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슬비가 내렸던 그 밤의 둥글었던 달이 차츰 부피를 줄여 그 모습을 감춘 밤, 운은 구군복을
갖춰 입고 입궐했다. 일반 구군복이 황색의 옷에 소매는 붉은 색 천을 붙인 협수(소매 폭이 좁은
두루마기 형태의 군복)위에 검은 색 전복을 입은 것 이라면, 운검의 구군복은 이와는 달랐다.
검은색 전복은 같지만 그 아래에 소매까지 검은 협수를 입고, 검을 휘두를 때 펄럭이지 않게
팔뚝부분을 붉은 색 끈으로 칭칭 둘러 묶고, 날렵한 허리엔 붉은색 대자띠를 묶어 늘어뜨렸다.
그리고 관례를 치렀음에도 검에 상투가 다치지 않게 상투를 틀지 않고 길게 허리까지
내려뜨리고는 이마에 붉은 천으로 두건을 묶어 뒤로 머리 길이까지 드리웠다.
전립(사또 모자)을 쓰지 않고 궐내에 들어오는 것은 법도가 아니었지만 운검에게만은 그것이
용인되었다. 그리고 등엔 붉은 색 긴 환도인 운검을 지고 왼손에는 검은색 긴 환도인 별운검을
들고 걸어가면, 그 등에는 용을 감싼 구름문양이 둥근 흉배 안에 붉은 색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이 날리는 윤기 있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였다. 이것이 운검의 표식이었다.
왕의 침전 영역으로 가는 길목인 향오문(嚮五門)에 이르자 선전관청(宣傳官廳, 침전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관청으로 왕의 경호, 긴급한 군사소집, 왕명 전달 등의 업무를 맡았던 곳)에서
나온 당상관이 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은 운검임과 동시에 선전관청 소속인 무겸선전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갑사들이 운에게 인사를 하자 운은 당상관에게 인사를
올렸다. 당상관은 품속에서 밀지(密旨, 왕의 비밀 명령)를 꺼내 운에게 건넸다. 왕이 신시(申時,
오후 3시부터 5시) 경에 반드시 해야 되는 의례적인 일 중의 하나가 궁궐에서 야간경비를 서는
군사들과 장교에게 암호를 정해주는 일이었다. 그 암호는 매일 달랐다. 그리고 암호를 정하던
자리에 운검이 없었다면 운검에게 이렇게 밀지를 적어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운은 밀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밀지에는 왕과 운만이 읽을 수 있는 선과 점으로만 된 암부호로 적혀있었다.
밀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밤의 군사 암호와 왕이 잠자게 될 곳이 적혀있었다. 운이 밀지를
로의 불속으로 넣어 태우자 당상관이 속삭이며 말을 걸어왔다.
“오랜 만에 입궐하였소. 안 보여도 분명 어명으로 자리를 비운 거겠지만 말이요.”
“쉬었습니다.”
“원, 사람도. 어찌 그리도 빡빡하시오. 나에게 까지 그리 입을 다물 필요는 없소이다.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하하하. 요즘 군사 암호가 다 그런 식이오. 상감마마께옵서 뭔가가
심란하신가 보오.”
오늘의 군사 암호는 일고일(一孤日, 외로운 태양 하나)이었다. 운은 이 암호가 훤이 자신에게
호소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운은 그동안 근 보름을 월을 찾아 백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오늘도 못 찾았다는 보고를 하러 입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암호로 마음
무거운 운을 독촉하고 있었다. 당상관이 침묵하는 운을 두고 다시 말했다.
“그간 상감마마께옵서 자네를 보호하시느라 성후 미령하시었소. 그러게 왜 온양행궁까지
요양하러 가셔서는 미행을 빠져나가신 게요. 보좌를 잘못한 자네를 파직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폐하시느라 더 미령하시었단 말이오. 앞으론 안위를 위해서라도 조심 좀 하시오. 그대 안위를
돌보는 것이 곧 상감마마를 윗잡는 일임을 아시오.”
운이 간단히 고개만 숙여 인사 한 뒤 침전 쪽으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당상관이
중얼거렸다.
“아까우이. 서출만 아니면 사위 삼으면 딱 좋겠구먼. 반가의 여식과 서출은 혼인하면 안 된다는
법도가 엄연히 있으니.....쩝. 저렇게 잘났으니 궁녀들이 사흘이 멀다하고 상사병으로
죽어나간다는 말이 나돌지. 그럼 뭐하누, 빙운(氷雲, 얼음구름. 운의 별명)인 것을.
