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복학생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지만 모르는 척 묻는 강태준.
그 말에 안경을 닦은 김 교수가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게 사실 요새 학교 재정이 말이 아니라서 말이야. 휴학생이 너무 많고, 신입생 수도 계속 미달이라 학교 운영이 많이 어려우이. 이번 학기도 미등록한 학생이 벌써 서른 명일세. 위에서는 어떻게든 학교 운영비를 마련하라고 성화야.”
“흐음…… 사정이 어렵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그럴수록 학생들에게 더 배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임시교사 형태의 교실에서 수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런지.”
“변명할 여지가 없군. 하지만 나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자네도 벌써 3년째 휴학 중 아닌가. 전쟁이라는 천재지변이 끝난 이상 추가로 휴학 일을 연장하긴 어려울 걸세. 아마 더 시간이 지나면 재입학밖에는 답이 없을 거야. 정말 미안하이.”
신 교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도 가능한 사정을 봐주고 싶지만, 이 부분은 전적으로 행정처 소관인 만큼 자기도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고. 문교부령에 따라 학사 인원 적체가 계속 발생하면 신입생 선발 인원이 줄어드는 만큼 어쩔 수 없이 짜낸 교육 지책이라는 말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그럼 이번 학기부터 복학 가능합니까?”
“가능은 하네만 이미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은 되었는데? 게다가 도중에 자네 사업은 어떡하려고? 찬찬히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겠나? 다음 학기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말이야.”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당분간은 학업과 병행할 수밖에 없을 거 같아서요. 뭐 따로 사업 관리를 해 줄 관리원을 구하면 되겠죠.”
“흠, 정말로 가능하겠나? 몇 년간 쉬었으니 복학하면 수업 따라가기도 벅찰 텐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거쳐 갈 일, 한 살이라도 어릴 때가 학업 끝내 놓는 게 낫지요.”
“정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하게나.”
신 교수의 허락을 받고 행정실로 찾아간 강태준은 곧장 복학 수속을 밟았다. 원래는 몇 주나 수업이 진행된 마당에 이런 식으로 복학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특수한 시절이었다.
운영비 문제로 부득이하게 행정 조치하려 했을 만큼 재정이 쪼들린 학교 입장에서는 등록금만 내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강의 시간표를 확인한 강태준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이 정도 커리큘럼이면 일주일에 3일만 출석하면 되겠군.”
복학 기일이 촉박해 수업 선택권이 없었던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커리큘럼이다. 하지만 춘삼이가 보기엔 영 미덥지 않은 듯했다.
“담주 월요일부터 바로 복학이라니,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미뤄도 답이 없지 않나. 일단 고철 수거 일은 황 조장한테 부탁해야지. 어차피 그 양반 요새 일감 줄어서 골치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춘삼이 너도 나이가 꽤 찼는데, 이제 슬슬 학교 돌아가지 않아?”
그 말에 춘삼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요. 공부야 돈 벌고 나중에 해도 되지요. 검정고시까진 독학으로 하면 되고 말입니다.”
“그래도 배움엔 때가 있는 법이야. 나중에 후회한다?”
“전 어리니 아직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책에서 배우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회 경험부터 배우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런 본보기가 있을 경우에는 말이죠.”
“녀석, 다 컸네. 애늙은이야 애늙은이.”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헝클려 하자, 슬쩍 손을 피한 녀석이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사장님, 학교에 가려면 교재부터 사야 되지 않습니까?”
“하긴 그래야겠구먼. 귀찮게.”
“벌써 5시입니다. 책방 닫기 전에 빨리 가죠.”
근처 학생들에게 길을 물으니 중앙수산시험장 한편으로 용봉서점이라는 곳이 있단다.
문지방을 넘어 책이 가득 쌓인 서점에 들어가자 퀴퀴한 곰팡내가 풍긴다.
수북이 쌓인 책들 사이로 전공서적을 한 아름 고른 강태준.
무거운 책을 들고 카운터 앞에 서니 덩치께나 되는 직원이 서 있다.
근육질에 우락부락한 덩치가 보기만 해도 단단해 보였다.
‘도난 방지용 대책인가? 살벌하게도 크군.’
하지만 생각과 달리 말투는 사근사근하다.
“거참 많이도 사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책을 구매하시다니. 특이하시군요.”
“복학 수속 때문에요. 근데 얼마입니까.”
“어디 보자 권당 200환이니까, 총 1,200환입니다.”
비싸네. 아무렇지도 않게 지갑을 꺼내던 강태준.
그때 강태준을 유심히 살핀 직원이 깜짝 놀란 듯 중얼거렸다.
“아니, 이거 태준이 형님 아니십니까.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빡빡머리에 수염을 듬성듬성한 거한이 눈을 꿈뻑이더니 살가운 표정으로 변한다.
설마 이 몸과 아는 사이인가? 친근한 척을 하는 상대에 기억을 더듬는 강태준.
그때 머릿속에서 번갯불처럼 이름 하나가 뇌리에 떠올랐다.
