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제72화. 아운대(8)
아운대 마지막 종목 결승전을 앞두고 현장에 긴장이 감돌았다.
앤서가 스타트 지점에서 몸을 풀며 강력한 우승 후보 팀인 청팀 A조 쪽을 바라봤다.
청팀 A의 첫 번째 주자는 뒤에 든든한 팀원들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들 입장에선 우승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예선전부터 결승 직전 경기까지. 단 한 차례도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전승 우승을 노리는 무적의 청팀 A조.
반면, 백팀 중 유일하게 결승 진출에 성공한 탓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된 백팀 A조.
같은 A조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극명하게 갈렸다.
모든 주자들의 소개가 끝나고.
심판이 스타팅 피스톨을 만지작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첫 번째 주자들이 몸을 낮췄다.
중계진조차 숨을 죽인 채 심판의 시작 신호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뒤.
탕!
단발의 총성과 함께 각 선발 주자들의 힘찬 스타팅이 펼쳐졌다.
“앤서 선배님, 힘내세요!”
“백팀 파이팅-!”
백팀의 유일한 희망으로 거듭나게 된 A조 주자들.
앤서는 이런 부담감을 떠안은 채로 빠르게 발을 놀렸다.
걸파이트 시즌 2에서 무대마다 이연에게 놀라움과 신선함을 선사했던 그룹이 바로 샤이걸스였다.
아운대에서도 역시 샤이걸스는 이연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을 선사했다.
‘갈수록 점점 잘 뛰는 거 같은데.’
처음 팀원들끼리 모여서 릴레이 연습을 할 때에도 앤서가 의외로 잘 뛴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는데.
실전에서, 그것도 결승전에서 지금까지 보여준 것 이상의 기량을 뽐내는 게 대단했다.
심지어 그녀가 선두다.
앤서의 빠른 달리기 속도에 다른 청팀 선발 주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반면, 백팀은 초반 기세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앤서에게 더 큰 응원의 목소리를 보태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두 번째 주자인 서운에게 바통이 넘어갔을 때.
비로소 청팀 A조의 무서움이 시작되었다.
-청팀 A조! 미친 듯이 앞서 나갑니다!
-역시! 이번에도 캐리 원 멤버들이 해주네요!
-괜히 아운대 MVP 팀이 아니죠!
중계진 역시 캐리 원의 활약을 집중 조명했다.
어마어마한 속도에 서운은 크게 당황했다.
순식간에 캐리 원 멤버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다음, 여자 멤버 두 번째 주자들이 바통을 받을 준비에 나섰다.
2등으로 바통을 넘겨받은 인지가 미랑을 따라잡기 위해 있는 힘껏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랑은 여자 아이돌들 중에서 최상위권에 달하는 피지컬을 지녔다.
이런 미랑을 따라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의찬과 이은솔이 수차례 입맛을 다셨다.
긴장감으로 인해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탓이었다.
반대로 이연은 여기까지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역전하면 돼.’
남은 주자는 단 세 명.
강의찬, 권이연, 그리고 이은솔.
이 세 명으로 역전의 기회를 노려봐야 한다.
마침내 강의찬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벡스 멤버들이 강의찬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의찬아,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 내면서 달려-!”
“예비역 아이돌의 힘을 보여줘라, 의찬아!”
강의찬은 군대에서 전역한 지 얼마 안 됐다.
구보는 질리도록 했을 터.
그래서인지 강의찬의 차례가 되었을 때, 점점 청팀 A조와의 차이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의찬 한 명만으로는 이미 많이 벌어진 거리 차이를 원상 복귀시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직 주자는 두 명이나 더 남아 있으니까.
“이연아!”
그녀는 강의찬이 건네준 바통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먼저 출발한 혜원을 따라잡기 위해 이연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관중석뿐만 아니라 중계진 역시 난리가 났다.
-권이연 선수! 빠릅니다, 빨라요!
-달리기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저 정도면 거의 프로급인데요?
육상 선수 출신인 해설위원들이 봐도 권이연의 달리기 속도는 일반인 수준이 아니었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평균을 크게 웃돌 만한 발군의 솜씨였다.
반면, 혜원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은 앞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뒤에서 이연이 따라오는 기척이 점점 가깝게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이연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혜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거리를 다 따라잡았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이연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역전! 역전입니다!
-하니엘의 권이연 선수가 다시 주도권을 가져왔습니다!
이대로 계속 달린다면 우승은 무조건 백팀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연이 마지막 주자가 아니었다.
이은솔이 서서히 앞을 향해 뛰면서 이연에게 바통을 넘겨받을 준비를 마쳤다.
“선배님, 부탁드려요!”
권이연이 내준 바통을 붙잡은 이은솔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면서 말했다.
“이 선배 믿고 기다리고 있어!”
이은솔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권이연이 가져온 1등의 위치를 결승 지점 통과할 때까지 반드시 지켜낼 것.
작년 MVP 그룹, 캐리 원을 상대로 선두를 유지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미션이지만, 그래도 이은솔은 어떻게든 해낼 생각이었다.
이연에게 실망을 준 남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은솔 선수! 온 힘을 다해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캐리 원의 최훈 선수도 만만치 않네요!
-두 보이 그룹의 대결! 그 승자는 누가 될까요!
장내가 시끌벅적해졌다.
최훈은 이은솔과의 거리를 좁혀가면서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두 사람의 간극이 좁아지고 있었다.
