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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72화 (172/361)

172화 분쟁의 씨앗

신명부와는 그야말로 악연.

이억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명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 부장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최근에 부장으로 승진했거든요.”

“커, 영전 축하드립니다. 경황이 없어서 축하 난도 못 보냈군요.”

그러자 표정이 일그러졌던 이억수가 다시 표정을 고쳤다.

“허험, 부장검사라, 출세했구먼. 신 검사 자네가 제법 관운이 있나 보군.”

“뭐, 시골 촌놈이 출세했죠. 아래서 따까리질 하며 빡빡 길 때가 엊그제 같더니만. 우리 이 회장님께서 살펴 주신 덕분에 이렇게 트였지 뭡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언제 한번 라운딩이나 같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감님께서 그럴 여유가 있나?”

“에이 무슨 말씀을 제가 요새 골프 좀 배우거든요. 듣기로 우리 이 회장님께서 거의 싱글 치신다 들었는데 한 수 지도 좀 부탁할까 해서요.”

“허허. 골프란 게 사업상 필요해서 하는 일이지. 딱히 취미로 하는 건 아니지.”

에둘러 거절하는 이억수에 신명부가 깐죽거리듯 말했다.

“그래요? 그럼 뭐 다음 기회에 뭐, 그건 그렇고. 요새 이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우리 이 회장님께선 최근에 갑자기 영농 쪽에 더 관심이 많으시다 해서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회장님이랑 라운딩 마치면 사과 한 박스씩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해서요. 사과가 그렇게 맛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저번 주 육군방첩대 최 소령도 한 박스 받았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좀 받아 보고 싶어서 말이죠.”

멈칫한 이억수가 눈썹을 꿈틀대는 것이 정곡을 제대로 찔렀다. 말문이 막혀 입을 오물대던 이억수에게 서둘러 달려온 비서가 귀엣말을 주자 표정이 급변한 이억수가 갑자기 서둘렀다.

“신 부장, 미안하군. 요새 일이 바빠서. 라운딩 약속은 나중에 잡음세, 어쨌든 강 선장. 생각 바뀌면 찾아오게나. 과거사는 잊어버리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도 좋지 않나.”

“넓은 도량에 감사드립니다만 사양하지요. 뭐 배웅은 안 할 테니 살펴 가십쇼.”

강태준의 축객령에 눈을 부라리는 비서들이었지만 옆에서 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 이억수가 급하게 타고 온 차량에 실려 사라지자 신명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인간은 항상 봐도 밉상인데요. 하여튼 간에 남 속 뒤집어 놓는 데 일등이구먼요.”

“물에 빠져 죽어도 입만 살아서 동동 뜰 인간 아니겠습니까? 저번에는 반송장 비슷하게 푸르죽죽했는데 때깔 좋아진 걸 보니 살림살이 좀 나아졌나 봅니다. 추징금만 10억 원 넘게 낸 걸로 아는데 말입니다.”

“뭐, 소문으로는 스폰 제대로 물었던데. 저번 주가 조작 때 겁나 해 먹었다는 소리가 파다하더라고요. 뭐 그래도 이번 세무조사는 헤쳐 나가기 쉽지 않겠지만 말이죠.”

악동 같은 표정을 짓는 신명부에 강태준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뭐 최근에 세금 누락 문제로 누가 익명으로 투서를 넣었더라고요. 이번에 사건 맡은 한동화 검사는 제가 잘 아는 경제통인데 이쪽에서 융통성이 없는 걸로 유명하지요.”

“그렇습니까?”

“뭐 그렇다 해서 저 너구리가 빠져나가지 못하리란 생각은 안 들지만, 고생은 좀 하겠죠. 지금쯤 본사가 개 털리고 있을 테니. 아마 볼 만할 겁니다.”

득의의 웃음을 짓는 신명부에 강태준도 꼬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자리를 떠난 것이 그 때문이었나. 본인도 예전 주식으로 말아 먹어서인지 여전히 감정이 묻은 모양.

내심 그 기분을 짐작한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아주 골로 보내기는 어렵겠다니 그거 유감이군요. 뒷배가 누구랍니까?”

“소문으론 옥 여사 쪽일 확률이 높은 것 같습니다.”

“옥 여사라면 설마 의장님 부인이신?”

