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제72화. 아운대(7)
바통을 이어받자마자 유키가 매서운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달리기 속도로만 따지면 지금까지 릴레이를 뛰었던 하니엘 전 주자들 중에서 가장 빨랐다.
그러나 지현도 만만치 않았다.
쉽게 질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그녀 역시 점점 속도를 붙였다.
“잘하고 있어, 지현아!”
“그대로만 가자!”
“조금만 더 힘내봐, 유키! 거의 다 따라잡았어!”
양궁 여자부 결승 대회에 버금갈 정도로 긴박한 싸움이 펼쳐졌다.
남은 지점은 이제 단 20미터.
1위냐, 2위냐. 여기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매우 크다.
특히나 스포츠의 세계에선 더욱 그렇다.
1위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유키의 얼굴에 승부욕이 가득 깃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이연은 쓴웃음을 삼켰다.
‘스위치가 제대로 켜졌네.’
유키의 진면목은 경쟁하는 판이 깔렸을 때 발휘된다.
내가 너한테는 절대 안 진다. 이런 마인드가 패시브로 장착되어 있는 멤버였기에 한번 승부욕에 불이 들어오면 능력치의 120퍼센트가 발동된다.
지금 트랙 위에서 그녀와 나란히 달리고 있는 지현은 이런 유키에게 아주 훌륭한 자극제 역할이 되었다.
선배고 나발이고.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아군 아니면 적군밖에 없다.
결승 지점에 거의 도착하려고 할 때, 두 여자는 동시에 앞쪽으로 가슴을 내밀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흰색 결승선이 펄럭였다.
중계진의 목소리에 흥분이 가득했다.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자, 누가 1위로 들어왔나요?
-글쎄요.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간발의 차이라서…… 일단 판정을 기다려 봐야 알 거 같습니다.
그만큼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뜻이다.
현장에 있는 모두가 판독 결과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과가 나왔습니다! 영상 천천히 보시면서 확인하겠습니다!
캐스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면에 지현과 유키의 모습이 들어왔다.
슬로우 모션으로 아주 느릿느릿하게 들어오는 두 사람.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둘 다 동시에 가슴을 쭉 내밀었다.
이때, 영상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길게 흘러나왔다.
반면, 중계진은 난색을 드러냈다.
특히나 남자 중계진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이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육상부 해설을 맡은 또 다른 스포츠 스타, 윤예미가 곤란해 하는 남자 중계진을 대신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압축해서 설명했다.
“지현 선수가 더 가슴이 커서 이겼네요.”
“…….”
“…….”
그들은 윤예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직설적으로 설명한 거 아니냐고.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녀의 해설만큼 이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한 것도 없었다.
거의 비슷하게 들어온 건 맞지만.
가슴 크기만큼 정말 간발의 차이로 아이비제이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은 웬만하면 유키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산 앞에선 괜히 깝죽거리지 말고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 * *
여자부 릴레이 경기가 모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유키는 여전히 저기압이었다.
우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위로에 나섰다.
“괘, 괜찮아. 어, 어쩔 수 없지, 뭐. 2등도 점수 크니까. 잘했어. 그치, 비아야?”
“언니 말이 맞아. 실력으로 진 게 아니고 그저 가슴이 작아서 진 거니까.”
위로하는 사람치곤 입꼬리가 너무 위로 올라가 있었다.
결국 유키가 참았던 욕지거리를 폭발시키려 했다.
우미가 시우와 협업해서 간신히 유키의 입을 틀어막은 덕분에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우미가 비아를 찌릿 노려봤다.
“누가 위로하랬지, 놀리라고 했니?”
“그래도 방송은 살렸잖아. 1위를 내주고 명장면을 챙겼으니까 이 정도면 이득이지. 우리가 우승한 아이비제이 선배님들보다 더 주목받을 걸?”
유키한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렇다고 비아의 예상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실제로 현장에서도 여자부 릴레이 경기 결승 결과에 대해 아직도 회자가 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방송 분량 제대로 챙긴 셈이다.
물론.
유키의 기분은 최악이지만 말이다.
비아가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마, 친구.”
“내가 아니라 네가 마지막 주자였어도 지현 선배님한테 한참 뒤처지게 나왔을 걸? 그나마 나니까 저렇게 나온 거지.”
“설마 내가 너보다 작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지?”
“맞는데? 이 껌딱지야!”
“뭐? 말 다 했어? 여기서 한번 재볼래?”
“그래, 해보자! 당장 벗어!”
우미와 시우가 화들짝 놀라면서 두 사람을 말리려 했다.
그러자 유키가 시우에게 회유책을 날렸다.
“시우, 너도 우리랑 동지잖아!”
“나, 난 아니거든?”
졸지에 두 사람과 같은 세트로 역이게 되었다.
우미가 참다못해 이연에게까지 도움을 청했다.
“연아, 얘들 좀 말려봐!”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글쎄 얘네들이…….”
이연의 등장에 막내즈 멤버들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연은 그룹 내에선 리더이면서 동시에 군기반장이다.
엄격하고 진지하고. 그리고 때로는 무서운 이연 앞에서 막내즈 멤버들은 금세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들의 기를 꺾는 건 이연이 평소에 자주 보여주던 무서움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지켜보고 있으니까 조심하도록 해. 알았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잔소리를 흘리는 이연의 모습에 막내즈 멤버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연의 가슴 쪽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우와…….”
“……언니, 부럽다.”
