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71화 (171/361)

171화 장례식장

반면 북베트남은 많이 사정은 달랐다. 지도자인 호치민의 영도 아래 꾸준히 전재 복구와 경제재건이 이루어진 베트콩의 결속력이 대단했다. 동시에 남베트남을 향해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협상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남베트남 정권은 이를 내정 간섭으로 보고 거절했지만 남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베트콩과의 연계 투쟁을 전개하며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미국은 공산화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개입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불과 2년 전 카스트로를 몰아내기 위해 침공했다가 굴욕을 당한 덕분에 쉬이 개입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베트남이라 꽤 험한 곳까지 가시는군요.”

“별 달고 싶어서 가는 거니 뭐. 제 선택이지. 그보다 심 사장 일은 정말 유감이네. 같이 영화사 쪽에 투자하기로 입까지 맞춰 놨는데 이번 일로 다 어그러져 버렸어.”

“영화요?”

“뭐 별건 아니고 정부 지원금 받아서 반공영화 하나 찍으려고 했던 게 있었거든. 국방부 홍보실에서 협조까지 받기로 밑밥 좀 깔아 놨지. 거의 될 뻔했는데 말이야.”

“박 여사님께서 영화까지 관심 있었는 줄은 몰랐는걸요.”

“나도 한 다리 건너서 부탁받은 거라 처음엔 별 관심 없었어. 그런데 읽어 보니 시나리오가 꽤 잘 빠졌더라고. 심 사장이 원래 이쪽으로 발이 넓은 사람이라 참신한 영화감독 섭외 좀 부탁했는데, 하필 일이 이렇게 되다니. 꽤 괜찮은 블록버스터가 될 뻔했는데 말이지.”

“코앞에서 사업이 엎어졌으니, 확실히 맥 빠질 법하군요.”

“뭐 포기는 아직 일러. 투자자부터 다시 물색해 봐야 할 듯한데, 혹시 그쪽은 생각 없어?”

“네? 저 말입니까?”

강태준이 자기를 가리키며 묻자 박 여사가 눈을 찡긋했다.

“강 사장 요새 돈 많이 벌었대며? 조미료 사업이 꽤 짭짤한 걸로 아는데 혹 영화 쪽엔 관심 없나 해서.”

“제가 영화에 뭘 안다고 거기 투자하겠습니까? 애초에 투자비가 쪼들려서 먹고 죽을 돈도 없습니다. 더욱이 영화사업은 제 주력도 아니고 말입니다.”

“에이, 그렇게 단칼에 자르지 말고. 시나리오 보낼 테니 한번 읽어 봐. 한운남 작가라는 분이 쓴 건데 나 같은 문외한이 봐도 재밌더라고.”

“한번 생각해 보고요.”

“찬찬히 살펴보고 고민해 봐. 아직 여유가 있으니. 암튼 좋은 대답 있길 바랄게.”

여유 있게 인사를 마친 그녀는 곧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 아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오재갑이 슬쩍 관심을 보였다.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니, 꽤 자신 있나 보네요. 한번 살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지. 암튼 어로과장 일도 바쁜데 돌연사까지 터지다니 자네도 고생이구만. 귀국 후에 쉴 시간도 없었을 텐데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했어.”

“뭐 이왕 할 거 처음부터 각오했습니다. 저도 업계 돌아가는 사정도 배우고, 나름 경험도 쌓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이라서 좋구먼. 그보다 한동안 안 가 봤는데 사모아 사정은 어떻게 돌아가나?”

“뭐, 아직까지는 호황입니다만 고기 씨알이 작아지는 점은 좀 걱정이네요. 어업 기지가 설치된 이후로 매해 잡히는 고기의 크기가 평균 2cm씩 빠르게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예상했던 결과지만 생각보다 자원 고갈 속도가 꽤 빠르군.”

“거기 몰린 어선 숫자만 해도 물경 이백 척이 넘지 않습니까,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잡아 대니 새끼 까고 성장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생산성을 위해 휴지기를 갖자는 논의도 있기는 한데 그게 기업에 통할 말이겠습니까. 씨알도 안 먹히죠.”

“그거야말로 공유지의 비극이지. 그보다 신규 어장 개척은 어떤가? 인도양 쪽이 요새 핫하다던데?”

“대만 쪽이 원양어업에 관심이 많나 봅니다. 마다가스카르랑 입어료 협상 중인데 최소 30척 정도 투입할 예정이던데요. 듣기로 3년 안에 출어할 어선을 50척 이상으로 늘리는 걸 목표로 한다는군요.”

“그 정도인가? 생각보다 더 많은 거 같은데?”

“예. 아무래도 수익성이 있다는 판단이 섰는지 예산을 증액해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나 봅니다. 덕분에 일본 측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타마타브항에 해상기지까지 설치했는데 다 뺏기게 생겼으니까요. 그래서 일본 수산청에서 여신으로 노후 선박 대체용으로 신규 선박 건조자금을 원양어선 한 척당 20만 달러 정도 지원한다고 하더라고요.”

“일본도 진심이군. 썩어도 준치라고 그냥은 안 물러나겠다는 건가.”

사실 60년대 초반 벌써 일본의 원양어선 사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50년대 이런 수출 증대를 위한 어장확보 과정에서 확장에 신경을 썼지만, 자기자본 부담과 과중한 시간이 소요되는 신규 선박 건조는 회피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국민의 생활 수준이 급격히 향상되고, 더 이상 고된 원양어업을 기피하게 되면서 급격히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우려가 업계에서 팽배해지면서 마쓰시타 통신공업의 전 사장 마쓰시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일침하기까지 했다.