빙운을 가슴에 품은 여인들만 가엾지.....”
운은 밀지에 적어둔 곳으로 갔다. 왕이 잠자는 곳은 경호와 풍수, 역학의 목적으로 인해 매일
밤 달라졌다. 왕의 대침전인 강녕전, 동소침전인 연생전, 서소침전인 경성전 안에는 모두
합하면 수십 칸에 달하는 방들이 있었는데, 이 많은 방들 중에 왕이 그날 밤 잠들게 되는 곳을
아는 사람은 방을 정해주는 관상감의 교수 세 명과 당직을 서는 내시 몇 명, 궁녀 몇 명 그리고
운검뿐이었다. 나머지 궁녀들과 내시들은 왕이 어디에 잠든 지도 모르고 빈 방들을 지켰다.
그리고 궐내의 선전관들과 무예별감 군사들은 세 침전 전체를 경호했다. 운은 훤을 발견했다.
밀지에 적힌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있었던 것이다. 훤은 창을 전부 활짝 열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운을 발견하자 미소를 던졌다. 운은 훤이 앉아 있는 창 쪽으로 갔다.
“어찌하여 이곳에 계시옵니까.”
“나의 달을 보고 싶어 이리 자리하였느니. 아무리 내 것이라 우겨도 하늘도 자기 것이라 우기니
내가 어찌 하늘을 이길 수 있겠느냐. 하늘이 심통 맞게도 나와 달을 나누기조차 싫었는지 저리
감추어 버리고 말았구나. 그나마 자네가 나에게 달을 가져다 줄 걸로만 믿었는데.....”
이 말은 월을 찾아내지 못함을 질책하는 것이었기에 운은 머리를 조아리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선내시관은 훤이 월이 아니라 하늘의 달을 말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 운의 편을
들어준답시고 말했다.
“그 아무리 운검이라 하여도 그믐달을 보름달로 바꿀 수는 없사옵니다. 상감마마, 침수에
드셔야 하옵니다. 잠시 후에 인경(궐내의 밤 10시를 알리는 종소리. 28번을 침. 종소리를
기점으로 통행금지에 들어감)의 타종이 있사옵니다.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훤은 안 들은 척 술잔을 들어 입에 기울였다.
“내 울금초로 향을 낸 술을 들이라 일렀건만 우상(羽觴, 깃털처럼 가벼운 술잔)에 담겨진 건
그저 울금향뿐이다. 그때 마신 건 울금향도 아니고 난향도 아닌 달향이었던 겐가....”
다른 맛, 다른 향기에 의해 술을 마실 때 마다 그리움은 더 깊어졌다. 알 수 없는 병으로 건강이
나빠져 오래 앉아 있으면 숨이 가빠왔지만 울금향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가쁜 숨이
월을 생각하면 더 가빠졌다.
“운아, 안으로 들어오너라.”
운은 경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훤은 새하얀 야장의(왕의 잠옷) 차림으로 어깨엔 고비(호랑이
가죽)를 덮고 있었다. 운이 멀리서 절 네 번을 한 뒤 가까이로 다가가 앉자 훤이 주위를 향해
말했다.
“모두들 잠시 물러가라.”
내시들과 궁녀들이 창문과 3면의 방문들을 일제히 닫고 순식간에 물러났다. 훤은 술 한 잔으로
잠시 뜸을 들인 뒤 조용히 말했다.
“월이 하늘로 솟았느냐, 땅으로 꺼졌느냐. 어찌 찾지 못한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됐다. 거짓을 아뢰진 않는다 하여 놓고는 죄다 거짓말만 하다니, 당돌한 것! 정박령의
신세라더니 금새 집을 비워버리다니.”
울컥하는 숨이 차 올라왔는지 손으로 가슴을 쥐고 한동안 숨고르기를 하더니 애타는 마음으로
재차 확인했다.
“정말 없더냐?”
“그러하옵니다.”
“세간도 아예 없더냐? 책도?”
“그러하옵니다.”
“집은 있더냐?”
“집만 덩그러니 있었사옵니다. 그 근방의 관령들에 속해져 있는 무적(巫籍, 무당의 호적)을 모두
조사해보았사온데, 월과 같은 여인은 어디에도 없었사옵니다.”
