는 왕의 하얀 야장의가 눈이

부셨다. 그때 보았던 월의 소복이 생각나 운은 다시 몸을 돌려 섰다. 왕에게 등을 보여도 되는

인간도 세상에 유일하게 운검뿐이었다. 돌아선 하늘엔 정표로 받지 못한, 감히 청해보지도 못한

달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달을 정표로 가진 건 왕이었다. 운의 뒷모습에라도 말을 걸어 월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 하는 훤에게 상선내시관이 차를 가져왔다.

방안 가득 강렬한 국화향이 메워졌다.

“무엇이냐?”

“내의원과 관상감에서 올리는 차이옵니다.”

“다방(茶房, 조선시대 궐내 차를 관리하던 곳)에서 올리는 차가 아니라면 맛없겠군. 고작 그것

때문에 그리도 술을 못 마시게 하였구나.”

내의원이란 말만 들어도 왕은 차 맛이 쓰게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약이라면 질릴 만큼 먹고

있었다.

“그것 안 마셔도 오늘부터 관상감에서 부적을 쓸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먹기 싫은 탕제도

꼬박꼬박 불평하지 않고 잘 마시는데 그것조차 내가 꼭 마셔야 하느냐?”

상선내시관이 거의 사정하듯이 왕에게 말했다.

“꼭 드셔야 하옵니다. 그래야 부적이 효과가 있다 하였사옵니다. 차향은 쓰지 않고 오히려

향기로우니 탕제와는 다르옵니다.”

향기롭다는 말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훤은 찻잔을 받아 들었다. 생각과는 달리 달콤한

국화향이 났다. 맛도 좋았다. 훤은 차향 덕분인지 편안한 마음이 되어 달구경을 할 수 있었다.

“운아, 참으로 바쁜 달이지 않느냐? 어찌 꿈길로도 한번 찾지 아니하는지······.”

여전히 운은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간혹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으로 그 움직임이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피식거리며 훤이 웃기 시작했다.

“나도 이상한 인간일세. 잠깐 어두움 속에 보았던 얼굴에 이리도 속상해 하다니······. 정녕 정상은

아닌 게야. 생각해보면 이해도 되느니. 잠시 비만 피할 수 있도록 지붕만 빌려줬던 나그네가

무에 그리 보고 싶겠느냐. 임금이라 내치지 못하는 마음이 더 힘들었을 것이야. 그 정도 되면

마음 정해 둔 정인이 분명 있었을 것인데 임금이 같이 가자 하니 감히 싫다 못했겠지. 그래서

그 다음날 바로 정인과 같이 나를 피해 달아났을 것이야. 운아, 내 생각이 맞지 않겠느냐?”

“모르겠사옵니다.”

뒷모습 그대로 감정 없는 목소리만 들렸다. 훤은 자신의 말에 속이 상해 괜히 운에게 서운함이

뻗혔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해야 되겠지. 운아, 포기하기 전에 딱 한번만 더 온양에 다녀오너라. 마지막이다.”

“알겠사옵니다.”

“아, 아니다. 관둬라. 더 이상 너를 멀리 보내는 것도 대신들 눈 때문에 안 되겠다.”

“알겠사옵니다.”

딱 부러진 운의 대답에 다시 번복하기도 멋쩍었다. 말과는 달리 마음에선 완전히 포기가

되어지지 않는 것도 우스웠다. 하지만 더 이상 달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힘들지만 이제는

애써 잊도록 노력해야 했다.

“운아, 걱정마라.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달타령은 없을 터이니. ······오늘따라 달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커 보이는구나.”

차를 다 마시고 잠시 앉아 있으려니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차 때문이었지만 훤은 그 원인을

알지는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다행히 오늘밤은 이 방에서 잠들어도 되었기에 그대로

다반만 밀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지밀상궁이 조심스럽게 다반을 거둬갈 때 쯤 이미 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평소 잠자리에 들어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던 것과는 달랐다.

그 이상함을 느낀 건 운이었다. 지밀상궁이 물러나오는 다반을 낚아채듯이 잡은 운은 찻잔의

향기를 맡아보았다. 경성전 밖에 서서 다반이 물러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내의관이 놀라서 말했다.

“뭐하시는 겁니까? 단지 차일 뿐입니다.”

“차란 것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살맹이씨와 측백씨등을 넣어 귀잠(깊은 잠)을 드리는 차입니다. 그래서 불면증에 쓰는

약이기도 합니다. 감히 이상한 것을 올리겠습니까?”

“분명 향기롭다 하시었습니다.”

“황금빛국화가 들어갔으니 당연합니다. 요즈음의 탕제 때문에 자칫 비위가 상할 수도 있는

약제들이라 국화향으로 그것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약효를 높였습니다.”

“약제를 쓰면서까지 귀잠에 드시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관상감의 일이라 전 잘 모릅니다. 부적쓰기 위해서 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관상감 교수들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올곧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왕의 운명과 직결된

분야를 다루는 관서이기도 하기에 경계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내의관이 물러가자 음의 기운을

불러들이는 인경의 종소리가 멀리서 퍼지기 시작해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울렸다.