그 말에 눈치를 보던 신명부가 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네. 예서 함부로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옥 여사와 관련해 여기저기 구린 소문이 많습니다. 깨끗한 척 다하면서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모양이라고.“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죠. 그 오빠인 옥관수가 보통 부패한 놈이 아니라서요. 사실 정치랑 돈은 원래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걸 알면서 찔러 보셨습니까?”

강태준의 말에 신명부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명색이 대한민국 검사 아닙니까? 배짱 한번 부려 본 거죠. 박 의장 성격에 외척이 나대는 꼴을 모를 리는 없고, 언제까지 방치하진 않을 게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라인 탄 거나 다름없으니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아야지요.”

“넉살이 예전보다 느셨군요.”

“뭐,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죠. 어쨌든 그보다 심사장 아들내미가 안 보이네요. 거, 내 알기로는 망나니 큰아들이 하나 있지 않았습니까? 사진에서 가끔 봤던 걸로 아는데. 원래 증권 쪽에서 일하다 지금 태동건설 홍콩 지사장으로 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아 심원효 말씀이죠? 소식을 받고 출발했으면 지금쯤 도착했을 터인데 예정보다 좀 늦네요. 일이 많이 바쁜가 봅니다.”

“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장남이라는 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직 코빼기도 안 비춰서야 원.”

투덜거리는 신명부였지만 강태준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억수가 라인을 타다니 그때 아주 끝장을 냈었어야 했나? 고민에 잠긴 강태준에 상념을 깨듯 춘삼이가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인다.

“사장님, 홍콩에서 심 이사가 지금 도착했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는군요. 이거 양반은 아닌 거 같습니다.”

강태준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검은 세단 세 대가 연이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차에서 내린 것은 꽤 다르게 생긴 얼굴들. 머리를 빡빡 깎은 남자가 문을 열자, 성마른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명백하게 이질적인 집단에 시선을 주는 사람들. 그러거나 말거나 문을 열고 나타난 심원효는 성큼성큼 앞까지 가더니 가벼운 목례를 한 다음,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준비된 향을 집어서 불을 붙였다. 향로에 향을 정중히 꽂고 일어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절을 올리자 모습을 묵묵히 보던 미망인이 심기가 불편한 듯 타박을 주었다.

“많이 늦었구나. 입관도 못 볼 뻔했다.”

“관 뚜껑 닫히기 전에 왔음 빨리 온 거죠. 계모님. 이쪽까지 직항편 없는 거 아시잖습니까? 마카오 쪽에서 오징어와 한천 공급 관련해서 선도 불량으로 클레임이 들어와서 그거 해결하느라 많이 늦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는 심원효에 상복을 입은 미망인이 탐탁잖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네가 적자 아니더냐. 최소한 아들로서 도리는 해야지.”

“허, 누가 보면 제가 무슨 황태자쯤 되는 줄 알겠습니까. 제가 이 집 머슴이지 진짜 장자 대우를 해 준 적 있습니까. 홍콩 쪽에 처박아 두고, 몇 년씩 뺑이나 치게 해 놓고는…….”

“아니, 무슨 상스러운 말을.”

“아버지께서 돌아가지 않으셨음 언감생심 제가 귀국할 수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신경전에 눈치를 보던 김정욱이 애써 웃으며 사이를 중재했다.

“거 말이 심하구나. 아버지 영전이다. 간만에 가족끼리 보는데 얼굴 붉혀서야 되겠니?”

“아니, 형님께서 그런 말 할 주제가 됩니까? 그 난리를 쳐 놓고는? 뻔뻔하게 아직도 회사에 붙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뭐?”

“듣자 하니 예전에 지평호에서 항해사로 탑승했었는데 배 꼬라박을 뻔해서 초사에서 잘렸다면서요. 거,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그 정도 사고를 쳐 놓고는 무슨 염치로 사내에 붙어 계십니까? 저라면 쪽팔려서 벌써 그만뒀을 텐데요.”

“이 자식이!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냐?”

얼굴에 화끈해진 김정욱이 언성을 높였지만 심원효도 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심원효가 비웃듯 도발했다.

“아버지니까 눈 감아 줬지 저는 얄짤없습니다. 무능한 인간이 친척이랍시고 자리 차지하고 있어 봐야 회사에 민폐 아닙니까. 게다가 가족 운운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습니다. 저는 이 아줌씨랑 혈연도 뭣도 아닌데. 말이죠. 그전까지는 아버지 돌아가셨으니 남남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최미령 씨?”

