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제78화. 분열(3)
모든 연습생들이 무대를 마쳤다.
2라운드 2차 미션까지 오니까 몇몇 연습생들은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모양인지 덜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아예 긴장을 안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다른 연습생들에 비해서, 상대적인 개념일 뿐.
기성 가수들도 순위 발표를 앞두고 있으면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는데. 연습생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 순위 발표는 1차 미션 때와 다르게 심사 위원들도 계속 자리를 지키며 녹화에 참여하기로 했다.
연습생들은 이미 순위를 알고 있을 심사 위원들의 표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혹여나 순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 때문이었다.
마침 동서남북 팀이 이연과 눈을 마주쳤다.
촬영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이연이 처음으로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녀의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멤버들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워낙 속내를 알기 힘든 선배니까.
현장에 순위와 관련된 추측이 난무할 때쯤.
강의찬이 큐시트를 들고 무대 위로 올랐다.
“우선 순위 발표에 앞서서 짧은 기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무대를 준비했던 연습생 여러분들에게 제작진과 심사 위원들을 대표해서 다시 한번 고생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강의찬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연습생들은 강의찬보다도 더 각도를 숙이면서 단체로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자! 그럼 분위기를 바꿔볼까요? 여러분들. 본인들의 순위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시죠?”
“네!”
“그럼 빠르게 순위를 발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5위부터 공개해주세요!”
좋게 말해서 5위지, 사실상 꼴찌다.
동서남북 팀은 1라운드 때부터 줄곧 상위권에 머물던 팀이다.
그러나 이번 무대만큼은 자신이 없어서였는지 5위 발표부터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5위의 정체가 공개되자, 감탄과 탄식이 뒤섞였다.
동서남북 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다행스럽게도 감탄이었다.
“5위는 면했네.”
“어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간신히 꼴찌 신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5위가 된다고 할지라도 엄청나게 큰 손해를 보는 건 아니다.
그래도 방송으로 보이는 게 있으니까. 지금까지 잘 나가던 팀이 갑자기 꼴찌로 폭삭 주저앉는다면 여태껏 동서남북 팀을 응원하던 팬들에게 실망을 안길 것이다.
그게 싫었기에 동서남북 팀 멤버들은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4위 발표가 이어졌다.
한 단계 한 단계가 그녀들에겐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선사했다.
“4위는…… 끝까지 가보자 팀입니다!”
이제 중위권 팀 발표만 남았다.
동서남북 팀 멤버들은 5위, 4위 발표 때와 다르게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최소 중위권은 무조건 확보했다는 뜻이니까.
이제부터는 본인들의 팀이 불려도 크게 아쉬울 거 같진 않았다.
그러나 최솔림은 멤버들과 생각이 달랐다.
무조건 1위를 해야 한다.
한송연과의 내기 때문이다.
3위의 정체는.
“날 보러 와요 팀이 차지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1차 미션에서 아이비제이의 노래를 선곡했다가 혜원에게 혹평을 들었던 그 팀이었다.
지난 미션 평가 당시에는 연습생들에게 모진 말을 했던 혜원이 이번에는 그때와 다르게 먼저 박수를 보내면서 잘했다고 멤버들을 위로했다.
사실 동서남북 팀이나 노력 100퍼센트 팀에 비하면 날 보러 와요 팀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많이 부족한 팀이다.
최솔림, 조이주처럼 시청자들에게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 연습생이 속한 것도 아니고.
다들 어중간한 순위에 머물고 있는 연습생들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3위라는 순위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굉장히 잘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이제 동서남북 팀과 노력 100퍼센트 팀밖에 남지 않았다.
“SSS 시즌 2, 2라운드 2차 미션 대망의 1위 팀을 발표하겠습니다!”
최솔림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좋은 결과가 나오든, 나쁜 결과가 나오든. 표정 관리를 잘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강의찬이 힘 있는 목소리로 1위 팀의 정체를 공개했다.
“노력 100퍼센트 팀입니다! 축하합니다!”
아쉽게도 이번 미션에선 조이주 연습생이 속한 팀에게 1위를 내주고 말았다.
최솔림은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2위도 충분히 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솔림은 분했다.
SSS 녹화에 처음 참여했을 당시, 그녀는 순위에 상관없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승부욕보다는 자신의 팀원들과 같이 최선을 다해 무대를 준비하는 그 과정이 더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의 최솔림은 달랐다.
1위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겨 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1위를 놓쳤다는 분함을 느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 라이벌 팀에게 박수를 보내는 건 잊지 않았다.
미랑이 최솔림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이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림 씨 저런 모습, 처음 보네.”
천사 같아 보이기만 했던 그녀의 낯선 모습에 미랑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연은 오히려 최솔림의 저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승부욕이 필요하다.
최솔림은 그게 부족했다.
1위를 놓친 대신, 최솔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얻었다.
‘이걸로 충분하겠지.’