기대와는 다른 막내즈 멤버들의 반응에 이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부럽다는 거야.”
이연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할 용기를 지닌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엔 없었다.
* * *
아침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던 청팀과 백팀의 대결이 드디어 막판에 이르게 되었다.
남은 종목은 단 하나.
남녀 릴레이 경기뿐이다.
마침내 경기에 나서게 된 이연이 같이 릴레이 시합에 참가하게 된 팀원들과 함께 육상 트랙으로 이동했다.
이은솔이 팀원들의 출석 여부를 확인했다.
“서운이하고 연이, 인지, 앤서. 다 모였지?”
“네, 선배님.”
“근데 강의찬 선배님은 어디 계신 건가요?”
정작 이은솔과 같은 멤버인 강의찬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온다고 했으니까 금방 돌아올 거야. 마침 저기 오네.”
강의찬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후배들에게 사과했다.
이렇게 해서 여섯 명 전부 다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의 1차 목표는 예선 통과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적의 순서를 골라야 한다.
이은솔이 미리 자신이 구상한 주자 순서를 발표했다.
“앤서가 첫 번째 주자로 가고. 그다음 서운이가 두 번째로 뛰고. 세 번째는 인지, 네 번째는 의찬이. 다음은 연이, 마지막으로 나. 알았지?”
“네, 선배님!”
연습 때 확인했던 팀원들의 실력을 밑바탕으로 다시 주자 순서를 재조정했다.
그럼에도 이연은 여전히 여자 멤버들 중에선 마지막을 맡았다.
그만큼 그녀의 달리기 실력에 많은 기대가 걸려 있음을 뜻했다.
이은솔도 마찬가지다.
팬들은 하나 남은 남녀 혼합 릴레이 경기를 보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각 조의 첫 번째 주자들이 선발 라인에 섰다.
스피커를 통해 선수들이 이름과 소속 조가 소개되었다.
-6번 레인. 백팀 A조. 샤이걸스, 앤서!
앤서가 수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샤이걸스 멤버들과 그녀의 팬들은 목소리를 크게 높이면서 앤서에게 기운을 북돋아줬다.
물론 다른 그룹들도 똑같았다.
선발 주자들의 소개가 모두 끝나고.
심판이 스타팅 피스톨을 높게 추켜들었다.
격발 소리를 시작으로 마침내 예선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남자부, 여자부 릴레이 경기와 남녀 릴레이 역시 마찬가지로 2위 안에 들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백팀 A조가 속한 예선 그룹에는 남녀 릴레이 경기에서 우승할 확률이 가장 높은 청팀 A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앤서와 맞대결을 펼치게 된 청팀 A조 선발 주자, 미랑이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앤서도 나름 잘 뛴다고 평가받고 있었는데.
미랑은 그 이상의 기량을 보였다.
‘역시. 잘하네.’
미랑은 이연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압도적인 속도 차이를 보였다.
다음 주자에게 첫 번째로 바통을 넘겨준 미랑.
그럼에도 그녀는 거친 숨 한번 몰아쉬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한 상태를 보였다.
이 정도는 몸풀기도 안 된다는 뜻처럼 보였다.
다음으로 바통을 넘겨받은 멤버도 문제였다.
청팀 A조에는 캐리 원 멤버가 자그마치 3명이나 소속되어 있었다.
심지어 셋 다 작년 릴레이 경기 우승팀에 속했던 멤버들이다.
달리기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연이 바통을 넘겨받은 때는 이미 청팀이 반 바퀴 정도를 앞서가고 있을 때였다.
따라잡으라고 한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는 있었지만.
‘어차피 2위 안에만 들면 되니까.’
1위와 2위의 차이가 큰 것처럼, 2위와 3위의 거리 격차도 제법 컸다.
지금의 우세를 지키기만 해도 백팀 A조는 무난하게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다.
전력을 숨기기 위해서 이연은 일부러 평소보다 더 힘을 빼서 달렸다.
마지막으로 바통을 쥔 이은솔이 2위 자리를 끝까지 지키면서 다음 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경기를 마친 이은솔은 기뻐하는 청팀 A조를 바라보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승전에 진출하면 무조건 청팀 A조와 다시 맞붙게 될 텐데.
과연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이 쉽게 지워지지가 않았다.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연이 이은솔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저희가 반드시 이길 거예요. 선배님.”
확신에 가득 찬 그녀의 목소리에 이은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기죽을 필요가 없다.
한번 해보자.
좋아하는 여자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은솔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 * *
마침내 결승에 진출한 모든 팀들이 가려졌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백팀이…… 저희 말고 아무도 없는데요?”
인지의 말에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결승에 이름을 올린 4개의 팀들 중에서 백팀 소속은 오직 이연이 속한 백팀 A조뿐이었다.
다른 3개 팀은 전부 청팀 소속.
만약에 여기서 백팀이 1위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무조건 청팀의 승리다.
2위도 안 된다.
오직 1위. 이것만이 백팀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플랜이다.
강의찬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골치 아프네.”
미간에 주름이 생기려고 할 때쯤, 이은솔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까짓것 우리가 우승하면 되잖아. 안 그래?”
이은솔의 달라진 모습을 보면서 강의찬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아까 나보다도 더 걱정하던 녀석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있었지.”
이은솔이 시선이 맞은편에 서 있는 이연과 교차했다.
“승리의 여신님이 우리한테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
강의찬은 여전히 이은솔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