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커피는 진리
이목을 끄는 냄새에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자 판촉사원들이 주의를 끌었다.
“이게 뭔가?”
“자자 꽁짜이니 한 잔씩 마셔 보세요.”
다들 신기한 듯 맛을 보는 사람들. 달달한 맛을 음미하는 동안 사이 늙으수레한 할아버지 하나가 툴툴거렸다.
“코피? 참나, 양탕국 따위를 뭘 이리 요란스럽게. 팔려고 별짓을 다 하는구만.”
“자자. 그러지 마시고. 한번 맛보고 가십쇼. 이래 봬도 맛은 있습니다.”
못 이기는 척 커피를 마신 할아버지의 눈이 동그레지자 눈을 마주친 영업사원이 웃었다. 득의의 웃음에 체통이 상한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잔을 내려놓았다.
“큼큼…… 먹을 만은 하구먼.”
“생각보다 맛있죠? 요로콤시 뜯고 분말을 뜨거운 물에 타서 휘휘 저어 먹으면 끝입니다요.
“20팩 한 통에 50원이요.”
“거 비싸네.”
“에이 비싸기는. 싼 거지요. 요즘 물가 모릅니까. 다방커피 한 잔 가격으로 20봉지입니다요. 한 통 싸게 한번 가져가서 드셔 보십쇼.”
현란한 혀놀림에 영업당한 사람들이 혹해서 통으로 사 갔다.
출시 두 달도 되지 않아 기록적인 매출을 기록했다.
그달의 매출만 무려 12억 원. 놀랄 만한 수치였다.
“이거 완전 미쳤구만. 다들 먹다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카페인 뽕인가. 다들 중독되어서 그렇지. 게다가 야근에 딱 아니겠어?”
원래 커피를 아예 안 마셔도 고작 한 잔만 먹는 사람은 없다. 더욱이 담배와 완벽한 환상의 궁합을 이루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게. 이렇게 많이 먹을 줄 알았으면 가격을 더 높이는 건데 말입니다요.”
“욕심이 과하구먼. 그래서야 이렇게 빨리 자리 잡기 어려웠겠지.”
“그래서 요새 다방점주들도 싱글벙글이랍니다.”
“믹스커피 덕분에, 커피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져서요. 게다가 생두를 분유랑 설탕을 저가로 공급해서 수익이 괜찮잖습니까. 특히 다방 레지들이 타서 믹스커피를 마시니 한결 속이 덜 쓰려 좋다구 하네요.”
믹스커피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압도적인 편의성과 가성비 덕에 부서 당 한 통씩 커피를 가져다 놓는 것이 일반화되자 행정병 혹은 부관병의 소양 중 하나로까지 변했다.
수요가 폭증하자 강태준은 기존의 백경유업 열원설비를 커피믹서용 원두건조용으로 개조하기로 하고 조업인력 중 상당수를 믹스커피 제조공장으로 돌리기로 했다.
“사장님, 공장에서 급한 연락입니다. 재고가 소진되었으니 빨리 우유 좀 갖다 달랍니다.”
“우유 재고가 없다고? 어떻게?”
“커피원두도 매우 부족해요. 이대로는 한 달 내에 동이 날 듯싶습니다.”
수요가 폭증하자 그간 수입했던 물량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상황을 보던 강태준이 재빠르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어차피 정식 허가도 났으니, 아예 거래처를 따오는 편이 좋을 거 같네. 로스팅 기계랑, 전문바리스타 몇 명 수배해 보도록 합시다.”
‘그럼 어디서 수입할까요?”
“음. 에티오피아랑, 베트남 원두를 서너 종 수입해서 섞으면 좋을 거 같군. 분말커피 생산 설비는 일단 평택 백경유업 분유저장창고 개조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하고.
제조허가는 특별히 하자 없으면 바로 시군구에서 허가를 내준다고 하니 강태준으로서는 서둘러야 했다. 국내커피믹스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러스웰과 노멀 푸드 같은 해외 유수 회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만큼 어떻게든 빨리 굳히기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백경그룹 주가 연일 고공행진! 백경의 새 상품 효자 되나.