훤은 화가 났지만 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역정을 내었다.
“대체 관령들은 어찌 무적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단 말이냐? 무적에 오르지 못한 무당은
무당짓을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법이거늘!”
“이상한 점이 있었사옵니다. 월이란 여인은 무속 행위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사옵니다.”
훤은 눈에 의문을 가득 담아 운의 뒷말을 재촉했다. 운이 다시 말했다.
“그 근방의 마을과 백성들 중에 월이란 여인이 있던 그 집과 무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그런 곳에 집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사옵니다.”
훤은 기가 막히고 믿을 수가 없어 실소만 했다.
“허허. 내가 본 것은 그럼 무어란 말이냐. 정녕 귀신을 보았더란 말이냐. 밤에 한번 가보지
그랬느냐.”
“그곳에서 며칠 밤새웠사온데 나타나지 않았사옵니다.”
운은 뒷말을 삼켰다. 은은한 난향만이 남아있더란 말을 차마 할 수 없었기에..... 밤을 새며
기다리면서 귀신으로라도 나타나주길 바랬던 마음이 누구를 위한 마음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살 속을 파고들던 난향과 달빛으로 인해 마음 한구석이 아프면서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더란 말도 차마 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남아있던 난향을 맡지 못한 훤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구나. 하룻밤 스쳐지나가는 짧은 만남에 어찌 이리도 마음 깊이 생체기가
난 겐지.....베어서 두고 온 것은 내 기억이 아니라 마음이었구나....귀신에 홀려 빼앗겨
버렸어.....월아, 귀신이라면 한이 맺혀 모습을 보인 것일 터인데 어찌 나에게 억울한 사연 하나
들려주지 않은 것이냐.”
훤의 애달픈 마음을 위로하듯 멀리 궐내 보루각(조선시대 표준시간을 알려주던 기관, 자동알림
장치가 되어 있었음)에서 시작한 인경의 종소리가 도성의 4대문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더불어
한양 전체에 퍼졌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온양근처의 어라산 기슭에 자리한 작은 초가집 마당에, 낡은 옷을 입은 나이 든 여인이 눈이
부신 듯 손으로 눈 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보다가 소리쳤다.
“야, 잔실이 이년아! 마당에 깔아두라는 멍석은 왜 안 내오고 지랄이야?!”
열대여섯 먹은 여아 하나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오늘따라 무녀님 심술이 하늘을 찌르것시유. 월케 이년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어유?”
“이년이?!!”
장씨는 말대꾸하는 잔실이를 팰 몽둥이를 찾기 위해 마당구석을 부리나케 헤맸다. 하지만
몽둥이를 찾는 것보다 멍석을 까는 잔실이의 행동이 더 재빨랐다. 멍석을 까는 내내 잔실의
입은 계속 쫑알거려대었다.
“대체 멍석은 왜 깔라고 그러시는 거유? 망령이 난 게쥬?”
“주둥이 꿰매고 술상이나 차려와, 이년아!”
“술상이라뉴? 또 술드실라구유? 작작 좀 드시지, 작작 좀!”
“저년 저 입은 어째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불거릴까 몰러. 나만 마시려는 게 아니라 손님상을
보라는 게야! 네년 혓바닥 뽑아버리기 전에 어여 술잔 세 개 준비해 와.”
잔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손님이 오시는 건 어찌 아시는 게유. 신력이 다 했다믄서 그런 건 또 어찌 아시구....
괜히 술 드시고 싶으신께 거짓부렁하시는 게지유?”
장씨는 기어이 마당 구석에서 몽둥이 하나를 찾아 들고 잔실이에게로 달려들었다.
“내 오늘 손님 치르기 전에 네년 장례부터 치러야 되것다. 일루와 이년아!”
장씨가 잔실이를 붙잡아 몽둥이를 내리치려는 순간 점잖은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허~! 장씨도무녀, 성질 여전하시구려.”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에 늘어뜨리고 긴 지팡이를 짚고 있는 혜각도사였다. 그리고 그 옆엔
관상감의 관리인 첨정영감이 서 있었다. 잔실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워매, 참말이었구만유. 언능 술상 봐올게유.”
잔실이 부엌으로 달려가자 장씨는 몽둥이를 마당 멀리 던지고는 옷을 털털 털며 말했다.
“왔으니 거기 멍석에 앉으시오. 그닥 보고 싶지 않은 낯짝들이지만 왔으니 봐드려야지.”
