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제79화. 신경 쓰이는 것(1)
박도수 매니저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이연은 곧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입구 바로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박도수 매니저가 짧게 클락션을 누르면서 그녀에게 위치를 알렸다.
“어서 타, 연아.”
“네.”
항상 멤버들과 같이 타고 이동했던 차에 혼자 올라서 그런지, 차 안이 굉장히 썰렁하게 느껴졌다.
최공예 코디조차 없어서 휑함이 더했다.
“코디님은요?”
“오늘 저녁에 약속 있다고 바로 퇴근했어.”
“매니저님도 일 있으시면 퇴근하셔도 돼요. 숙소로 돌아갈 때는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요.”
“괜찮아. 어차피 나, 저녁때까지 일할 거 있어서 퇴근 못 해.”
“업무가 많으신가 보네요.”
“많지. 우리, 다음 달에 일본 일정도 잡혀 있잖아. 그거 때문에 요즘 홍 실장님하고 나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
하니엘이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최초로 해외 활동을 개시하는 거다 보니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하니엘은 현재 한국을 넘어서 중국, 대만, 홍콩, 미국, 유럽 등 다양한 국가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중에서 하니엘을 향해 가장 높은 팬심을 자랑하는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멤버들 중에서 일본인인 유키가 하니엘에 속해 있다는 점도 이런 인기에 한 몫을 더했다.
일본 유명 인플루언서들은 하니엘, 유키에 관한 소식 영상을 1순위로 제작해 올릴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하니엘 관련 영상을 올리면 조회수는 무조건 보장이 되니까.
그래서 더 많은 인플루언서들이 영상을 제작하고, 영상이 늘어날수록 하니엘을 접하는 일본인들의 숫자도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공급이 확대되고, 또 소비가 늘고. 이런 선순환이 일본 내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는 중이었다.
LC 엔터테인먼트 역시 일본 내에서의 이러한 흐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 일본어 버전 디지털 앨범도 따로 발매를 했었다.
발매되자마자 일본 음원 차트 랭킹 1위에 단숨에 올라섰다.
“대표님이 너희, 이번에 일본에서 활동하는 거 기대 엄청 많이 하고 계셔.”
“그래요?”
“어. 툭 까놓고 말해서 너희 아니었으면 우리 회사, 올해는 암울한 한 해가 되었을지도 몰라. 준비했던 프로젝트는 다 망했고. 그나마 믿을 만한 소속 아티스트들 중 대다수는 컨디션 난조나 다른 작품 활동 때문에 방송 활동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으니까.”
하니엘의 성공은 LC 엔터테인먼트 입장에선 가뭄에 단비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채일 대표가 하니엘을 유독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던 거다.
하니엘의 일본 활동 지원 규모도 만만치 않다.
회사의 거의 대부분의 전력을 여기에 쏟아부을 정도였다.
기간은 일주일. 그동안 하니엘은 하루도 쉬지 않고 각종 일본 방송에 출연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 주력할 예정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본 활동 끝나면 단독 콘서트 준비도 해야지.”
야심 차게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만큼 이연도 최선을 다해 준비할 생각이다.
자신이 바라는 완벽한 무대를 이룰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한 치도 소흘하게 진행할 수 없었다.
“일본 활동 끝나고 단독 콘서트 기획 회의 일정 잡아둘 테니까 아이디어 있으면 그때 정리해서 사람들한테 말해줘. 알았지?”
“네. 그렇게 할게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자신만의 콘서트 아이디어를 대방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연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자신이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내겠다고 다짐했다.
* * *
안무 연습실을 방문한 이연은 2라운드 마지막 무대를 준비 중인 모든 연습생 팀들의 안무 연습실을 돌아봤다.
조이주 연습생이 속한 노력 100퍼센트 팀의 연습실.
이연이 깜짝 등장을 하자, 연습생들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 선배님!”
“안녕하세요!”
연습하다 말고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면서 이연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안녕. 괜히 내가 연습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
“아니에요, 아니에요!”
“선배님이 와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에요!”
나름 자주 얼굴을 보다 보니, 이제 이연은 편하게 말을 놓는 단계까지 친해지게 되었다.
계속 존댓말을 쓰니까 오히려 연습생들이 불편해하는 거 같고. 그래서 이연은 연습생들이 말 편하게 하셔도 된다는 요청을 오늘부터 받아들이기로 했다.
“준비는 어때?”
조이주가 이연의 직설적인 물음에 약간 망설이는 태도를 취했다.
“그…… 생각보다 잘 안 풀리더라고요.”
“마지막 미션 내용이 쉽진 않아 보이더라.”
“네, 맞아요.”
이번 3차 미션은 1차 미션 때와 같이 기존에 발매되었던 곡을 커버로 꾸미는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다.
대신, 1차 미션에 비해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로 심사 위원들만의 평가로 점수가 매겨지는 게 아닌, 무작위로 추첨한 대중들의 현장 투표까지 더해져 순위를 매긴다.
심사 위원들 앞에서 무대를 꾸미는 것보다 대중들 앞에 서는 게 더 힘든 법이다.
무대를 관람하는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리고 현장 특유의 분위기라는 게 있기 때문에 거기에 휩쓸리게 되면 자칫 무대를 망쳐 버릴 수도 있다.
위험 요소가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습생들에겐 큰 부담이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선곡 라인업이 다르다.
