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제78화. 분열(2)
사실 연습생들 간의 이런 갈등을 확실하게 해결할 만한 방법은 존재한다.
이연이 직접 나서서 한송연이든 아니면 눈앞에 있는 최솔림이든. 둘 중 한 명에게 고집을 꺾으라고 대놓고 말을 하면 된다.
그녀들이 믿고 따르는 대선배, 이연이 하는 말이니까. 아무리 본인이 싫은 일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따르고 보려고 할 것이다.
연습생들 각자의 주장보다 이연의 말이 정답에 가까울 확률이 높으니까.
실제로 SSS 시즌 1에서 이연이 보여준 활약상을 떠올린다면,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이 없었다.
사실 제작진이 이연에게 이런 식으로 동서남북 팀을 케어해 줄 수 있겠냐고 도움을 요청한 것 자체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물론 시청률을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건 납득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연은 동서남북 팀에게만 너무 많은 편애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힌트를 던져주는 것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다.
“예전에 제가 솔림 씨한테 했던 말 기억하세요?”
“파트 재분배에 관한 거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그다음에 했던 말이요.”
최솔림이 이연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게 있었다.
리더의 방향성에 관해서였다.
“너무 착한 리더만 지향해선 안 된다…… 라고 하셨죠?”
“네, 맞아요.”
“팀원들을 충분히 설득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건 굉장히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고, 당장 무대를 꾸며야 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그 설득 과정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
이연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렇다.
“자애로운 천사도 때론 강경하게 나갈 수 있다는 걸 가끔은 보여주세요.”
이게 이연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이다.
만약 이렇게까지 말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서남북 팀이 탄 배가 삐거덕거린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녀들의 한계는 딱 2라운드까지밖에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계속해서 한계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 * *
최솔림을 시작으로 모든 동서남북 팀원들이 한 차례씩 이연과의 면담을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으로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한송연은 생각이 많이 보이는 얼굴을 했다.
같은 팀원 중 한 명인 성윤이가 한송연에게 떠보듯 물었다.
“선배님하고 무슨 이야기 나눈 거야?”
“별거 없었어. 그냥 팀원들하고 다 같이 열심히 으쌰으쌰 하면서 무대 준비하라고 조언해 주신 게 전부야.”
그녀의 말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팀원들 역시 한송연과 비슷한 맥락의 면담을 나눴다.
최솔림만 달랐다.
면담이 끝나고.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 1시를 달려가고 있었다.
제작진도 최소 인원만 남기고 전부 퇴근했다.
돌아가는 거치 카메라를 보면서 최솔림은 결심을 굳힌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팀원들을 모았다.
“안무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있는데.”
최솔림의 말에 한송연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크게 움찔했다.
오늘 아침에도 후렴구 단체 안무를 어떻게 짤지에 대해 최솔림과 한송연 사이에 큰 마찰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은 멤버들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한송연은 이번에도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그 안무대로 가는 게 맞는다고 봐. 그리고 1차 미션 때에는 우리가 네 의견대로 다 따라줬잖아. 그러니까 이제 내 차례 아니야?”
“나도 웬만하면 그렇게 하고 싶은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네가 생각해 낸 마무리 형식보다 윤아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더 나아서 그러는 거야.”
최솔림은 성윤아가 고안해 낸 퍼포먼스 쪽을 더 지지하는 편이었다.
댄스 트레이너 역시 같은 쪽에 더 무게감을 실었지만, 결정은 어디까지나 연습생들이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결과 역시 연습생들의 몫이다.
그래서 트레이너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 이연과 마찬가지로 연습생들에게 ‘이렇게 해라’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무게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 보니 오히려 멤버들 간의 마찰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리더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연이 최솔림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그 말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만약에 내가 주장하는 대로 하자고 해서 결과가 안 좋게 나온다면, 송연이 너한테 리더 자리 양보할게.”
“……뭐?”
“그러니까 단체 안무는 윤아 말대로 하자.”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나오는 최솔림의 모습에 오히려 한송연이 당황하고 말았다.
리더 완장을 걸겠다.
최솔림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인 적은 촬영 이후로 오늘이 처음이었다.
한송연은 최솔림을 향해 눈을 흘기며 물었다.
“자신 있나 보네.”
“우리가 준비하는 무대에 우리가 자신이 없으면 안 되잖아.”
지극히 옳은 말이다.
자신 없는 무대는 사람들 앞에 보여줄 필요도 없다.
억지 무대는 오히려 지금의 그녀들에겐 마이너스 효과밖에 없을 테니까.
“내가 리더 자리를 거는 만큼 송연이, 너도 뭔가를 걸어.”
“난 걸 만한 게 없는데?”
“없지 않아. 만약에 내가 이긴다면, 이다음 미션 때에도 내 의견을 따라줬으면 좋겠어. 불만 없이. 얌전히.”
“…….”
“어때?”
이연과의 면담 이후, 최솔림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주장에…… 아니, 도발에 한송연 역시 ‘알았어’라고 쿨하게 답하며 응했다.
“좋아. 한 번만 더 믿어볼게.”
“고마워, 송연아.”