커피믹스 덕분에 인지도가 올라간 백경의 주가는 다시 반등했다.
뉴스를 보던 이병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한 방 먹을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푸나. 강태준이 이놈 물건은 물건이야. 이놈이 아직 미혼이라던가?”
“뭐 약혼녀가 있어서…… 혼인만 안 했지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합니다.”
“아쉽구만. 그거. 사위라면 무릇 이런 놈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병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아버지, 러스웰에서도 커피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국내서 공식 수입처를 타진 중인데 우리가 수입해서 파는 게 어떻겠습니까?”
“커피 유통이라…… 흠, 백경이랑 경쟁하자고?”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약간 망설이는 듯한 이병구가 이번엔 재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 굳이 백경 쪽과 직접 경쟁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뭔 소리냐?”
“커피믹스가 많이 팔린다면 굳이 파이를 나눠먹기보다 주변에 편승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십 스틱 (Sip Stick)이라도 만들어서 팔면 좋지 않을까요?”
“십 스틱?”
“예. 납작하게 대롱 가운데를 찝은 빨대 말입니다. 일종의 화상 방지용이죠.
“오. 저어 먹는 용도로도 쓸 만하지. 그다음에는?”
“그 외에 커피와 함께 먹을 제과류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싶네요. 간단한 빵류나 머핀 같은 걸 말이죠.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니 커피를 시키면 달달한 케이크도 은근히 잘 나가더군요.”
그 말에 재무가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원가는 생각 안 하나. 밥보다 비싼 디저트를 누가 먹는다고.”
“뭐 재료비야 조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비싸면 조각으로 팔면 되고요. 뭐 식품사업을 하는 이유가 굳이 수익성 때문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백경처럼 직원식을 제공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게다가 최근 추진하는 호텔업 예행연습으로도 그만 아니겠습니까?”
“거 말로는 누가 못 할까?
짜증스럽게 핀잔을 주는 재무였지만 이병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번 몸을 사리기만 했던 아들의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 못내 기꺼웠던 이병구가 슬쩍 입을 열었다.
“흐음. 그럼 니가 직접 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제가 말입니까?”
“그래, 그렇게 자신 있게 떠들었으니 속내에 구상 정도야 있지 않겠느냐. 설마 자신이 없는 건 아니겠지?”
“아, 아버지 그건…….”
말실수를 깨달은 이재무가 나서려 했지만, 곧바로 손을 들어 막았다.
아버지의 눈빛을 본 이재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기회다.’
본능적으로 기회임을 느낀 재희가 곧바로 넙죽 엎드렸다.
“소임을 주신다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재무 니는 이 부분에 대해 따로 예산안 편성해서 올리도록.”
“예? 어째서 제가요?”
“어째서라니. 그룹 일인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설마 동생이 실수할까 그러느냐?”
“그건 아닙니다만…….”
“하기 싫다면 다른 사람을 시키는 게…….”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해야죠, 당연히. 하하.”
“좋아. 형제의 우애가 이렇게 돈독하니 내 참으로 뿌듯하구나. 그래 상부상조해야지.”
아버지의 덕담에 재무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이건 완전히 엮겠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이미 돌이킬 방법은 없다.
한바탕 훈계를 듣고 회장실에서 나오자 못마땅한 눈으로 동생을 노려보던 이재무.
그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말만 번지르르해서는. 아버님께 점수 따니 좋으냐?”
“형님. 오해하지 마십쇼. 저도 사람인데 한량처럼 놀고먹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졸업한 지가 언젠데. 저도 눈치도 보이고 아버님께서 챙겨 주신 거죠.”
“흐음…….”
“어차피 형님이 물려받으실 그룹 아닙니까. 저도 경영자로서 한몫할 수 있으니 넓은 도량으로 봐주십시오.”
공손한 대꾸에 더 트집 잡을 부분을 찾지 못한 이재무가 귀찮은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좋다. 아부는 됐으니 알아서 해라. 어차피 니가 벌인 일 아니냐.”