역대 1위를 차지했던 걸 그룹 히트곡들 중에서만 골라야 했다.
당연히 선배들의 무대와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이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라고 하니, 연습생들은 무대를 상상하는 것만 해도 벌써부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걸 떠나서 3차 미션은 재미있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1차 미션 때 각각 아이비제이, MAYO, 그리고 하니엘의 곡을 골랐던 연습생 팀들이 또다시 같은 선배의 곡으로 무대를 준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너희가 MAYO 선배님들 곡으로 다시 한번 무대 준비하고 싶다고 했을 때 미랑 선배님이 엄청 좋아하셨어. 몰랐지?”
“어머, 그래요?”
“몰랐어요!”
이연이 흘려준 정보에 연습생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연습생들의 귀여운 반응에 이연은 평상시에 무거운 자신의 입을 잠깐 가볍게 만들어보기로 했다.
“내심 너희가 MAYO 선배님들 곡 골라주기를 엄청 바라고 계셨거든. 텔레파시 통했다면서 촬영 끝나고 나서도 나하고 2시간 가까이 통화했어.”
“선배님께서 좋아하셨다니까 저희도 기뻐요.”
노력 100퍼센트 팀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팀도 마찬가지로 하니엘의 곡을 골랐다.
신기한 건 날 보러 와요 팀도 아이비제이 노래를 선택했다는 거였다.
조이주도 같은 연습생 입장에서 그녀들의 선택이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1차 때 혜원 선배님한테 엄청 잔소리를 들어서 저는 날 보러 와요 팀이 아이비제이 선배님들 곡은 피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당당히 골라서 놀랐어요.”
“혜원 선배님은 혹시 어떤 반응이셨어요?”
연습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연의 대답은 이러했다.
“용기가 가상하다고 하셨어.”
연습생들은 무서움을 넘어 섬뜩함을 느꼈다.
연습생들 사이에선 이연보다 오히려 혜원이 더 무섭다는 평이 많았다.
날 보러 와요 팀이 과연 이번에는 재도전에 성공할 수 있을지. 이것 또한 관전 포인트다.
노력 100퍼센트 팀 연습실을 빠져나온 이연은 동서남북 팀이 있는 연습실을 찾았다.
한창 안무 연습에 집중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이연은 잠시 출입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연습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녀들의 동작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이연은 그냥 얼굴만 비추러 일부러 시간을 할애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기왕이면 연습생들이 무대를 준비하는 일에 도움이 될 만한 피드백을 주고 싶었다.
무대의 퀄리티는 곧 프로그램의 흥행과 직결된다.
프로그램이 잘 돼야 이연도 좋기 때문이다.
노래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동서남북 팀은 뒤늦게 이연이 지켜보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언제부터 거기에 계셨던 거예요?”
“3분 전부터. 몸 움직이는 거 보니까 2차 때보다 훨씬 좋아졌네.”
그때는 긴장감 때문인지 가끔 삐거덕거린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안무 동작을 선보였다.
동서남북 팀이 이번에 고른 곡은 하니엘이 가장 최근에 발표했던 노래, ‘Beyond’였다.
다섯 개의 미션곡 중에서 제일 최신곡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동서남북 멤버들은 오히려 1, 2차 미션보다 더 쉽고 빠르게 안무를 익히는 모습을 보였다.
얼마 전까지도 하니엘의 무대를 방송으로 수시로 접하면서 눈으로 보고 익혔으니까.
따라 하는 것 정도는 금방 할 수 있었다.
최솔림이 이연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물었다.
“선배님. 혹시 보시면서 어느 부분을 수정했으면 좋겠다 하시는 파트 있었나요? 만약에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기운 넘치는 그녀를 보면서 이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긍정적으로 바뀐 최솔림의 모습에 이연은 마음이 놓였다.
“아니. 이대로 가도 좋아 보였어. 대신에 디테일한 부분만 좀 더 신경 써줘.”
“네, 선배님!”
자신이 너무 오래 이곳에 머물면 안 된다.
그러면 연습생들의 시간을 빼앗는 셈이니까.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려준 이연은 그제야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매니저님이 볼 일 다 마치면 연락 달라고 했었지.’
복도로 나온 이연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박도수 매니저에게 톡을 보내려고 할 때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연의 행동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이은솔 선배님?”
LC 엔터테인먼트에서 타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이은솔의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타 소속사 아티스트가 이곳에 오지 말라는 법은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올 만한 이유도 없었다.
‘아는 사람 만나려고 온 건가?’
그럴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래도 이은솔이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명색이 이연의 선배님이기도 하고.
그리고 둘이 서로 안면도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말을 걸려고 하던 순간.
이은솔 말고 다른 한 명의 더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은솔 오빠. 오늘은 저희 대표님 보러 오신 거예요?”
“어. 오 대표님이 의찬이하고 같이 우리 대표님하고 같이 넷이서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해서.”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네?”
“너, 오늘 드라마 촬영 있다며.”
“얼른 끝내면 중간에 합류할 수 있으니까요.”
노골적으로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는 귀여운 인상의 젊은 여성.
LC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는 여배우, 강윤애였다.
같은 회사다 보니 이연은 오며 가며 강윤애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녀는 뭐랄까. 약간 도도한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은솔 앞에서의 강윤애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예쁘고 귀여운 모습을 어필하고 싶어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