“고마워할 필요 없어. 이건 어디까지나 서로 대가를 걸고 진행하는 내기니까. 나중에 가서 딴말만 안 하면 되니까.”
이렇게 해서 잠시나마 평화를 되찾게 된 동서남북 팀.
외부의 적들뿐만 아니라 내부의 불안 요소와도 겨뤄야 하는 이번 2라운드 2차 미션은 최솔림에게 만만치 않은 시련이 될 것으로 보였다.
* * *
미랑은 옆에 앉은 혜원과 이연에게 요즘 방송국에 다니는 맛이 난다며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는지, 혜원은 알고 있었다.
“SSS 녹화 때문이지?”
“네, 맞아요. 연습생들 보고 있으면 옛날 생각도 나고. 뭐랄까. 초심을 되찾으러 오는 느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래서 오늘은 어떤 식으로 촬영이 이루어질지 오기 전부터 기대되더라고요.”
지금은 MAYO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걸 그룹이 되었지만, 시작하자마자 바로 개구리가 되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다 올챙이였던 시절은 있다.
이미 전생에서 정점을 찍은 이연조차도 그렇다.
그러나 미랑과는 달리 이연은 ‘굳이 초심을 찾아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긴 했다.
자신의 위치에 따라 목표와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자리도 그렇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연은 연습생들과 마찬가지로 무대를 선보여야 더 잘 어울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심사 위원 자리에 앉아 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녹화가 시작하기 전에 오채일 대표가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어느 팀이 잘할 거 같아? 느낌 오는 팀 있어?”
“동서남북 팀이 이번에도 1위 하지 않을까요? 저번에 보니까 예상보다 훨씬 잘하던데.”
미랑의 뒤를 이어 혜원도 같은 생각임을 어필했다.
1라운드, 그리고 2라운드 1차 미션에서 보여준 최솔림과 동서남북 팀의 모습은 단연 최고였다.
하지만 이연은 확실하게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늘은 다를 수도 있어요.”
이연이 내려준 미션을 최솔림이 얼마나 잘 수행했을지가 관건이었다.
2차 미션은 1차 미션 때처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기 중이거나 이미 무대가 끝난 팀 소속 연습생들은 심사 위원들과 함께 다른 팀의 공연을 지켜보면 된다.
이전 1차 미션 당시에는 선배 그룹들의 곡을 커버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충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예상이 갔었는데.
이번에는 다섯 개의 팀 모두가 다 오리지널곡을 들고 와서 그런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연습 중간 과정을 보긴 했었지만, 그래도 생소한 건 그대로다.
강의찬이 곧장 첫 번째 팀을 소개했다.
“‘노력 100퍼센트’ 팀부터 만나보시겠습니다!”
오늘은 조이주 연습생의 팀이 첫 타자를 맡았다.
그녀들에게 배정된 곡은 일렉트로닉과 힙합 장르를 섞은 ‘High Return’이라는 노래였다.
1차 미션 때 그녀들의 멘토 역할을 맡았던 미랑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곡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어깨는 벌써부터 리듬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노력 100퍼센트 팀의 무대를 지켜보던 혜원이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역시 잘하네. 확실히 실력이 있는 팀이야.”
“그렇죠?”
미랑은 심사 위원들 중에서 가장 큰 호응을 보이면서 연습생들에게 기운을 북돋아줬다.
첫 번째 주자가 워낙 분위기를 잘 띄워준 탓에 본의 아니게 이다음에 무대에 오르게 된 팀에게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준비한 무대를 침착하게 잘 펼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대망의 동서남북 팀원들이 계단을 올랐다.
“둘, 셋.”
“안녕하세요! 동서남북입니다!”
다섯 명의 멤버들이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이연은 그녀들의 갈등이 원만하게 잘 해결되었는지 어떤지 아직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마이크를 들고 팀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따라 단합이 잘되는 거 같네요.”
그녀들의 표정, 그리고 그녀들의 서 있는 위치와 모습만 봐도 이연은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차 관문은 넘은 거 같고.’
이제 본무대가 어떨지 살펴볼 차례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동서남북 팀의 공연이 펼쳐졌다.
노력 100퍼센트 팀이 강렬하고 파워 넘치는 면을 강조했다면, 동서남북의 경우에는 청순함을 주 무기로 내세우며 심사 위원들의 마음을 공략해 나갔다.
미랑이 마치 연습생들의 모습에 홀린 듯 감탄사를 연달아 흘렸다.
“저런 콘셉트도 잘 어울리는구나. 예쁘네.”
가수라는 직업이 이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반면 이연은 사적인 생각을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려 했다.
그녀들의 무대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4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 흐른 뒤, 마무리 동작을 취하면서 공연의 끝을 알렸다.
심사 위원들은 연습생들을 향해 고생했다는 의미를 담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손뼉을 마주쳤다.
오채일 대표와 나현아 트레이너가 무대를 본 소감에 대해 심사 위원들을 대표해서 짧게 언급했다.
잘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연도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불화가 있었던 것치고는 이 정도면 나름 잘 수습한 편이다.
이번 무대는 이 점에 의의를 두고 넘어가는 게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