남은 거리는 이제 20미터.
10미터.
5미터.
최훈이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바통을 쥔 이은솔의 손에 힘이 실렸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마침내 도착 지점이 보였다.
크게 호흡을 내쉰 이은솔은 있는 힘껏 몸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최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은솔, 최훈 선수가 거의 동시에 도착한 거 같은데요!
-이것도 영상으로 판독해 봐야 결과를 알 수 있겠네요.
각 팀 A조들의 선두 경쟁 결과에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형 모니터에 몇 분 전의 이은솔과 최훈의 모습이 담겼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뛴 두 남자.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사람의 정체는.
-이은솔 선수입니다! 백팀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우승 소식에 백팀에 소속된 아이돌들과 이들을 응원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잘했어요, 은솔 선배!”
“은솔아, 진짜 멋졌다!”
“미쳤네, 미쳤어! 지는 줄 알았잖아!”
여기저기서 감격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와중에 이은솔은 오직 단 한 명, 이연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먼저 숨을 가다듬은 이연이 이은솔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선배님.”
이 말과 이연의 미소.
이것만으로도 이은솔에게는 우승보다 더 값진 보상이 되었다.
* * *
남녀 릴레이 팀의 대활약으로 인해 백팀이 아슬아슬하게 올해 아운대 승자 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백팀 대표로 나선 이은솔이 다수의 카메라 앞에서 소감을 전했다.
“팀 구분 없이 오늘 아운대에 참가한 모든 아이돌 선후배 여러분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준비해 주신 제작진 여러분들도 정말 수고하셨고요. 특히 먼 곳에서 달려와 준 팬 여러분들, 정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장 선배답게 멘트도 깔끔했다.
이제 이번 아운대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준 MVP 그룹을 발표할 차례다.
MC가 목소리를 크게 높이면서 MVP의 정체를 알렸다.
“하니엘 팀입니다! 축하합니다!”
양궁과 남녀 릴레이에서 우승하고 여자 릴레이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백팀의 승리를 견인했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는 활약상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이견 없이 모두가 다 하니엘을 MVP 팀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하니엘 멤버들이 방금 이은솔이 올랐던 단상으로 향했다.
그녀들의 등장에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예쁘다, 하니엘!”
“고생했어-!”
선후배들의 격려 메시지가 쏟아졌다.
일곱 명의 멤버들 중에서 누가 대표로 소감을 전할지.
굳이 상의가 필요 없었다.
“연아. 마이크 여기 있어.”
우미가 자연스럽게 이연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이런 일이 있으면, 매번 이연이 팀 대표로 입을 여는 편이다.
“응원해 주신 팬 여러분들에게 먼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에 저희가 이렇게 맹활약을 펼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아운대뿐만 아니라 여러 방송 무대에서도 최선을 다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녀들의 세 번째 앨범 발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것을 염두에 둔 이연의 소감을 끝으로 아운대 폐회식이 마무리되었다.
* * *
대기실로 돌아온 이연은 피곤해하는 하니엘 멤버들을 다독였다.
“큰 거 하나 끝냈으니까. 오늘은 연습 건너뛰고 숙소로 들어가서 쉬자. 알았지?”
이연의 말에 비아가 헛숨을 삼켰다.
“언니. 설마 오늘도 연습할 생각이었어?”
“어.”
“……진짜 로봇이라니까, 로봇.”
지치지도 않는 체력을 지닌 이연을 보면서 비아는 다시금 확신했다.
그녀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고.
그런 이연이 아군이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대기실을 벗어나려고 할 때쯤.
이은솔이 이연을 찾았다.
“연아.”
“네, 선배님.”
“오늘 고마워. 네 덕분에 달리기 우승할 수 있었어.”
이연이 없었더라면 이은솔은 다른 팀원들처럼 경기에 나서기 전부터 사기가 잔뜩 꺾였을지도 모른다.
이연이 할 수 있다고 말을 해주니까. 그래서 이은솔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연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님께서 잘하신 덕분이죠.”
“그래도. 너한테 꼭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저기, 그…….”
이은솔이 머리를 긁적였다.
멋쩍은 표정을 짓던 그가 결심을 굳힌 듯 오른쪽 주먹을 꽉 쥐면서 말했다.
“나중에 같이 식사라도 한번 할까? 내가 쏠게.”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이은솔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을 하니까 이연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언제 볼까요?”
“너 편한 대로 날짜 잡으면 돼.”
“아니에요. 저희는 아직 앨범 활동 시작 안 했으니까요. 제가 선배님 일정에 맞출게요.”
“그러면…… 알았어. 내가 일정 확인해 보고 따로 연락 줄게.”
“네, 선배님.”
이연과 따로 식사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되어서일까.
이은솔은 가벼운 걸음으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니엘 멤버들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데이트네.”
“데이트야.”
“누가 봐도 데이트지.”
유일하게 단 한 사람, 이연만 홀로 부정했다.
“데이트가 아니라. 그냥 밥 한 끼 먹자 정도일 뿐이야.”
비아가 아니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걸 데이트라고 하는 거잖아.”
“…….”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 연예계에서는 이은솔, 권이연이 서로 친한 선후배라고 잘 알려져 있으니까.
그러면 같이 밥도 한 끼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가.
‘설마 또 스캔들 기사 같은 게 나겠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