“설마 광필이?”
“아이구 형님!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설마 졸업을 아직 안 하셨습니까?”
“그러는 넌? 여기 웬일이야.”
“저도 이번에 복학해서 생활비 벌고 있지요.”
“너도 졸업 아직 못했어?”
“군대 들어갔다가 이제야 제대했거든요.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아주 개고생했죠. 그보다 이거 정말 반갑네요. 형님.”
아, 이놈은 현역으로 입대했었지. 그 호리호리했던 소년이 이렇게 근육 돼지가 돼서 돌아오다니.
군대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속으로 유감을 느끼면서도 은근 의지할 구석이 생겼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는 강태준이었다.
“간만에 보는데 이렇게 헤어질 수야 있나? 그럼 퇴근이 언제야.”
“곧 입니다. 마침 저녁 시간 교대거든요.”
강태준이 잘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없으면 소주나 한잔하지? 내가 한턱 쏠게.”
“오, 그거 진짜입니까?”
“괜찮은 곳 있으면 추천해 봐. 대신 맛없으면 니가 내는 걸로.”
“에이, 형님도 무슨 말씀을. 저 김광필입니다. 김광필. 저만 믿으십쇼. 제가 깔쌈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큰소리 탕탕 치는 광필이를 따라 남포동으로 간 강태준 일행은 영도대교를 넘어 남항동 거리에 들어섰다. 온천장 입구에서 부산우체국 부근을 지나 목도선의 마지막 종착역 직전, 남항시장 앞에서 내렸다.
영도의 남항시장 들어가는 입구에 이정표가 여럿 보인다. 날이 선선했지만 신선한 생선을 좌판 위에 놓은 채 흥정을 벌이는 사람들. 슬슬 날이 더워져서인지 물회라고 적힌 간판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김광필이 안내한 곳으로 들어가자 구수한 육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여깁니다.”
들어간 음식점 내부는 허름한 외양만큼이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곳.
주방과 홀의 구분이 없는 데다 마당에서 걸린 큰 솥 아래 장작이 타고 있는 것이 전부 솥단지 안에 육수가 보글보글 끓는 모습에 강태준이 못 미더운 듯 눈을 흘겼다.
“처음 오는 곳인데? 좀 글타?”
“형님, 저만 믿으십쇼. 여기 아줌니가 이북 출신인디. 음식을 겁나게 잘합니다. 저기! 아줌니, 여기 수육 한 접시랑 돼지국밥 주이소.”
“예예. 바로 대령하겠습니다요.”
잠시 후, 아주머니가 음식을 대령했다.
펄펄 끓는 뚝배기는 낡고 이가 나가 있었지만, 내용물은 튼실했다. 탁하고 뽀얀 국물이 중심을 이루는 경상도식 국밥이 아닌 살코기가 든 맑은 국물 안 돼지머리와 순대가 가득 들어있다. 취향껏 부추와 다대기를 넣어 얼큰해진 국물을 마셔 보니 속이 따스해지는 기분이랄까.
잠시 후 갓 삶아 뜨끈뜨끈 김을 뿜는 수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우젓, 된장에 마늘과 배추절임만 올라온 한상차림.
단출했지만 채에 걸러 기름기를 뺀 돼지고기는 깔끔하고 부드러웠다.
“크…… 제법 그럴듯하구만. 이거 술이 땡기는데?”
“제 말이 맞죠? 이 집 손맛 죽인다니까요.”
“그렇네. 너 이 자식 생각보다 미식가구만.”
“제가 전쟁통에도 밥 세 끼는 제때 챙겨 먹었습니다. 형님.”
된장과 통후추를 넣고 삶아서일까. 잡내 하나 없는 수육은 배추절임과 궁합이 잘 맞았다.
간이 적당히 밴 수육에 아삭한 김치가 어우러지니 술이 술술 들어간다.
대포 잔을 든 김광필이 연신 잔을 비웠다.
어느덧 취기가 오른 듯 코끝이 빨개진 광필이 기분이 좋아진 듯, 한껏 흐물흐물해진 얼굴로 강태준에게 감사를 표했다.
“형님 덕에 간만에 목구멍에 때 좀 벗기네요.”
“그보다 어떻게 지냈어?”
“뭐 군에서 빨갱이 놈들 때려잡느라 바빴죠. 영장 나온 다음 자대 배치받자마자 전쟁이 터져 버린 거 아닙니까? 근데 하사관 새끼가 밤에 차 타고 나갔다가 습격받아서 폭사해 버렸고. 간부가 부족하니, 배운 놈이라 하는 것들은 감투 줘서 내보내는데. 저도 갑자기 분대장을 시키지 뭡니까. 딸랑 6주 훈련 시켜 놓곤 땡크 부수라 떠미는데 이게 정말. 그때 진짜 막막했습니다.”
“땅개가 땡크를 무슨 수로 잡아?”
