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한국수산대
면도기 판매가 슬슬 궤도에 들어가면서 강태준은 숨통이 트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성비 물건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
그러면서 제법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몸통이랑 연결한 나사가 돼지코같이 생긴 탓인가. 백경 면도기라는 이름보다 돼지코 면도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돼지 털 면도기란 거 말이야. 나도 사용해 봤는데 꽤 쓸 만해.”
“돼지 털 깎는 물건을 사람이 쓴다?”
“원래 사람도 동물 아닌가. 사람 털이나 돼지 털이나 털만 잘 밀리면 되지. 외양은 쌈마이하기는 해도 좀 가성비는 좋더구먼.”
“그래? 나도 한번 써 볼까?”
호기심에 하나씩 사가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소식을 들은 춘삼이가 어이없어했다.
“아니 돼지코라니? 멀쩡한 상표를 두고 지멋대로들 부릅니까?.”
“뭐 어때? 난 정감이 가서 좋은데. 어차피 인지도만 높일 수 있으면 뭐든지 좋지. 이참에 상표 등록을 그걸로 바꾸는 것도 좋겠군. 이참에 광고도 때리자고.”
강태준의 말에 화들짝 놀란 춘삼이가 어버버하며 말했다.
“광고요? 하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광고를 내는 건 비용이…….”
“굳이 신문 광고를 이용할 필요가 있나? 일단 전단지나 인쇄해서 뿌리자는 이야기지. 그냥 인쇄소에 의뢰해서 자체 제작으로 돌리자고.”
강태준은 내친김에 백종섭이 디자인한 광고지를 운송 차량에 부착하기까지 했다.
[안전면도기, 면도기도 국산에 우리기술로.]
[최고의 선택. 돼지코 면도기가 함께 합니다.]
돼지코 면도기를 사용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만족했다. 미제 제품에 비한다면 다소 투박한 느낌이기는 해도 기능성은 확실하다.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수요가 폭발하자 판매량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마침내 돈이 굴러들어 오고 있었다.
“10환이요, 10환이요, 10환이요, 5환이요…….”
낭랑한 목소리로 돈을 세는 어머니에 맞춰 춘삼이가 주판알을 올렸다 내렸다.
봉급일이 되어 사무실에 들른 최달건은 코앞에 수북이 쌓인 지폐 더미에 깜짝 놀랐다.
“아니, 대체 이게 다 얼마여.”
“요새 면도기가 좀 팔리더군요. 덕분에 이번 달은.”
“이야, 강 사장 한 건 했구먼, 좀만 지나면 완전 부자 되겠네.”
잠시 일을 멈춘 춘삼이가 자랑스럽게 답했다.
“면도기 인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산 외에 다른 지역 상인들은 물론 양키 상가에서도 상자째 입도선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더군요.”
“허, 거참. 신기하이. 요 조막만 한 물건이 이렇게까지 효자 상품이 될 줄이야.”
“현금 장사라서 덕분에 회전도 빠른 거죠. 자 최 목수님. 간만에 상여금 좀 넣었습니다.”
“상여금? 설마 추가 수당 말인가?”
반색하는 최달건. 두툼한 액수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하이고야 많이도 넣었구먼.”
“저번에 제품 설계에 도와주셨잖습니까. 뭐 기둥 보수 겸 지붕 개량 일도 있고, 거래는 확실해야죠. 그리고 이제부터 철민이 녀석들도 정직원으로 올리는 건 어떻습니까?”
“정직원 말인가?”
“몇 달 배웠는데 수습 딱지는 떼야죠. 이제 좀 제법 일머리가 생겼다면서요.”
“아직은 배울 게 많아. 제 몫을 하려면 멀었지. 게다가 일단 정규로 뽑으면 고정비가 커질 텐데 그럴 만한 여유는 되나?”
“뭐. 그래도 이제는 숨통이 트였잖습니까? 수습도 돈을 받아야 동기부여야 되죠. 이번 달부터 봉급이 나올 테니 이참에 시장서 외출복도 사 입고, 촌티 쫙 빼고 오라고 하십쇼.”
