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믹스커피
환자복을 입은 아이의 모습을 본 녀석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무슨?”
“동생 부부가 아직 말을 안 했나 보군요. 형제간 우애가 돈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쪽 조카가 페닐케톤뇨증이라는 희귀병 환우입니다.”
“페닐케톤뇨증이라면…… 설마…….”
“아, 이번에 신문 보셨나요? 상염색체 열성 유전 질환으로 선천성 아미노산 대사 이상이죠. 쉽게 말하면 체내 단백질 분해 효소가 없는 병입니다. 생후 1년까지 치료하지 않으면 IQ가 50이하로 저하되는 무서운 병이죠.”
“이걸 대체 어떻게?”
“세상일이란 게 참…… 엄청나게 운이 좋았어요. 조카분은, 이번에 저희가 주관한 우량아 선발대회에 출전했다가 우연히 발견했지 뭡니까. 조금만 늦었어도 손쓸 수 없을 뻔했습니다.”
말문을 잊은 채로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강태준이 조용히 말했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잘 살 수는 없어요.”
그리고 얼마 후, 신문기사가 떴다.
-검차에서 담양분유 일가에 대한 구속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수고비로 전달한 자기앞수표랑 담양분유 임직원들의 명단이 공개되며 사회적 파장이…….
담양의 영업부장이던 박강수가 결국 담양의 사주를 받았던 자백을 했던 것이다.
“이런 거 보면 생각보다 세상이란 게 참 좁아.”
“그러게요. 누가 이렇게 연관될 줄 알았습니까. 그보다 담양 놈들 좀 골치 좀 썩을 거라네요.”
“그래? 뭐가 또 큰 게 터졌어?”
“이번에 공장을 급습했는데 하필 분유통에서 곰팡이균이 검출되었다지 뭡니까. 태그갈기를 하다가 딱 걸렸다네요. 덕분에 2개월 영업정지가 확실시된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담양은 영업정지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오히려 그건 악수였다. 전방위적인 압박에 자존심이 상한 판사가 되려 식품표시광고법상 규정을 들먹이며 기어이 영업정지를 때려 버린 것이다.
“진짜인가?”
“아마 이거 발표되면 조만간 주가가 반 토막 날 겁니다.”
“멍청한 놈들이구만. 로비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지 하필 출세랑 담 쌓은 말년 부장을 건드리다니 그래.”
“그래서 주가 떨어지기 전에 지분 일부를 정리했다는 소리까지 들리더군요. 아무래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벌충해야 할 게 많나 봅니다.”
“자업자득 아니겠나? 그보다 재고처리가 문제인데. 이거 장난 아니구만.”
쥐분유 혐의는 벗은 백경분유는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점유율 회복세는 생각보다 더뎠다. 담양이 주춤하는 사이 테라와, 대성 등 다른 업체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던 것이다.
여러모로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 밤샘을 거친 강태준의 눈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강태준을 본 춘삼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요새 얼굴이 좀…… 푸석푸석하십니다.”
“거, 입맛이 없네. 대충 샌드위치 정도로 때우긴 했지. 근데 광필이 니는 안 힘드냐?”
“술 마시는 거요? 일이라 생각하면 곤욕스럽지만, 솔직히 그냥 어울려주면 되는 거 아니요. 이상하게 요새 잘 받데?”
거래처와 밤새 술판을 벌이고 온 뒤라 피곤할 터인데도 얼굴이 백숙마냥 뽀얬다. 오히려 술을 마실수록 쌩쌩해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난 영업이 천직인가 보오. 책상 앞보다 술자리가 더 편해.”
“그거 부러운 체질이구만.”
“성은. 이거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 아닙니까?”
“시꺼. 니가 내 마누라냐. 그보다 뭐 마실 거 없냐? 달달한 거?”
“잠시만요.”
쯧쯧거리며 밖에 온 밖으로 나갔다 온 광필이가 커피를 타 왔다.
“자, 거, 여기 있수. 형님.”
“뭐야 안 어울리게?”
“내 현직이었어도 당번병은 안 했는데 고맙게 아시구려.”
“오, 황송하구만.”
가져온 커피를 입에 댄 강태준이 곧장 인상을 쓰며 먹던 액체를 뱉었다.