이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녹화가 끝난 뒤.
현장을 벗어나기 전에 최솔림이 복도에서 한송연을 찾았다.
“송연아.”
화장실에 가려던 한송연이 걸음을 멈추고 최솔림이 서 있는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PD님한테 가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무슨 말?”
“우리 팀 리더 자리, 너한테 넘기겠다고. 나 혼자 가서 PD님한테 일방적으로 말하면 설득력이 없을 테니까, 나하고 같이 가서 우리끼리 서로 합의된 거라고 말만 해줘. 그러면 PD님도 납득하실 거야.”
중간에 리더가 교체되었던 전례가 없는 건 아니었다.
SSS 시즌 1 때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리더라는 자리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큰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다른 연습생에게 리더를 양도했던 사례가 존재한다.
이렇다 보니 최솔림에서 한송연으로 리더 교체가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크게 반감은 없을 것이다.
한송연은 말없이 최솔림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오히려 최솔림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PD님한테 가서 말하기 좀 불편해서 그러는 거야? 그러면 내가 혼자 갔다 올게.”
“그게 아니야.”
한송연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역시 리더는 네가 하는 게 맞아.”
“하지만…… 내가 내기에서 졌잖아. 1위 못하면 너한테 리더 넘기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승부는 중요하지만, 그만큼 약속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게다가 한송연은 1라운드에서 타 팀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 리더를 맡았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최솔림은 그녀가 자신을 대신해서 팀을 잘 이끌어줄 거라고 확신했다.
최솔림과 달리 팀원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있고.
그러나 한송연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바보 같이 착하지만, 멤버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상냥한 리더야. 그런 사람이 우리에게, 그리고 나한테 필요해.”
“송연아…….”
“솔직히 난 이번에 무대 준비하면서 우리 팀이 이번에 5위 아니면 4위 할 줄 알았어. 서로 불협화음도 많았고. 다른 멤버들도 무대 준비하면서 집중 못 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이기도 했으니까.”
불안 요소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2위라는 성적을 일궈냈다.
한송연이 보기엔 최고의 결과였다.
“네가 리더이기에 가능했던 거야.”
다시 화장실로 가려는 건지, 아니면 쑥스러워하는 얼굴을 감추기 위함인지. 한송연이 등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해줘, 리더.”
최솔림은 멍한 표정으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한송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리더.
한때는 정말 자신이 이 중요한 직책을 맡아도 되는 걸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송연이 자신을 리더로 인정해 줌으로써 최솔림은 이 의심을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지워 버릴 수 있게 되었다.
할 수 있다.
아니, 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리더니까.
한송연과 마찬가지로 최솔림 역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걸어간 쪽은 서윤철 PD가 있는 곳이 아닌.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이 위치한 곳이었다.
최솔림이 한송연과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기척을 숨기고 있던 이연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려고 온 거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 * *
오늘도 아침부터 부지런히 스케줄을 소화한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은 간만에 오전에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만끽했다.
“이게 얼마 만에 쉬는 거냐―!”
리샤가 소파 한쪽 구석에 얌전히 있던 커다란 토끼 인형을 안아 들며 외쳤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기분이 굉장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앨범 발표 이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안 쉬고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려온 하니엘.
오전에 방송 일정이 있긴 했었지만, 오후를 통으로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우미가 인형과 같이 소파를 뒹구는 리샤를 향해 잔소리를 흘렸다.
“인형하고 소파에 화장 다 묻으니까 씻는 거부터 먼저 해.”
“걱정 마, 언니. 안 묻게 조심할 테니까.”
지금은 그저 누워 있고 싶은 기분이다.
다른 멤버들도 리샤와 같은 심정인지 각각 의자와 소파에 자리를 잡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미는 멤버들의 축 늘어진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연이를 좀 본받아 봐. 오자마자 바로 씻고 옷까지 다 갈아입…….”
거실로 돌아온 이연의 모습을 보자, 우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메이크업, 의상이 전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리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연아. 우리의 동지가 된 걸 축하해.”
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연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굳이 알려고 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우미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 이연에게 물었다.
“연이는 안 씻니?”
“이따가 매니저님하고 같이 회사 가봐야 해서.”
“스케줄 또 있어?”
우미가 기억하는 바론, 오늘 일정은 전부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연이 말하는 숨겨진 스케줄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지 못했다.
“연습생들 3차 미션 준비하는 거 한번 봐주려고. 서 PD님이 시간 날 때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중간에 얼굴 한번 비췄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거든.”
이연은 그때를 오늘로 잡았다.
비아가 소파 등받이 위쪽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부지런하네, 언니.”
“방송에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내보내게 하면 좋잖아.”
이연의 말이 정답이다.
머릿속으로 알고는 있지만, 비아는 차마 이연처럼 행동으로 옮길 엄두를 내지 않았다.
“난 언니처럼은 못할 거 같아.”
어설프게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