“뭐. 알겠네. 애들은 이참에 제대로 교육 좀 시키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 최달건이 두 번째 봉투를 집어넣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저 양반도 참, 감정 표현이 솔직하지 못하구마. 언제는 애들 인생 어떡할 거냐 제일 걱정하던 사람이.”
“원래 경상도 남자가 무뚝뚝하잖습니까? 그보다 요새 면도기가 잘 팔리면서 짝퉁들이 갑자기 늘어났더라고요.”
“벌써?”
우려하듯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어머니. 하지만 강태준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쇼. 확인해 보니 조악한 품질에 면도날이 들쭉날쭉하더이다. 면도했다간 파상풍 걸리기 딱이겠더라고요.”
“하지만 확실히 저희도 생산량을 좀 더 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언제 경쟁자가 나타날지 모르고요.”
“차근차근 알아보고는 있지. 지금보다 생산 물량을 늘리려면. 프레스기나 선반 같은 기계 설비가 추가로 필요한 거 같더군. 금형 설비도 필요하고 말이야.”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어떻게 구해야 할지 벌써 머리가 아픈 강태준이다.
‘일본을 한번 다녀와야 하나?’
정밀한 걸 따지면 독일산이 최고지만, 일제 장비도 대체재로 쓸 만하다. 하지만 설비를 수입하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이 당시 한국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오성 그룹에서조차 원심분리기를 수입하려다, 수입허가를 받지 못해 쩔쩔매지 않았나?
‘정 안되면 미군부대에서 찾아보는 수밖에.’
그러던 중 딸랑 소리와 함께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자전거를 탄 우체부가 나타난 것.
우체부는 강태준을 보더니 무척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아, 강태준 씨 되십니까?”
“예. 제가 맞는데요.”
“이거, 주소지를 몇 번이나 옮기셨더군요. 그간 얼마나 찾았는지.”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우편 배달부의 행동에 강태준이 의아해했다.
“저를 말입니까? 왜?”
“예. 그게 등기우편은 당사자에 수령 확인증을 받는 게 원칙이라서요. 여기 수령했다는 표시로 서명하시고 지장 찍어 주십시오.”
엉겁결에 사인을 한 강태준이 받은 물건은 한국수산대에서 송부한 우편물들이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지?
의문도 잠시 서둘러 봉인을 뜯어 보니, 의외의 말이 적혀 있었다.
“아니, 퇴학 예고라고?”
2년 이상 휴학이 지속된 관계로 학업을 연장할 수 없는 관계로 기한 내 복학하지 않을 경우 부득이하게 퇴교 조치하겠다는 말.
발송한 날짜를 보아하니 무려 3개월 전.
퇴학이 예고된 날짜로부터 무려 일주일이 지났다.
주소지가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예고 기간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강태준으로선 무척이나 낭패할 일.
하지만 퇴학 통보까지 받은 마당에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젠장. 아무래도 빨리 복학이 가능한지부터 확인해야겠군.”
“학교서 받아 줄까요?”
“송달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건 불가피한 사유일 테니 받아 줄 가능성이 크지. 다만 복학 일정이 문제야.”
그러자 춘삼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럼 지금까지 진행된 사업은 어쩌고요?”
“어쩌겠어, 최악의 경우에는 병행도 감내해야지. 일단 내일 철거는 황 조장한테 부탁해야겠군.”
이렇게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기는 아까운 일 아닌가. 졸업만 하면 3등 항해사 자격이 나오는 만큼 여기서 그만두는 건 아쉬운 일.
황철득에게 고물상 일을 부탁한 강태준은 곧바로 대연동으로 향했다.
대연동에 위치한 한국수산대학교는 40년대 조선총독부 시절 세워진 건물로 일제시대 및 해방 직후 부산의 유일한 고등 교육기관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사실 강태준도 이번이 찾아가기는 고작 두 번째였다.
‘선장이 되기 전, 박물관 견학차 한 번 가 본 적이 있지.’
그때 본 한국수산대는 주황색의 지붕을 갖춘 건물로 꽤 낡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역산해 봐야 1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최신식 건물이었기에 내심 기대가 되었다.
헌데 설레는 마음으로 못골 저수지를 지나 캠퍼스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교직원 대신 흰 가운을 입은 푸른 눈의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여기가 학교가 아니라고요?”