“그러게 말입니다. 연대장이 수류탄 까는 시범을 보여 주는데 무슨 자폭기술을 가르쳐 주더군요. 미친놈이 누굴 잡으려는지. 그냥 실전에 투입되면 뒈질 거 같아서 땡크가 어떻게 생긴지나 볼까 하고 머리 돌아가는 놈들이랑 살펴봤죠. 근데 유심히 보니까 궤도 사이에 뛰어들어 누워 있다 벗어나려는 순간 수류탄만 까 넣고 뛰어내리면 될 거 같더라고요.”
듣고 있던 춘삼이가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아니, 그게 말이 쉽지. 진짜 가능합니까?”
“까라면 까는 거지. 못한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수 없으니 실전 투입하는 병사 중에 촌에서 머슴 살다 온 놈들이랑 백정 놈들 델꼬 가서 따로 훈련을 시켰지.”
강태준이 다시 끼어들어 물었다.
“어떤 훈련 말인가?
“궤도 사이로 뛰어 들어가는 훈련 말입니다. 실전용으로 쓸려고 불발탄으로 연습했죠. 한 가지만 하다 안 먹히면 답이 없을 거 같아서 통나무를 밀어서 바퀴를 끊어 버리는 법도 생각해 봤죠. 그렇게 특공대를 2조로 나눠서 운용했는데 글쎄, 이게 먹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T-34 전차만 십수 대나 해 먹었다는 겁니다.”
“에이 그거 구라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전차를 십수 대나 잡아요?”
“녀석이 사람 말을 못 믿네. 처음에는 진짜 어떻게 잡나 암담했는데 해 보니 되더라고. 물론 다 궤도 밑에 들어갔다 나와서 잡은 건 아니야. 나중엔 수류탄 까는 거 말고 통나무로 궤도를 망가뜨려 잡았지.”
“그게 더 안전한가?”
“그럴 리가, 통나무로 잡는 게 전리품이 더 많아서요. 전차병은 꼴에 권총도 차고 나름 먹을 것도 잘 챙겨 다니더라고요. 개중 쓸 만한 권총은 장교들한테 넘기고 식량이랑 바꿨죠. 설탕이랑 통조림은 저희가 먹고 특히 정어리 통조림이 끝장났습니다.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때 기억을 잊지 못한다니까요.”
기억이 아련한 듯 침을 삼키는 김광필. 광필이의 무용담은 흥미진진했지만, 실제 본인이 그 상황에 처했을 때 얼마나 엿 같았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강태준이 술을 다시 한가득 따라 주었다.
“그거 고생 많았구먼.”
“그래도 승진은 겁나 빨랐습니다. 인사계에서 좋게 봐 줬는지, 특진을 몇 번이나 했거든요. 하사관 단지 2년 만에 특무 상사까지, 나중엔 준위까지 주더이다. 제가 군대 체질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이야, 준위까지 승진했으면 그거 완전 적성이네. 걍 거기서 말뚝 박지 그랬어?”
“솔직히 고민이 되긴 했는데 그건 좀 뭣 같더라고요. 무엇보다 군인 월급 박봉인 거 다 아시잖습니까. 그렇다고 사관학교 진학해서 다시 뺑이 치긴 싫고 그래서 그냥 전역했죠. 근데 전역하고 와 보니 제가 제일 노땅이지 뭡니까? 선배라고 다들 부담스러워하니 혼자 다니기 겁나 적적하던 중인데 형님께서 복학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몇 병을 비운 둘. 성년이 아닌 춘삼이는 옆에서 콜라를 홀짝였다.
술친구에 안주까지 들어오니 술이 물처럼 들어갈 정도. 깡 소주를 들이켜던 김광필도 마침내 취했는지 목까지 시뻘게진 모습으로 끄윽 딸꾹질을 했다.
“어이구 형님, 이거 쪼끼 알딸딸합니다요.”
“야 적당히 마셔. 내일 수업인데 숙취 오면 어쩔 거야.”
“내일은 내일이니 오늘 죽어라 마시자고요. 군대서 하루살이로 생활을 하다 보니 내일을 걱정하는 게 제일 의미 없는 행동이더군요. 근데 맞다 형님, 복학을 지금 와 했음 중간고사는 어쩌실 겁니까?”
“중간고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화들짝 놀란 강태준이 잔을 들다 말고 내려놓았다.
“아니 모르셨습니까? 다음 주부터 시험 시작인 거.”
“너 취했냐? 이제 겨우 고작 5주 차 아니야? 아직 여유 있는 걸로 아는데?”
“5주 차긴 한데, 이번에 실습선이 고장 나는 바람에, 실습 일정이 죄다 뒤로 미뤄졌거든요. 그래서 시험을 2주 빨리 당겨서 보기로 했죠.”
“아니, 그럼 첫 시험이 언제인데?
“어디 보자, 23일이니, 항해학은 3일 뒤인가? 그거는 시험 한 번으로 끝이고. 기말은 실기랑 레포트로 대체한다고, 아까 책 사는 거 보니 형님도 수강 신청하지 않았소?”
대수롭지 않게 다시 대포 잔을 들이켜는 녀석.
그 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든 강태준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