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제72화. 아운대(6)
요즘 아이돌들은 무대 위에서 격한 안무와 보컬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과 운동신경은 기본 이상으로 갖추고 있다.
아운대는 이런 아이돌들이 한자리에 모인 대형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한 종목이라도 우승을 거머쥔다는 건 사실 알고 보면 대단한 일이다.
리샤가 양궁 여자부 우승을 차지한 이후, 스태프들과 관중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다 하니엘을 주목하고 있다.
청팀 백팀 이전에 하니엘이라는 그룹에 속해 있으니까. 그녀들 입장에선 아무래도 그룹의 우선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 릴레이 경기는 어찌 보면 하니엘에겐 기회일 수 있다.
감독 역할을 맡은 이연이 예선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다시 한번 주자들의 순서를 확인했다.
“비아. 잠깐만 일로 와봐.”
“왜, 언니?”
거의 다 몸을 풀어가던 비아가 이연의 부름에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네가 첫 번째니까. 체력을 나중에 아낀다는 생각하지 말고 이번 판에 다 쏟아붓는다는 느낌으로 뛰어. 알았지?”
“예선에서 체력 다 써버리면 다음 경기에선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예선에서 떨어지면 다음 기회도 없어. 그러니까 매 경기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임하도록 해.”
듣고 보니 이연의 말이 맞았다.
금세 그녀에게 설득된 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답했다.
비아 말고 릴레이에 참가하는 다른 하니엘 멤버들에게도 똑같은 조언을 들려줬다.
예선 경기 시작까지 5분 전.
-잠시 후에 여자부 릴레이 경기가 시작될 예정이니, 예선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육상 트랙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안내 방송에 따라 팬들도 우르르 자리를 이동했다.
하니유들도 육상 경기가 열리는 쪽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른 팀들에게 질세라 목소리를 높이면서 열띤 응원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이비제이나 MAYO에 비하면 인원수가 적긴 하지만, 그래도 응원 소리로만 따지면 하니유들은 독보적인 활약상을 보이고 있었다.
리샤의 우승 덕분에 더 응원할 맛이 생겼다.
팬들의 쏟아지는 환호성에 중계진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현장에 하니엘을 응원하는 팬들의 목소리만 들리는 거 같네요.
-개인적으로 이번 여자부 릴레이 경기에도 하니엘 선수들이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니엘도 피지컬로 따지면 뒤처지는 그룹은 아니니까요.
-그렇죠!
해설위원의 목소리에 약간의 사심이 들어가 있었다.
이연이 지나가다가 얼핏 스태프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이번에 육상부 해설을 맡은 육상선수 출신의 남자, 서종빈이 하니엘과 아이비제이의 팬이라고.
원래는 아이비제이만 좋아했었지만, 걸파이트 시즌 2 방송으로 인해 하니엘에 입덕하게 되었다고 본인 입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밝히고 다녔다.
원래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 잘 출연하지 않는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아운대 출연에 흔쾌히 응한 이유가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두 걸 그룹이 참가하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리샤가 양궁 대회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기록하며 우승했으니.
하니유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하이텐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자부 경기에 앞서 첫 번째로 열리는 릴레이 경기라 그런 걸까.
여기저기서 기대감이 쏠렸다.
청팀에서는 아이비제이가 단독으로 팀을 구성해서 나왔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에서도 활약한 지현이 먼저 하니엘 후배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얘들아!”
“어머, 선배님!”
“안녕하세요!”
대선배의 등장에 하니엘 멤버들은 예를 갖췄다.
“컴백 준비하고 있다면서?”
“네, 맞아요. 선배님.”
“준비는 어때? 잘되어가고 있니?”
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멤버들을 대신해 답했다.
“네. 소속사 내에서도 이번에 노래하고 안무 잘 뽑혔다고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다행이네. 컴백하기 전에 이연이가 솔로로 사람들 기대치를 잘 끌어왔으니까. 앨범만 잘 뽑아내면 될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저희도 선배님처럼 똑같이 말했어요.”
이연의 솔로 활동이 과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지. 이건 컴백해서 직접 확인해 보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컴백에 관한 이야기도 좋지만. 지금 당장의 일에 먼저 집중하는 게 우선이다.
“이연이는 여자부 경기엔 안 나오는 거야?”
이연이 지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남녀 혼합 릴레이에 나가기로 했어요.”
아주 잠깐의 순간, 이연은 지현이 안도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다행이다. 너 나온다고 하면 우리가 무조건 질 거 같아서 걱정했는데.”
이연의 탈인간적인 운동 능력은 이미 걸파이트 시즌 2에서 수도 없이 봐 왔다.
이렇다 보니 지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이연의 존재가 너무 독보적이어서 그렇지, 사실 하니엘 멤버들 개개인별로 놓고 봐도 운동신경이 평균 이상은 간다.
“아무튼 서로 열심히 해보자.”
“네, 선배님!”
“조금 이따가 뵐게요!”
백팀 사이를 가로질러 다시 청팀 진영으로 돌아가는 지현의 모습을 보면서 유키의 표정이 달라졌다.
“설마 염탐이라도 하려고 온 건 아니겠죠?”
의심을 기본 패시브로 장착하고 있는 유키다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 보니까 반가워서 그러신 거겠지.”
그리고 사실 이어달리기에 정찰은 큰 의미가 없다.
축구나 농구, 배구 같은 전략적인 요소가 다분한 구기 종목은 염탐 유무로 인한 차이가 굉장히 클 수 있다.
하지만 달리기는 상대적으로 그렇진 않다.