장씨가 눈빛 사납게 노려보자 첨정영감은 겁을 먹고 혜각도사 뒤에 주춤거리며 몸을 숨겼다.
장씨도무녀라고 하면 최고의 신력을 가진 조선의 머리무당이었다. 그중에 으뜸 실력은 바로
주술이었기 때문에 알만한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두려워했다. 게다가 오늘
이렇게 찾아온 목적을 이미 꿰뚫고 있는 것 같아 첨정영감은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혜각도사가 먼저 자리 하자 첨정영감도 그 옆에 엉거주춤 앉았다. 장씨는 술상이 멍석에
놓아져서야 자리를 잡고 앉아 입을 열었다.
“이 관리 양반은 뭐 하러 달고 왔소? 이보슈, 관리 양반. 뭐 아는 거라도 있소이까? 교수들이
와도 대화가 될까 말까구먼.”
“관상감의 교수들은 궐 밖 출입이 엄금되어 있는 거 모르시오? 대화를 나누자고 온 것이 아니라
명령을 전달하러 온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리고 교수들보다 내가 품계가 더 위임에도 이리 온
것은 그만큼 도무녀님을 대우하는 차원에서...”
“흥!! 이 잡것 앞에서 품계를 입에 담으시오?! 난 꼭두각시 앵무새완 나누고픈 말이 없수다!
교수들 보고 여기로 와서 직접 사정하라 이르시오!”
관상감의 교수들은 모두 천수(천문학교수), 풍수(지리학교수), 역학(명과학교수)에 있어서 각각
일인자들을 말했다. 첨정보다 품계가 아래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실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품계가 위인 관리들이 아니라 바로 교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궐밖에 함부로 나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와 함부로 만나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왕의 생년월일 난시, 사주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들뿐이기 때문이었다. 왕족들의 사주를 알고 있기에 만에 하나
새어나갈 것을 우려해 국가차원에서 이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이런 국법을 뻔히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장씨에게 혜각도사가 조용히 말했다.
“장씨도무녀, 그간 너무 오래 성숙청(조선시대 경복궁 내에 있었던 국가와 왕족의 무속(巫俗)을
행하던 관청)을 비워두었소이다. 교수들이 궐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무녀(성숙청에
속한 국무(國巫), 머리무당, 조선의 최고 무당)가 입궐해야 하는 것이오.”
“누가 도무녀랍디까? 난 때려치운지 오래되었소. 신력도 이미 다 되었고 이 무지랭이 같은
목숨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몸이오.”
“다 되었다는 신력조차 조선 제일이니 최고 신력의 도무녀를 두고 그 아래 신력을 국무로 삼는
예는 없소이다. 임시로 둔 도무녀는 현재 자리를 감당하기 힘드오. 다시 성숙청으로
들어오시오.”
장씨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며 말꼬리를 엉뚱한 곳으로 돌렸다.
“성숙청과 소격서를 몰아내고자 매일같이 상소해대는 유생들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오.
거기엔 우리가 발붙일 곳이 없수다. 혜각도사님도 소격서를 철폐하고 어디 산수 좋은 곳으로
들어가시오.”
“내 아무리 궐내가 싫으나 소격서를 버릴 수는 없소이다.”
혜각도사는 지금 비록 조선이 명나라에 비해 땅덩어리가 작아 힘이 미약해 사대를 하는
형편이긴 하나, 하늘의 아들은 명나라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비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마땅히 아들 된 도리이며, 소격서를 철폐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원구단을 없애는 것은 아비이신 환웅을 버리는 것이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명나라 황제뿐이며, 그 아래 제후국에서는 행해선 안 되는 행사였지만 이렇게 되면 바로
하느님의 아들 나라라는 조선이란 국호를 버려야 하는 것이 되었기에 힘들어도 소격서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첨정영감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흠, 어흠! 그런 얘길 하자고 이리 먼 곳까지 온 것이 아니잖소.”
“그렇겠지, 내가 목적이 아니라 내 신딸이 목적이겠지.”
장씨의 서슬 퍼런 눈빛이 첨정영감에게로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장씨의 입에서 독설 또한
쏟아졌다.
“그동안 휴(풍수학에서 살(殺)과 액(厄)을 대신 받아 상대를 살리는 지형) 지역에 내 신딸을
정박령마냥 박아두었던 것만으로 모자라 이젠 아예 내 놓으란 말이오? 그대들은 자식도 없소?!