“예. 여기는 유엔군 임시 병원입니다.”
서툰 한국어로 답하는 간호사의 말을 들어 보니 이건 아주 가관이다.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학교 본관이 징발되어 스웨덴 측 병원으로 이용되었다는 것.
몇 년간 부산에 있었지만 대연동에 온 것은 처음인 데다, 기억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강태준이 물었다.
“그럼 지금 학교는 어디 있습니까? 남은 학생들은?”
“부산 영도로 가 보십시오. 중앙수산시험장 옆으로 임시 교사로 이전했으니까요.”
다행히 간호사는 학생이라는 말에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가며 설명해 주었다.
하는 수 없이 강태준은 남항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 후 캠퍼스에 대한 기대감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천막 지붕에 맨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강당에 할 말을 잃은 강태준.
초라한 외관에 기가 막힌 춘삼이가 한 마디 뱉었다.
“세상에, 완전 판자촌인데요.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망할 자식들이구만, 아직도 본관을 안 돌려주다니.”
번듯한 본관을 뺏긴 채 수산시험장 구내 한 모퉁이를 빌려 사용하는 꼴을 보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급조한 가건물 입구엔 엉성한 두 짝의 나무 대문이 걸려 있고, 왼쪽 기둥에는 한국수산대학 가교사라는 나무 명판이 한자로 쓰여 있다.
하지만 섣부른 실망은 이른 법.
심호흡을 하고 교내로 들어선 강태준이 지나가던 학생을 붙잡고 물었다.
“실례지만 길 좀 여쭙겠습니다. 수산대 학장실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 어떤 일로 오셨는지?”
“예. 어로학과 2학년입니다. 휴학을 했는데 복학 문제로 왔습니다.
“아, 저희 선배님이시군요. 이쪽이 학장실입니다.”
어로학과 학장실로 도착하자 백발이 성성한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학장은 그의 지도교수였던 신용우였다.
안경을 쓴 신 교수가 반색하며 그를 반갑게 맞았다.
“이런 강군 아닌가? 그간 소식이 없어 걱정했는데 이게 몇 년 만이야.”
“강녕하셨습니까. 동란 중에 피난을 다니는 통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간 연락도 못 드려 죄송합니다.”
가져온 음료수 박스를 내민 강태준에 신용우가 인자하게 말했다.
“뭘 이런 걸 다. 나도 소식 들었네. 부친께서 큰일을 겪었다지? 그래 요새는 어떻게 지내나.”
“뭐 부산에서 조그만 고물상을 하나 운영하고 있지요. 폐품 탁송 겸하여 운송업이랑 같이 이것저것 하고 있습니다.”
“자네같이 샌님이 사업을 말인가?”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네요. 원래는 학업을 계속하다 나중에 교편이나 잡아 볼까 했는데 전쟁통에 호구지책으로 일하다 보니 인생이 꼬여 버렸죠.”
강태준의 겸손한 대답에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노교수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사업이라니 장하구먼. 강군. 자네가 그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역시 기업가 혈통은 어디 가지 않는구먼.”
“과찬이십니다.”
“그럼 아주 바쁘겠군?”
“가솔들 몇 명만 데리고 운영하는 입장이라, 지금은 가내 수공업 수준에 불과합니다.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허허. 날 속이려 들지 말게. 사업이란 게 장난인가. 그래도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군. 근데 학교에는 웬일로 왔나?”
“그게 일하던 중 학교에서 퇴교 예고장을 보냈더라고요.”
“뭐라고? 거 이거 줘 보게.”
서류를 읽은 신 교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불편한 듯 굳어진 표정에서 은은한 노기가 느껴졌다.
“이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을 보았나?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동란 중 이사가 잦아서인지 송달 문제가 생겨서 늦어졌답니다. 학장님께서 선처 좀 해 주셨으면 해서 왔습니다.”
“이거 면목이 없구만. 자네도 알다시피 동란 중에 납북되거나 행불자 된 학생들이 많아서. 중간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이건 전적으로 행정 실수니 내가 확실하게 처리해 주지.”
“감사합니다.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다만 다음 학기부터는 휴학 연장을 하기 어려울 걸세.”
“예? 휴학 연장이 어렵다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