“예. 형님.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래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겠다.”
고개를 까닥인 이재무가 사라지자 측근인 현재권 이사가 이마를 찡그렸다.
“아주 자리를 맡아 놨군요. 그래. 누가 보면 벌써 회장님인지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게. 듣는 귀가 많아.”
“옙. 근데 강 사장 그 양반이 신통하군요. 이런 걸 다 예측하다니. 헌데 어째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우리가 이뻐서일 리는 없고 그저 저울질해 보는 건 아니겠나. 솔직히 그쪽 입장에서 볼 때 작은 형님이 신뢰 가는 상대가 아니니까.”
“다행이긴 한데 솔직히 소름 돋는군요. 우리 쪽 경영에 대해 잘 아는 듯한데 조심해야 할 거 같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형님이 영 기회를 주지 않으시니. 달리 방도가 없지 않나.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이재희는 솔직히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귀국해서 의욕적으로 뭔가 해 보려고 해도 그때마다 노골적인 반대에 휘말려 뭐라도 해 본 일이 없었다. 이렇게 말라 죽느니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심리였다. 반 식물상태가 된 큰형님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작은 형님, 난 큰형과 다릅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을 거요.’
단지 몇 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회사를 뺏긴다면 그건 부조리하지 않겠는가.
기다리자. 다른 기회가 올 때까지.
* * *
-오성그룹, 백경과 협력 강화 천명. 커피 사업 시동 거나.
-아디스 바바, 판매 신기록. 초단기 천만 박스 돌파!
강태준의 사업이 순항하면서 비슷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엄청 잘 팔리네. 근데 오성 놈들이 숟가락 얹기 신공을 안 하네요? 뭘 잘못 먹었나? 이쯤 되면 외국 기업 끌고 오는 게 그놈들 클리셰 아닙니까?”
“그놈들이 이렇게 얌전하게 나올 줄이야. 저희 쪽에 협력 요청하는 거 보면 태도가 다르더라고요.”
“맞습니다. 현재권 이사인가. 그 사람 별종이던데요. 오성 쪽 사람들답지 않게 겸손하고.”
오재갑의 말에 강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이번 파트너는 재무가 아니라 재희일세.”
“아 유학 갔다던 셋째요?”
“그래. 똘똘해요. 이병구 그 양반이 은근히 이뻐하는 녀석이지.”
“흠…… 그래요? 의외군요. 이재무 그 자식 좀생이잖습니까. 동생이 지 포지션 가져가는 꼴을 좋아할 거 같진 않은데.”
광필이의 추론에 춘삼이도 공감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합니다. 지형 자리 뺏은 마당에 지도 그 꼴 나지 않겠단 보장이 없잖습니까?
“하하, 이병구 그 능구렁이 속을 어찌 알겠나. 사실 재무는 외가 쪽이 너무 약해서 그룹을 휘어잡기가 쉽지 않을걸.”
“오, 그럼 다시 한판 후계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상일은 모르지 않나? 오성에서 칼춤을 추면 우리한테는 나쁜 일이 아니지.”
이재철이 나가리 되자 오성 내의 권력구도는 묘하게 변했다. 이재무가 후계자 비스무리하게 올라오긴 했지만, 예전의 이재철마냥 황태자 대우를 받고 있지는 못했다. 거기에 이병구가 오성의 핵심 계열사를 여전히 틀어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재무의 경영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긴 재무 그 인간이 성과를 낸 사업은 죄다 우리 사장님이 떠먹여 준 거니 계속 똥볼만 차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죠.”
“사실 오성만큼 견실한 기업이 어디 있어. 이왕이면 오성 같은 기업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지. 나는 오성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구먼.”
“허, 짓궂으십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분유야 가만둬도 올라갈 테고 밀크드랍은 어때? 그거 판매는 잘 되고 있나?”
밀크드랍은 이번에 강태준이 유지방 대용으로 개발한 식물성 유지 제품이다. 커피믹스에만 쓰던 거였지만 수요가 폭증하자 따라 따로 제품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