인경이 울리면 관상감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향오문 쪽으로 눈을 두고 있었다.

밤하늘을 지키는 28개의 별자리에 밤사이의 평화를 기원하는 28번의 종소리가 끝나자 관상감의

명과학교수와 하얀 쓰개치마를 쓴 여인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운은 칼집을 잡은 왼손을 앞으로

두고 오른손으로 바로 칼을 뽑을 수 있게 칼자루를 쥐었다. 여인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운의

기분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강녕전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을 먼저 막아선 건 내금위장이었다.

“어느 누가 궐내에서 쓰개치마를 쓴단 말이냐!”

명과학교수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특별한 경우라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긴 사람이 아니라 부적일 뿐입니다.”

“부적이라니? 내 눈엔 분명 사람으로 보인다!”

“부적에는 종이 위에 붉은 글을 쓴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도 있고, 입는 것도 있고,

단순한 금붙이 하나도 부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중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지금 상황에선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인간부적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액받이무녀라 불리는······.”

“네, 그러합니다.”

“어디 소속의 무녀냐? 동서활인원이냐?”

“아닙니다. 성숙청 소속의 수종무녀입니다.”

성숙청이란 말에 내금위장은 얼굴색이 바뀌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대비전의 비호 아래에

있는 성숙청을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 무녀들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운은 성숙청에 겁을 내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로 다가가 재빨리 칼집 채로

쓰개치마를 힘껏 걷어내었다. 칼집 끝에 쓰개치마가 휘리릭 감기며 무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운의 몸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상한 예감대로 월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던

것이다.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신 달빛을 품어내던 월이 칼집에 감긴 쓰개치마를 걷어 팔에

걸치며 눈길은 달을 향해 말했다.

“구름이 달을 가리는 폼새가 참으로 어여쁘기도 하옵니다.”

여전히 마음에 진동을 일으키는 목소리였다. 칼을 잡은 운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은

월이 운에게 하는 말이었다. 왕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간청이었던 것이다. 어지러운 마음을

어찌 할 수 없었던 운은 괜한 노여움을 땅으로 보냈다. 곁을 스쳐 지나는 난향이 어지러운

마음을 더욱 괴롭혔다.

월은 자그마한 짚신을 벗고 강녕전에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짚신을 월대(月臺) 아래의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비천한 자의 신은 감히 월대 위에 올려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월은

궁녀 두 명과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왔다. 몸에 혹시나 왕에게 해가 될 것을

지녔는지 검사한 것이었다. 상선내시관이 나와서 월을 훤에게로 인도했다. 강녕전에서

천랑(穿廊)을 거처 경성전으로 들어서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많은 문들을 지나쳐 몇 개의

방을 거쳐서야 왕의 침소에 다다랐다. 월에겐 왕에게 절을 올릴 수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침소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왕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여 방바닥만을 보면서

왕이 잠든 곳까지 다가갔다. 허락도 없이 왕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불경죄로 극형에 처해지는

것이기에 상궁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주 가까이에서 모시는 궁녀라고 할지라도 왕의 얼굴을

모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훤의 이불에서 한 자 가량 떨어진 곳에 월은 다소곳하게 앉았다.

월이 자리하고 앉은 것을 보고 난 뒤에 상선내시관은 옆의 방으로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방과 방 사이에 두 칸의 문만을 열어둔 건너편에 내시들과 궁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고, 뒤따라 운이 방으로 들어와 멀리 앉았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고 나서야 월은

몰래 눈길을 왕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눈길에는 제일 먼저 옆의 훤의 고운 손이 들어왔다.

그리고 숨 쉴 때 마다 들썩이는 금실로 수놓아진 붉은 비단 이불이 들어왔고, 새하얀 야장의가

들어왔고, 아침까지 깨어나지 않을 훤의 얼굴이 힘겹게 눈에 들어왔다. 감히 다 담을 수없는

보고픔에 잠시 눈길을 접었다가 다시 훤의 얼굴을 눈길로 쓰다듬었다. 입술을, 콧날을, 이마를,

그리고 뜨지 않을 두 눈 위를, 행여 눈빛에라도 얼굴이 상처 입을 새라 조심스럽게 머나먼

눈길로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멀리 앉은 운의 눈에는 월이 들어왔다. 달빛을 머금은 하얀 소복이 들어왔고, 세운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포개 얹은 고운 손이 들어왔고, 가느다란 긴 흰 목을 지나, 입술과 콧날을 지나,

왕만을 보고 있는 물기어린 눈길이 들어왔다. 운은 그동안의 수많은 물음들을 창에 어렵사리

비친 달그림자 아래에 묻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창밖의 하늘엔 한 달 전에 보았던 둥그런 달이

떠있었고, 구름 한 점이 다시 본 보름달이 반가운지 입을 다문 채 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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