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비워진 왕좌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동안 날이 무더워지자, 우순해가 강태준에게 음료를 건넸다.
“허이구야, 안 힘드십니까? 여기 그늘에서 잠시 쉬시지요.”
“괜찮습니다. 아직 나이도 젊은데 벌써부터 힘들면 죽어야지요. 제가 솔선수범해야 아랫사람들도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훔친 강태준이 다시 일어났다.
“그래도 쉬엄쉬엄 하십쇼. 무리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배 타다 뭍에 오면 몸 쓸 일이 줄어서 좀이 쑤시거든요. 게다가 하다 보니 농부도 꽤 보람찬 직업 같군요. 작물이 쑥쑥 자라는 걸 보고 있자니 재미도 있고 말입니다.
몸은 고되지만 제 손으로 키운 작물이 성장하는 걸 보면 괜스레 뿌듯해진달까. 그 말이 공감되는지 우순해가 순박하게 미소를 지었다.
“땅은 정직하니까요. 사실 건강한 작물은, 어쩌면 모든 것이 풍족한 곳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약간 부족한 것이 오히려 더 좋은 작물이 되지요.”
땀을 식히던 강태준은 커피잔을 든 채 무럭무럭 자란 작물들을 바라보았다.
생명력 넘치는 땅에서 자라서인가.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삶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잠시 여운을 느끼던 중 춘삼이가 도착했다.
“사장님, 죄송하지만 위에서 온 전언입니다.”
“어디서?”
“태동산업 쪽에서 온 전보인데 함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급한 내용이라는데요.”
“흠. 드디어 출항일이 잡혔나? 오래도 걸렸군.”
대충 이쪽 일은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밖으로 나갈 때도 되었다. 강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전보를 뜯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시 전보를 살펴보던 표정이 굳었다.
“심 사장님께서 사고로 의식불명이라고?”
* * *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화성 병원.
직원들로 북적이고 있는 복도. 사람들이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태준이 3층으로 올라가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아이구. 이제 오셨습니까?”
“지금 수술 중인가?”
“예. 벌써 8시간이 넘었습니다.
수술실 앞. 잔뜩 긴장한 얼굴들의 사람들이 보이는 가운데, 연신 초조한 서성이는 김정욱의 모습. 경황이 없어 보이는 김정욱에게 인사를 건넨 강태준.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오재갑이 인사하자, 강태준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자네도 왔구먼.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야밤에 성락원에 가셨다 변을 당했습니다. 영벽지 상류에서 실족했는데, 머리를 크게 다치셨습니다. 복원 앞두고 별궁공사 복원 현장에 갔다 발을 헛디딘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시간에 왜 거길 싸돌아다녀서는. 밝은 날 가셔도 될 걸. 동행한 비서들은 대체 뭐 한 건가?”
“생각할 일이 있으니 답답하시다고 떼놓으셨더라고요.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으셔서 수소문했는데, 마침 실족한 것을 발견했지요.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걸 구했답니다.”
심 사장 측 인사들은 대부분 안색이 푸르죽죽한 것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꽤 위중한 상태인 모양.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강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복 가능성은 있나?”
“다발성 골절에 두부외상까지 겹쳐서, 글쎄요. 3층 높이에서 머리부터 떨어졌는데 목숨 붙어 있는 게 용한 거죠. 수술은 최대한 빨리 들어갔습니다만 사고 후 워낙 늦게 발견한 터라…….”
말끝을 흐리는 오재갑이 슬쩍 김정욱 쪽을 돌아보았다. 김정욱은 이 상황이 초조한 듯.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역시 저 인간. 임원으로서는 영 꽝이로군.’
정신 차리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저런 추태라니. 그 모양이 영 미덥잖게 보던 강태준이 한숨을 쉬며 침착하게 물었다.
“비상시국이군. 양 전무님께선 어쩌신다는가?”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들어오신답니다. 지금 일본에서 귀국 중이십니다.”
일단 사주가 유고 직전이라 숨이 간당간당한데 여기서 빠질 수야 없지 않은가.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반쯤 패닉에 빠진 부인은 눈을 감은 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덜덜 떠는 손을 슬그머니 잡아 주는 김정욱.