내가 죽으면 제삿밥을 올려 줄 신딸에게 만에 하나 뭔 일이 생긴다면 난 누구에게 제삿밥을
얻어먹으란 말이오? 그대들 같으면 쉬이 내 놓으시것소?”
“잠시 빌려달라는 말이오. 한 달이면 되오. 큰일은 없을 것이니....”
“휴 지역에 가둬둔 것도 잠시란 것이 3년이란 세월이었소. 그나마도 20여일 전에 그 결계가
부서졌기에 벗어난 것 아니오? 또 다른 휴 지역을 알아볼 동안 잠시 쉬고 있는 아이를 궁궐
안으로 끌고 들어가야 쓰것소?”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는 장씨를 달래듯 혜각도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휴 결계가 부서지고 난 뒤에 상감마마의 성체가 급격히 나빠지시었소. 알 수 없는 병으로
내의원에서 조차 힘겨워 하고 있다오. 지금 현재로선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은 장씨도무녀가
더 잘 아실 것이오.”
“비록 한 달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때라면 모를까 하늘늑대별(천랑성, 서양에선 시리우스별
이라고 함)에 어둠이 덮인 이 시점에 내 신딸을 보내라니......”
천랑성이 어둠에 덮였다는 건 국운이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국운과 왕의 운명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장씨는 두려웠다. 국운이 나빠져서 신딸이 궁궐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딸이 궁궐로 들어가기 때문에 국운이 바빠질 거라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각도사가 술 한 잔을 비우고 말했다.
“어째서 휴 결계가 부서졌는지는 아시오?”
“내가 그걸 어찌 아오? 지리학교수는 아무 말 없었소?”
“그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였소. 아마도 만날 인연은 만나야 하기 때문이겠지....”
장씨의 눈이 날카롭게 혜각도사의 얼굴에 꽂혔다. 혜각도사는 그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말했다.
“달을 잡아당겨 계곡에 가둔다 한들 그 달빛마저 가둘 수 있겠소?”
첨정영감은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혜각도사를 보았지만 장씨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장씨는 태연한척 술잔을 잡아 술을 마셨다. 첨정영감이 쇄기를 박듯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장씨도무녀의 신딸이라고는 하나 그 신딸 또한 성숙청의 수종무녀로 무적에 올라 있소.
그러니 나라의 부름에 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 것이오.”
“삼일간의 생각할 말미를 주시오.”
“생각해봤자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대의 신딸만큼 주상과 합이 맞는 무녀는 없다 하니.
딱 한 달인데 뭐가 걱정이오. 그동안 무슨 일이 있겠소? 한 달만 지나면 예전처럼 새로 지정되는
휴 지역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것이오. 한 달 동안만 휴 지역이 아닌 주상전하의 옆에 있다는
차이뿐이오.”
“알겠소, 알겠으니 이만 가보시오.”
혜각도사와 첨정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한 뒤 돌아갔다. 장씨는 두 사람이 가고 난
뒤에도 멍석에 앉아 술을 마시고 안주삼아 한숨을 마셨다. 잔실이 뛰어와 술병을 빼앗아 허리
뒤로 숨기자 장씨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리 내, 이년아!! 나 오늘 술 먹고 죽을 뿔란다.”
“죽는 방법도 여러 가진데 우째 술 먹고 죽는 방법을 택하시남유? 가장 죽기 힘든 방법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유.”
“무노비 주제에 주인 알기를 우습게 알지.”
“저도 신딸이구만유. 근데 어찌 매번 무노비라고 하신대유?”
“무녀로 사는 것 보다 노비로 사는 게 훨씬 나은 거야, 이년아! 지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을
가지고, 쯧쯧...”
장씨는 허적허적 일어나더니 마루에 가서 털썩 앉았다. 한참을 하늘만 보고 앉아 있다가 긴
한숨 끝에 어두운 방안을 보고 말했다.
“아가씨. 들으시었소? 아무래도 아가씨가 궁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소.”
어두운 방안에서 기품 있는 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지 한달 동안만 휴 지역이 아닌 상감마마의 옆에 있는 것뿐이라지 않사옵니까?”
“상감마마의 옆이 아니라 정확히는 상감마마의 침수 드신 옆이오. 한 달 동안 상감마마께옵선
아가씨가 옆에 다녀간 줄도 모르실 것이오. 아니, 모르셔야만 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