“뭐 이런 호로자식이. 지금 어머님께 무슨. 그게 대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허이야.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시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안주인을 놓고 설마 그 야밤에 왜 거기 계셨겠습니까?”

창백해진 김정욱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가까스로 화를 삭이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도발을 계속하던 상대는 나불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래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나온 거죠. 여자가 잘못 들어오면 기둥뿌리 날려 먹는 거 한순간입니다.”

“원효, 너!!”

조롱 섞인 발언에 하얗게 질린 미망인이 비틀거리자 비서들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김정욱은 주먹을 치켜들자 강태준이 서둘러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거 놔!”

“조문객들 앞이니 자제하시죠.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워 봐야 좋을 게 어디 있습니까? 주위를 좀 둘러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태준이 나직이 읊조리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김정욱이 조문객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흥미로운 동물을 보는 듯 탐색하는 시선들. 남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젓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방관자의 시점에서 그들을 주시하는 중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눈빛들에 급속도로 머리가 차가워진 김정욱이었다. 김정욱이 주먹을 거두자. 강태준이 나직이 경고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다툼은 이쯤에서 끝내죠. 장례 마치고도 앙금이 남는다면 제가 따로 자리를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뭐. 저도 이제 가 볼 참이었으니까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후련해진 얼굴의 심원효가 미소를 지으며 퇴장했다. 김샜다는 표정으로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 아쉬운 듯 떠나지 않는 인원에 앞으로 나선 양재문이 버럭 호통을 질렀다.

“어이들, 왜 구경났어? 육개장이나 싸게 먹고 가!”

눈을 부라리며 다가온 경비원들에 마지못해 고개를 돌린 사람들.

저만치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켜보는 신명부가 반쯤 남은 담배꽁초를 튕기고는 돌아섰다.

“먼가 냄새가 나는데…… 존나 싸하구먼.”

* * *

비슷한 시가. 남산 근처의 어느 모처,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뼈대만 세워진 건물들, 건물 외벽에 달린 건축 자재들이 떨어질까 위태롭다.

흉물스런 건물 안에는 100079호라고 쓰여 있는 팻말이 달려 있다.

급조한 사무실 안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심각한 눈길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는 조무빈 국장.

사실 이곳은 기획 정책 정보국 산하 부산 분실. 총 기획자인 주맹덕을 포함, 중정의 간부들이 모인 와중 책상 위에 한껏 어질러진 사진들과 서류들이 보인다……

조 국장 반대편엔 바리깡으로 짧게 깎은 머리에 군복을 입은 장교가 테이블에 널려 있던 파일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무료하게 서류를 보던 중 밖에서 비가 내리자, 창문 안으로 비가 내렸다.

혀를 끌끌 차던 조 국장이 이윽고 불만스러운 듯 투정을 부렸다.

“젠장, 올 때마다 을씨년스러워서 원. 이 건물은 대체 언제 완공되는 건가?”

“돈이 들어와야 짓지 않겠습니까? 압류를 너무 빨리해서 그렇죠.”

“얼마가 더 필요한데. 그러나?”

“한 3억쯤? 그것도 최소치로 아마 5억은 들여야 할걸요?”

“아니 뭘 그렇게 많이 들어?”

그러자 주맹덕이 어이없다는 듯이 답했다.

“벽체랑 천장골조 말고 제대로 해 놓은 게 없어서 그렇지요. 내부 인테리어까진 아니라도 여기저기 빼먹은 게 많으니. 총체적 난국 아니겠습니까?”

“개같은 건설사 놈들 같으니라고. 돈 빼먹어도 유분수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새삼스럽게 뭐. 부실 공사를 안 한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애초에 잘 지은 물건이었으면 임대를 주던지 수익성 있게 활용하지, 저희한테 아지트로 내줬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잖은가? 활동비라도 제대로 주던지.”

“그러니까 잘해야죠.”

사실 이 짓다 만 5층 빌딩은 이만승 시절, 정경유착의 끝판왕이나 다름없던 형신그룹 박신우에게서 압류한 전리품이었다. 설립 초기 혁명 과업 수행에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던 중앙정보부는 반혁명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여러 점조직으로 된 부서를 만들었고 이 100079실 역시 부산 분실 산하 특별 수사를 위한 기획 부서로서 출범한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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