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제60화. 견제(1)
센터로 지명을 받은 인지나 이연, 두 사람만 놀란 게 아니었다.
스튜디오에 있는 모두가 다 놀랐다.
심지어 스태프들까지.
황 PD 또한 혜원의 기상천외한 지명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작가가 오디오가 섞여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황 PD에게 조용히 물었다.
“혜원 씨가 왜 자기 팀원을 놔두고 인지 씨를 지명한 걸까요?”
“아마…… 하니엘을 견제하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황이전 PD는 방송가에서 꽤나 오랫동안 활동해 온 사람이다.
이미 걸파이트라는 걸출한 경연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사람이기도 했기에 아이돌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벌이는지. 이 정도는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이번의 경우도 그랬다.
물론 처음부터 단박에 알아차린 건 아니었다.
이연의 눈길이 가늘어지는 모습을 모니터 화면을 통해 봤을 때. 그제야 황이전 PD는 혜원의 이런 선택이 하니엘을 견제하려 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선택임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하니엘보다는 MAYO를 견제하는 게 좋지 않나요? 2차 미션에서도 1등이었고. 요즘 기세 좋잖아요.”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 사이에선 MAYO보단 하니엘을 더 견제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었나 보지, 뭐.”
이것까진 황 PD도 정확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혜원이 하니엘을…… 아니, 이연이라는 괴물 신인을 견제하는 단계까지 왔다는 거였다.
“아무튼 참 대단해.”
“혜원 씨가요?”
“아니, 이연 씨 말이야.”
아이비제이 트윙클이든, MAYO든.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선배 그룹들은 가장 막내 그룹인 하니엘을 경쟁 상대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션이 진행될수록 하니엘의 존재감은 나날이 커져갔다.
심지어 1라운드 최종 승자가 되기도 했으니까.
이때 아니면 파이널 라운드에서 하니엘의 성장세를 꺾을 기회가 없다고 혜원은 판단했을 것이다.
“이번 라운드 미션, 아주 재미있을 거야.”
어느 쪽이 이기든, 황 PD는 딱히 상관없다.
재미만 있다면 시청률은 보장되기 때문이다.
* * *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파트 미션을 수행할 팀들이 확정되었다.
원래는 촬영이 끝나면 각자 숙소나 회사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스케줄이 있는 경우에는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움직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같은 그룹끼리 미션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니라 타 그룹이, 그것도 여러 개의 그룹에서 온 멤버들이 모여서 팀을 이뤘기 때문에 언제 또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기왕 모인 김에 곡 선정이라도 정하고 헤어지는 게 좋아 보였다.
상의를 하기 위해 바로 각 그룹의 팀원들은 부랴부랴 방송국 회의실을 찾았다.
이연이 속한 댄스 2팀은 3층 소회의실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연과 리샤, 인지, 미수, 채미, 그리고 하영까지.
총 여섯 명의 아이돌이 어색한 표정으로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가장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미수였다.
회의실 내에 카메라가 설치되는 동안, 미수는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자 먼저 후배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 같이 한배에 올라타게 되었으니까. 서로 웃으면서 즐겁게 무대 준비해 봐요. 어때요?”
“네, 선배님!”
미수는 나름 친근하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대선배님 앞이라서 그런지 후배들의 반응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본의 아니게 기강 잡기를 해버린 미수.
그녀와 친한 스태프 한 명이 농담조로 물었다.
“미수 씨. 벌써 후배들 군기 잡으시는 건가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미수는 필사적으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 중에서는 미수가 가장 성격이 착하고 유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게다가 세 멤버들 중에선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고.
이연은 슬쩍 떠보듯 그녀에게 물었다.
“저는 혜원 선배님이 미수 선배님을 센터로 보내실 줄 알았는데. 놀랐어요. 저는 미수 선배님의 센터, 기대하고 있었는데.”
미수가 어색한 미소를 띠면서 이런 말을 흘렸다.
“언니들이 뭔가 생각이 있었나 봐요. 저한테는 미리 섭섭해 하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언니들이 구상한 작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연은 이 아이디어가 혜원에게서 나왔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혜원의 지명이 하니엘, 그중에서도 이연을 견제하겠다는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을 미수도 아는지 모르는지 이연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결과적으로는 인지가 센터에 서게 되었고. 댄스 2팀 멤버들은 이에 맞춰서 안무 동작을 구상하면 된다.
한편. 센터에 서게 된 인지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희 멤버들도 ‘왜 언니가 센터가 된 거야?’라고 그러던데.”
“인지 씨면 센터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너무 주눅 들지 마세요.”
미수의 응원에 인지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감사의 뜻을 비쳤다.
CDP 입장에선 혜원의 결정으로 인해 큰 덕을 보게 되었으니까.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카메라가 모두 설치되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회의는 선배인 미수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곡은 어떤 걸로 하는 게 좋을까요?”
댄스 팀은 보컬 팀과 다르게 직접 노래를 부를 필요가 없다.
안무만 선보이면 되는 거였기 때문에 곡 선택의 폭이 넓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후배들 중에서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 눈치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눈앞에 대선배님이 계시니까.