“야, 임마. 이게 대체 뭐냐?”
“아니 왜 그러오?”
“임마, 커피 하나 제대로 못 내려? 이게 대체 뭔 맛이야?”
“응, 그럴 리가 없는데?”
잠시 맛을 본 광필이가 컥컥거리며 커피를 뱉었다. 잠시 후 녀석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아 쏘리. 아 소금을 설탕인 줄 알고 넣었네.”
“이런 거 줘봐. 차라리 내가 타지.”
“안 그래도 되는데. 제가 다시 타 올게유?”
“싫다. 니한테 맡기느니 내가 죽지.”
강태준이 투덜거리며 손수 커피를 내리기로 했다. 그렇게 직접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구매한 원두를 가져와 내리려고 보니 하필 우유가 없었다. 기가 막힌 강태준이 물었다.
“아니, 무슨 분유공장 사장 냉장고에 우유가 없냐?”
“아 그거요. 상할까 싶어 다 창고에 넣어 뒀습니다. 요 앞에 목장 가서 가져올까요?”
“됐어. 쓸데없이 호들갑이야. 내가 타 오지. 뭐.”
“아, 사장님 그러실 필요는……”
“한번 시켜 놓고 얼마나 생색 부리려고. 됐다. 내가 타고 만다.”
냉동고에 도착한 강태준은 왜 그렇게 극구 말렸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창고 한가득 산처럼 쌓인 우유 재고가 쌓여 있었다. 뒤늦게 따라온 춘삼이가 무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게 다 재고인가?”
“분유로 만들고 남은 게 이 정도라…….”
“아예 버릴 건 아니고. 앞으로 치즈나 다른 제품으로 가공할 겁니다.”
“참나. 이거 보지 말라고 말렸구먼. 그래?”
‘내가 왜 목장을 쓸데없이 인수해서는.’
시간이 지나면 곧장 폐기될 상품들을 보니 골이 땡겨 온다.
절로 찌푸려지는 이마를 억지로 다잡은 강태준이 이마를 짚었다. 요새 주치의한테서 주름 생기니 인상 좀 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던 그로서는 영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니 갑자기 단 것이 땡겼다.
“그럼 일단 손 좀 빌려주겠나?”
“예…… 어떤 거 할까요?”
“생크림 좀 만들어 보려고. 이봐 광필이 너도 좀 도와라.”
“에또. 알았수다.”
멘탈을 다잡는 강태준에 눈치를 보던 광필이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했다. 잠시 후 수제 생크림이 완성되었다.
갓 내린 에스프레소에 설탕, 연유를 넣고 직접 만든 크림을 푸짐하게 얹어내었다.
그 위에 눈송이처럼 갈아낸 초콜릿 가루를 뿌리자 그럴듯한 비주얼이 되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자 들어봐. 강태준표 커피다. 아인슈페너라는 거지.”
“오오……맛나 보이네요. 외양도 고급스러운데.”
“한입 먹어 봐.”
첫입은 시원하고 뒷맛은 달찌근하면서도 씁쓸한 것이 꽤나 입맛에 맞았다.
“이거, 겁나 맛있는데요. 형님?”
“이야. 이거는 중독되겠네. 이게 뭐라고. 와……”
“내가 만들었지만 잘 만들었구먼.”
다들 호평인 분위기 속에 강태준도 어깨가 으쓱했다.
“스페인 놈들한테 직접 배운 거야. 여기 레몬 소금을 바르면 단짠단짠한 게 아주 끝내주지.”
“그러게. 이거 형님 상품화해도 될 거 같은데요?”
“허풍은.”
“진짜로요. 어차피 분유 재료는 재고 처리하기도 곤란했는데 이걸로 밀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의 기대감에 찬 눈빛을 보니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 보수적인 오재갑조차 긍정적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분유시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새 상품에 투자하는 게 오히려 파급력이 있을 거 같은데요? 분유시장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돌파구를 찾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예…… 어차피 우유 재고도 처치곤란인데 이걸로 재고 퉁 치면 바로 해결되지 않을까요?”
강태준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커피 사업에 뛰어든다니 솔직히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괜찮은 생각이다. 카제인을 비롯한 분유 재고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상황이고 설탕이나 연유도 충분하다. 비슷하게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소리 아닌가.