그때 벌컥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가운을 입은 의사가 수술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수술 장갑을 벗은 의사의 표정에 김정욱이 서둘러 말했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다행히 급한 불은 껐습니다. 수술은 잘되었지만, 경과는 지켜봐야 합니다.”
“오오. 다행이군요.”
“오늘 내일이 고비입니다.”
사람들은 안도했다. 그사이 시간이 훌쩍 지났는지 시계를 보자 벌써 새벽이 되었다. 강태준이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럼 나는 잠시 공항에 다녀오지. 자네가 여길 맡아.”
“아니, 이 상황에서 어딜 가십니까?”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해서 뭐 하나, 일단 이쪽은 심 사장님 가족들에 맡기고. 난 양 선장님 마중이나 다녀오겠네.”
양해를 구한 강태준이 밖으로 나가자 춘삼이가 대기하고 있다. 뒷좌석에 몸을 실은 강태준이 김포공항에 도착할 즈음 선글라스를 쓴 양재문이 트레이를 밀며 들어왔다.
맨 처음 강태준을 발견한 양재문이 옅은 미소를 띠며 살갑게 끌어안았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강 선장 아닌가?”
“간만입니다. 선배님.”
“상황이 좋지 않으니 가면서 이야기하자고.”
양재문이 등장하자 춘삼이가 승용차 문을 열어 주었다.
운전대를 맡은 춘삼이가 속력을 높이자 스무스하게 나아가는 차량.
달리는 차 안에서 양재문은 정성스레 선글라스를 닦아 냈다.
“아니, 갑자기 웬 선글라스입니까?
“근래 노화가 왔나. 밖에서 태양을 하도 오래 보니 눈이 시려서, 이왕 내 것 산 김에 자네 것도 샀네. 자 선물이야.”
“제 것도요?”
양재문이 준 것은 보잉 선글라스로 큼직한 알이 반사되는 것이 꽤 그럴싸한 물건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강태준의 취향은 아니었다.
“거, 잠자리 눈깔같이 생겼구먼요. 설마 짭은 아니겠죠?”
“날 뭘로 보고. 진퉁이다. 공군 장교들이 애용하는 건데 그거 비싼 거야.”
“뭘 이런 걸. 쓸데없이…….”
“섭섭하게. 얌마. 눈 망가지고 후회하면 이미 늦어. 젊을 때부터 관리해야지.”
다시 물건을 살펴보니 만듦새가 좋은 것이 신경을 많이 썼다.
“암튼 감사해요.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엎드려 절 받기구먼. 그보다 심 사장님 상태는 좀 어떠시다나?”
“수술은 마쳤습니다만 예후가 좀 거시기 해서요. 병원에서도 아직 장담은 못 한답니다.”
“아니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렇게 성락원에 집착하더니, 이젠 제 목숨까지 꼬라박나.”
“그간의 투자비용이 있으니 아무래도 조바심이 났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들 속으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심익태는 오랫동안 모신 상사이기 이전에 나이를 뛰어넘은 친우이기도 했다. 요사이 심익태가 원양어업에서 번 돈을 토대로 문어발 확장을 하는 바람에 경영방침과 관련해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서로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던 것. 잠시 침묵하던 양재문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근데 설마 누군가 작정하고 작업 친 건 아니겠지. 좀 너무 시기가 공교로운데 말이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회복을 하신다고 해도 한동안은 요양하실 처지라. 일단은 경영부터 정상화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강태준의 말에 양재문이 공들여 닦은 선글라스를 다시 썼다.
진지하게 물었다.
“위에서 떨어졌다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군. 사외 이사들한테도 통보했고?”
“예. 일단 이사회를 소집했다는군요. 다들 소식 들었으니 지금쯤 도착했을 겁니다.”
선글라스를 낀 양재문이 병원 앞으로 내렸다. 수술실은 꽤나 분주하다. 바글바글한 인파에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 더없이 심각해진 분위기에 강태준은 무슨 일이 터졌음을 알아차렸다.
“오 선장,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뇌출혈이 심해져서 2차 수술 들어갔답니다. 지금 벌써 3시간째입니다.”
“뭐? 젠장 할.”