먼저 의견을 표출하기가 많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수도 이걸 알아차린 모양인지,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후배들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이디어 회의니까 오히려 자기 생각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 주시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좋은 곡 알고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리샤가 이연을 툭툭 건드렸다.
이런 거 있으면 보통 이연이 먼저 스타트를 끊어주곤 했기 때문이다.
한숨을 푹 내쉰 이연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퀸 메이즈의 ‘retro’라는 곡은 어떨까요?”
“그거, 팝송이죠?”
“네.”
이연은 노래를 듣는 데에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댄스, 힙합, 락, 재즈. 심지어 판소리까지도 듣곤 한다.
다양한 음악들을 접해야 더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음유시인으로 한창 활동할 때 역시 그랬다.
미수는 이연이 말한 ‘retro’가 무슨 곡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은 금시초문이었다.
미수가 리샤를 가리켰다.
“리샤 씨는 미국에서 사셨으니까. 들어본 적 없나요?”
“네. 어렸을 때부터 K-pop만 열심히 듣다 보니…… 그쪽은 잘 몰라요.”
영어 실력도 간당간당하다.
이 와중에 팝송까지 섭렵할 자신은 없었다.
“그럼 노래를 들어보는 게 낫겠네요.”
미수가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면서 본인의 스마트폰으로 이연이 말한 팝송을 재생시켰다.
제목답게 비트에서 옛날 감성이 물씬 묻어 나왔다.
그럼에도 촌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옛날의 향수를 품고 있는 세련된 곡.
이런 표현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retro’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중독성이 느껴지는 리듬에 벌써부터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이고 있었다.
미수도 오랜만에 퀸 메이즈 곡을 들어서 좋은 모양인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선보였다.
“듣고 나니까 확실히 댄스 퍼포먼스 곡으로 사용하긴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그리고 콘셉트 짜기도 쉬울 거 같고요.”
복고풍 콘셉트에 딱 어울릴 만한 노래였다.
“혹시 다른 추천곡도 있나요?”
미수가 이연에게 추가로 가지고 있는 아이템에 대해 물었다.
“레빌의 ‘Uninstall’은 어떨까요?”
“아, 그 노래? 알죠!”
이번에도 미수는 아는 곡이 나왔다면서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퀸 메이즈는 그래도 한국에 나름 마니아층이 있는 가수 팀이다.
그러나 레빌의 경우에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팝송 가수다.
그래서 이연은 미수가 이 가수팀의 노래를 알고 있다고 말할 때, 꽤나 의외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이 즐겨 듣는 팝송 목록에 이연이 말한 ‘Uninstall’이란 곡이 담겨 있었다.
“선배님, 팝송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저는 오히려 한국 노래보다 팝송을 듣고 자라왔거든요.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팝송 마니아라서요.”
리샤와는 정반대의 삶을 걸어왔다.
‘Uninstall’은 앞서 들었던 ‘retro’와 전혀 상반된 분위기를 풍기는 곡이었다.
비트도 세고. 하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돌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곡 괜찮은데요?”
“연이가 좋은 팝송 많이 알고 있네.”
채미도 이연의 선곡 리스트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계속해서 아이디어 회의를 이어가다 보니, 이연 혼자서 다섯 곡이나 제안하고 있었다.
너무 자기 혼자만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내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연은 다른 팀원들에게 기회를 양도했다.
“미수 선배님은 저희한테 추천할 만한 곡 없나요?”
이연 못지않게 팝송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괜찮은 곡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이번에는 미수가 이연한테서 바통을 넘겨받아 여러 개의 팝송들을 추천해 줬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팝송 경청 대회.
그러나 다른 멤버들은 팝송에 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주로 미수와 이연이 회의를 주도하게 되었다.
오랜 아이디어 회의 끝에.
“그러면 이연 씨가 처음에 말했던 ‘retro’로 정하죠.”
“네!”
처음에 들은 곡이 선물한 그 여운이 아직도 팀원들 마음속에 남았던 모양인지, 돌고 돌아 이연의 아이디어가 채용되었다.
콘셉트 짜기도 쉽고. 그리고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팝송이라는 장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럼 선곡 회의는 이걸로 마치고…… 연습은 어떻게 할까요? 스케줄 조정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미수의 말에 박도수 매니저가 카메라 뒤에서 목소리를 냈다.
“그건 저희 매니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일정까지 맞추려면 회의 시간이 길어질 거 같아서요.”
이 이후에는 하니엘과 원더존, 두 그룹이 따로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슬슬 이동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여기서 마쳐야 했다.
아이디어 회의 촬영까지 모두 마친 뒤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댄스 2팀.
그전에 미수가 이연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이연 씨. 저희, 같이 열심히 해봐요.”
“네, 선배님.”
“인지 씨도요.”
미수가 근처에 있던 인지에게도 미소를 보냈다.
댄스만큼 센터가 중요한 분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인지의 얼굴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아니면.
‘다른 팀에 의해서 강제로 센터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 그럴지도 모르지.’
댄스 2팀의 연습 과정이 어떻게 흘러갈지.
이연은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