-어업은 그간 50년대 일본의 성장을 견인해 온 기수다. 사면이 바다인 섬사람으로서 결코 사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현재 원양어선의 8할이 목선이라는 통계가 있는 것처럼 어선의 노후화 문제가 심각한데,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10년 내 관련 산업의 붕괴가 가시화될 것이다.

경영의 신이라고까지 불리던 마쓰시타의 충고가 언론을 타며 국민들에게 관심을 끌자, 일본 정부는 막대한 재정지원을 통하여 어선의 건조사업을 추진했다.

시기적으로도 어업허가권의 가격이 선박 가격보다 비싸지는 추세인 데다, 조업 가능 어선 척 수(Vessel limit), 특정 어종 어획량(Catch limit), 조업 일수 등을 기준으로 쿼터를 배분하도록 했기 때문에 적은 척수로 많은 어획고를 올릴 수 있는 신규 선박 건조가 조업에 훨씬 유리해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고선 매물이 쏟아져 나올 텐데, 판매가 활성화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양 전무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렇게 쉽지 않던데.”

“그게 다른 나라가 중고선을 사서 이득을 보는 꼴은 못 보겠는지 판매 조건을 굉장히 까다롭게 한 덕분에 지금 일본 항구 곳곳엔 어항에 묶인 노후선들이 수북해 선박이 입항하기가 힘들 지경이랍니다.”

신조선은 장려하는 마당에 오래된 배도 팔지 못하게 하니 선주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뛰는 일이었던 것이다.

“정치 논리라는 게 그렇지 않나. 수산청 쪽에서 강요했겠지. 일본 정부로서는 아직까지 원양어업을 버릴 생각이 없으니. 식민지였던 한국이 역으로 치고 들어와 반사이익을 누리는 꼴은 눈 뜨고 못 보지 않겠나.”

“그래도 멍청한 짓거리 아닙니까. 선주들도 바보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하. 결국은 팔겠지. 아끼다 똥 되면 아쉬운 건 결국 그쪽이니까.”

자금이 부족해 대부분 용선 방식으로 어선을 확보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업체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대체재는 항상 있기 마련이었다. 선주들은 미국에서 중고선을 들여, 조업 비용까지 차입 후 고기를 잡는 대로 상환하는 방법으로 제약을 피해 갔다.

덕분에 미국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보고 있는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선박가는 떨어질 테고, 일본 선주들의 반발은 거세질 것이 분명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경제가 정치 문제에 휘둘리는 세태가 점점 맘에 들지 않는군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조만간 한일 관계가 해빙되면 사정이 좀 나아지겠지.”

“그런 날이 오겠습니까?”

“일단은 선거가 끝나면 국교 복원부터 추진하겠지. 한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외자를 유치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야. 그보다 심각한 논의는 나중에 해야 할 것 같네…… 불청객이 오셨거든.”

“누구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모습은 다름 아닌 이억수였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등장에 오재갑과 양재문이 인상을 썼다.

“아니 한동안 잠잠하더니. 저 인간은 또 왜?”

“근래 꽤 사세를 회복한 듯싶더군요.”

“상도의라는 건 털끝만큼도 없는 개자식이. 또 뭐가 뜯어먹을 게 와서 왔나?”

태동에 이어서 원양어업 업계에 발을 들인 발해 원양은 요사이 연신 주가를 갱신하며 급성장했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발해에서 취하는 방식이란 사실 태동이 사용하는 방법을 베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구부터 차관 도입, 사내 운영 조직 직제, 심지어 그물코 크기까지 철저하게 태동산업을 벤치마킹한 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부 거래처까지도 가로채기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에 태동산업으로서는 물을 먹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그러나 장례식에 온 사람을 내쫓기도 뭣한 법.

과연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 주고 있긴 하지만 태동산업 임원진들의 눈이 그다지 곱지 않았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낯짝 두껍게 인사를 나누던 이억수가 강태준을 발견하고는 손을 벌렸다.

“어이 강 선장. 이거 간만이구먼.”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아니 왜. 나는 못 올 곳이라도 왔나?”

“그쪽한테 태동에서 부고장 보낸 일이 없을 텐데.?”

“이 사람 까칠하긴. 나도 사람일세. 고인이신 심 사장께서 정, 재계에 큰 어른 아니신가. 동종업계 종사자가 비명에 갔는데, 최소한 성의는 보여야지.”

“글쎄요. 의도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죠. 또 어디 또 염탐하러 오신 겁니까?”

강태준의 비꼼에도 이억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눈을 찡긋했다.

“진정하게, 이제 심 사장이 고인이 되셨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애도를 표할 뿐일세. 그보다 태동도 시끄럽겠구만 이제 곧 경영권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올 텐데, 말이야. 자네는 누구 쪽에 붙을 생각인지 결심은 섰나?”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를 떼는 강태준에 이억수가 능글맞게 웃었다.

“아니, 우리 강 선장도 슬슬 독립할 생각할 때가 아닌가? 아니면 우리 발해로 오는 건 어떤가 해서. 우리 회사 부사장 자리가 공석이라 말이야. 내 자금력과 자네의 전문성이 합쳐지면 좋은 콤비가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나?”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그리고 설령 스카웃 제의라고 해도 조문 오신 빈소에서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원래 장례식장이란 산 사람들끼리 만나는 장소지. 멀리 가신 양반이야 불쌍하지만 굳이 더 지킬 의리가 있지는 않잖은가?”

빈정이 상한 강태준이 뭔가 한마디 해 주려는 순간, 한 템포 빠르게 저쪽에서 반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자기 급을 낮출 필요는 없지요. 사장으로 가신다면 모를까 우리 강 선장님께서 발해 같은 삼류 회사로 전직할 일이 있겠습니까?”

“신 검사님?”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자 반대편에는 멀쑥한 차림으로 등장한 신명부가 빙글거리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