미국 남북전쟁시기에도 커피와 분유를 섞어서 졸인 것이 꽤나 인기가 있었는데,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마시면 커피가 완성되는 형식으로 인스턴트 커피이자 커피믹스 시장이다.
“좋아. 식품개발연구소 연구원들이랑 한번 믹스커피 시음해 보자고. 황금 배합 비율을 찾아야 어떻게 될 거 아냐.”
“그래, 복만이 니는 시음조로서 역할 좀 잘해라.”
“난, 하루 한 잔도 안 마시는데 말입니다. 무슨 제가 모르모트입니까?
“시꺼, 너처럼 잘 안 마시는 인간들 기호에 맞아야 제대로 성공한 거야…… 노 이사는 안주방장과 함께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메이커별 커피 가루를 사 오고, 분유랑 설탕도 준비하게.”
강태준이 직원들을 불러 모아 고지를 올렸다.
“재고로 남은 분유는 창고에 있으니 맘껏 사용하세요. 각자 자기 취향껏 혼합비를 정해서 시음해 보고 제일 황금 비율에 가까운 사람에게는 보너스 200%를 지급하겠습니다!”
“아 정말입니까?”
“대신 누구한테 도움을 받든 제한은 없습니다. 어디 재주껏 해 보세요.”
사내 공모 형식으로 커피 배합비 대회를 연 것이다. 강태준의 동기부여에 자극받은 직원들은 꽤나 많은 제안들을 쏟아 내었다. 그러던 중 노기철은 상품화에 돌입했다.
제품의 상용화에 앞서 진척을 확인하던 강태준은 다시금 홀쭉해진 노기철에 혀를 찼다.
“또 밥도 안 먹고 일하나? 왜 그래? 배합비 맞추기가 어려워?”
“아니요. 배합비야 조정이 가능하니 딱히 기술적으로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크림 지방이 문제입니다.”
“지방이 왜?”
“그게 그냥 섞을 때는 상관없는데 성분 자체가 동물성이다 보니 건조과정에서 맛이 확 변하더라고요. 게다가 가루가 물에 잘 안 녹아 덩어리가 지는 경우가 많네요.”
문제의 핵심은 건조기술의 부족이었다. 커피를 분말로 건조하는 과정에서 생크림이 품질 유지가 되지 않고 성분이 변성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어렵구만. 단기에 해결하기 어렵겠나?”
“좀 힘들 거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기계 설계 문제라는데 이게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찾기가 어렵네요. 분말화 전 단계가 문제인 거 같은데. 용액이 과포화되거나 침전이 일어나는 경우가 잦아서 안정화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강태준은 문득 하와이에서 먹었던 야자유로 튀긴 닭을 떠올렸다.
“동물성이라 산패한다면 식물성 지방은 어떤가?”
“식물성 지방이라면 어떤 거 말인가?”
“꼭 유당을 굳이 쓸 필요는 없지 않냐는 소리지. 라면 같은 데도 팜유를 쓰잖아. 버터 대신 마가린을 쓰듯이 말이야.”“아, 식물성 경화 유지 말입니까? 하지만 그걸 쓰면 맛이 확 달라질 텐데요.”
“어차피 맛만 있으면 그만이지. 딸기 우유에 딸기가 들어가는 게 아니지 않나.”
“어,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합니다만?”
“애초에 맛만 있으면 되니까 고집할 필요는 없어.”
“호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네요. 그러면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팜유를 섞어 보니 예상대로였다. 과연 느끼함이 없어지고 담백하면서 적당한 맛이 나왔던 것이다. 시음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럴 걸 진작 고민했네. 춘삼이 그간 고생했어.”
“아무튼 강사장님이 타 주신 기본 베이스에서 별로 안 벗어나네요.”
“그럼 한번 소비자 반응 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반인들 상대로 믹스커피 시음행사를 해야 할 거 같은데? 도레미 백화점 인근이 어떨까요?.”
“좋지. 거기서 일단 1주일간 매일 아침, 점심, 사람이 분비는 시간대에 1~2시간씩 시음행사
한번 해 보고 사람들 취향을 알아보자구.”
그렇게 도레미 백화점 근처에 시식회가 마련되고 판촉행사가 열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