누가, 몇 번째 주자로 나서느냐. 이 정도가 다다.
그나마 이것도 사전에 다 공개가 되는 거였기 때문에 크게 의미는 없다.
이어달리기에서 견제할 만한 상대는 단연 아이비제이.
남성부에서는 캐리 원이 우승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 여성부 쪽에서 최대한 많은 점수를 따내야 한다.
그래야 백팀의 우승 가능성이 높아진다.
* * *
마침내 시작된 여성부 릴레이 경기.
예선전을 통과하기 위해선 최소 2위 안에는 들어야 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니엘은 예선전에서 아이비제이와 격돌하는 일은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이게 다 시우의 제비뽑기 운 덕분이었다.
이 덕분에 시우는 의도치 않게 그룹 내에서 예선전 승리의 여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반면, 아이비제이와 같은 팀에 걸린 걸 그룹들의 얼굴엔 벌써부터 패색이 짙게 깔렸다.
중계진도 예선 A조에 포함되어 있는 아이비제이를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아이비제이 선수들이 작년의 여성부 릴레이 우승팀 아닌가요?
-예, 그렇죠. 그것도 압도적인 기량으로 우승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번에도 과연 작년의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해 볼 만하겠네요.
심판이 스타팅 피스톨을 하늘 방향으로 높게 추켜올렸다.
탕-!
출발선에 선 걸 그룹 멤버들이 앞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아이비제이 측 첫 번째 주자는 메인보컬, 미수였다.
초반부터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이연은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잘 뛰네.’
자세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발동작에 자신감이 넘쳤다.
순식간에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렇게 마지막 주자를 맡은 지현까지 무사히 릴레이가 이어졌다.
시작부터 내내 아이비제이는 단 한 번도 선두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지현이 가슴을 쭉 내밀면서 결승 지점을 통과했다.
예선전 1위로 다음 라운드 진출을 확정 지은 아이비제이.
그녀들을 응원하는 팬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이연이 비아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봤지? 너도 초반에 저렇게 해야 돼. 알았지?”
“……노력은 해볼게.”
잘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하니엘이 참가하는 예선 B조 경기가 시작되었다.
스타팅 피스톨이 다시 한번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비아는 이연이 말했던 것처럼 시작부터 전력질주를 선보였다.
이연의 조언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걸까.
비아의 빠른 스타팅에 다른 주자들은 맥을 못 췄다.
릴레이 경기에선 첫 주자가 마지막 주자만큼 굉장히 중요하다.
먼저 앞서 뛰어가면 후발 주자들에게 그만큼 따라잡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심어줄 수 있고.
이 부담감은 결국 조급함과 심리적 위축감을 낳는다.
그래서 이연은 비아에게 뒤를 생각하지 말고 모든 기력을 다 쏟아부으라는 조언을 했던 거였다.
이연의 조언 덕분에 하니엘은 손쉽게 예선 경기를 통과했다.
여기저기서 예선 통과와 탈락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사이.
순식간에 여자부 릴레이 결승 경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1번 레인에는 아이비제이가.
그리고 바로 옆 2번 레인은 하니엘이 배치되었다.
이연은 시작 전에 멤버들에게 다른 레인 침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예선에서 실제로 이 룰을 어긴 팀이 나와서 실격 처리를 당했기 때문이다.
빨리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실력당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시 응원석으로 돌아온 이연은 마음 편히 간식거리를 섭취하고 있는 리샤를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아까 점심 먹었는데 또 먹어?”
“어차피 이다음에 내가 뛸 일은 없으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먼저 경기를 뛴 자의 여유를 한껏 보이면서 여자부 릴레이 경기 관람에 나선 리샤.
“이제 시작하려나 봐.”
심판이 스타팅 피스톨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비아가 긴장한 모습으로 가볍게 몸을 풀면서 스타트 라인에 섰다.
주자들뿐만 아니라 청팀 백팀에 소속된 아이돌들, 그리고 응원하는 팬들 모두가 다 긴장감을 억눌렀다.
시끌벅적했던 경기장이 잠시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준비.
탕! 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첫 번째 주자들이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미수와 비아, 두 사람이 거의 비등비등한 속도를 뽐내면서 선두 다툼을 벌였다.
다음 주자를 맡은 여솜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녀도 열심히 분발했지만, 아이비제이의 두 번째 주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차이가 조금씩 벌어지더니, 우미 차례에서는 더 가속화되었다.
“미, 미안해, 시우야……!”
“괜찮아요, 언니.”
바통을 넘겨받은 반드시 역전하겠다는 표정으로 뛰기 시작했다.
시우의 저력이 빛을 본 걸까. 벌어졌던 격차를 다 따라잡는 기염을 토해냈다.
“나이스, 시우야!”
“막내즈, 파이팅!!”
경쟁을 벌이고 있는 아이비제이조차도 시우의 달리기 솜씨에 경악했다.
“뭐가 저렇게 빨라?”
“미쳤네, 미쳤어.”
“언니, 뭐 하는 거야! 이러다가 역전당한다고!”
한참 뒤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후발 주자가 순식간에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니까, 아이비제이 입장에선 발을 동동 굴릴 수밖에 없었다.
열띤 경쟁에 장내도 시끌시끌해졌다.
이제는 아이비제이와 하니엘, 두 팀의 1위 경쟁으로 서서히 굳혀지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주자들이 준비에 나섰다.
다섯 번째 선수를 맡게 된 지현과 유키가 바통을 건네받기 위해 동시에 손을 뻗었다.
“달려! 지현아!”
“유키야, 힘내!!!”
마침내 두 사람에게 바통이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