재수술은 10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수술이 계속되는 동안, 침묵과 함께 무거운 공기만이 흘렀다.
가끔 손에 쥔 동전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부딪칠 뿐.
그 뒤편에 앉아 심상치 않은 모습을 걱정스레 살펴 대는 김정욱과 다른 이사들.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조심스레 건네는 오재갑이었다.
“한잔하십시오.”
“고마워.”
한 모금을 머금자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흘렀다. 이대로 심 사장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불안한 예감이 전염된 듯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그때, 수술실이 열리더니 피곤한 기색의 수술진이 밖으로 나왔다. 굳게 닫은 입술과 창백한 볼. 결과를 감지한 김정욱이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운명하셨습니다.”
“사장님께서 돌아가셨다고요?”
“운명하셨다고? 그 양반이?
“뭔가 착오겠지. 이보시오 의사 양반. 어제 분명 수술 잘되었다 하지 않았나!”
“면목 없습니다.”
험악한 분위기에 난처해하는 의사들. 일그러져 가는 선장들의 입에서 격한 욕지기가 튀어 나왔다. 다급히 말리는 오재갑이었지만 다들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때 미망인의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오자 그제서야 멈추는 사람들.
사뭇 난감하다는 듯,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양재문이 중얼거렸다.
“휴…… 아주 X됐네,”
이제 남은 건 뒤처리인가. 잔뜩 긴장된 표정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 모습을 묵묵히 보던 강태준이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식은 커피 맛이 씁쓸했다.
* * *
며칠 후, 심 사장의 장례식장.
영정을 모신 절 앞에는 임시 천막까지 치며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속속 도착하는 조화들이 늘어지는 와중 양재문과 몇몇 간부들의 안내에 따라 검은 옷의 사람들이 들어선다.
삼베옷을 입은 미망인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심 회장의 가족들과 함께 양재문과 김정욱, 그 뒤쪽으로 김정욱을 필두로 다른 이사들이 서 있다.
잠시 후, 새로 도착한 박원숙이 영정에 절을 올린 다음. 향불을 피우고 합장을 했다. 마주 선 모습을 보며 강태준이 말했다.
“바쁘실 텐데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여사님.”
“유감이야. 심 사장님께 이렇게 허무하게 가실 줄은. 사람 인생이란 게 참 덧없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렇지. 보아하니 맏이는 아직 안 온 거 같네. 해외에 있다고 했나?”
“예. 홍콩 쪽에서 일하는데 귀국 중이랍니다.”
빈소로 문상 온 박 여사가 심 사장에 비해 20년은 젊어 보이는 미망인을 돌아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처는 후처지? 한바탕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겠구먼.”
“뭐 대충 정해진 수순이죠. 어째, 이혼 건은 잘 처리되셨는지요?
“덕분에, 증거 모아서 코앞에 들이밀었더니, 이혼 도장 찍어 주더라고. 두말없이 끝났어. 불륜 저지른 인간이 양심은 있어가지고, 위자료 지급동의서에도 바로 사인해 주더군.”
담담히 말하는 박 여사의 말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두 푼이 아니었을 텐데, 꽤 깔끔하게 끝났군요.”
“어지간히 소송 걸리는 게 무서웠나 보지. 유하 씨 조언이 많이 도움이 되었어.”
“아쉽군요. 바람피운 것도 괘씸한데, 개털 만들어서 쫓아 버리시던지 그러셨습니까.”
“그래도 한때 서방이었는데 그렇게까지 몰아붙이고 싶진 않더라고. 어차피 일본에서 소꿉장난도 끝이야. 곧 다른 곳으로 전출될 예정이니 말이야.”
“어디로요?”
“베트남, 아마 남베트남 군사 원조사령부(MAC-V)로 갈 거 같아. 거기 대빵이 티우 대통령인데, 이만승처럼 골수 친미에 반공주의자거든. 아무래도 군사 고문 역으로 나갈 거 같아. 요사이 베트콩 놈들이 극성이거든.”
당시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앉혔다. 하지만 전쟁 영웅이었던 지엠은 정권을 잡은 후 친족을 대거 등용하며 독재자로 군림했고, 그 반작용으로 민족 해방 전선이 득세하며 민심을 장악해 가는 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