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제45화. Tug of war(2)
하니엘이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인 걸그룹이긴 하지만, SSS를 시작으로 워낙 단기간 내에 무대 준비며 방송 활동까지.
많은 경험을 한 덕분인지 짧은 기간에도 금세 안무를 익히는 모습을 보였다.
은서해 트레이너가 멤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프로 다 됐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였다.
데뷔 앨범 준비할 때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 신인 특유의 어색함이 많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어디 내놓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그런 당당한 걸그룹 아이돌이 되어 있었다.
리샤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하루에 반절 넘는 시간을 안무 연습에 투자했으니까요. 익숙하지 않으면 오히려 큰일 아니에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
대신에 얻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워낙 하드하게 안무 연습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근육통은 기본으로 깔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니엘 멤버들에게는 다른 걸그룹이 가지지 못한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리더, 이연이었다.
“언니. 저, 종아리 쪽 한번 마사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유키의 부탁에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지? 알았어. 엎드린 채로 누워봐.”
“이렇게요?”
“응. 그렇게.”
가느다란 유키의 왼쪽 종아리를 양 손으로 만져주기 시작했다.
주물, 주물, 주물.
겉으로 봤을 때에는 그녀의 안마에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만약 조금이라도 마법을 배운 사람이었다면, 이연의 양손에 마나 덩어리들이 가득 맺혀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나를 이용하면, 뭉친 근육을 자연스럽게 풀어줄 수 있다.
안마를 받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모양인지, 유키의 눈커풀이 지구의 중력에 따라 아래로 향했다.
꾸벅꾸벅.
어느새 잠에 빠져들게 된 유키를 보면서 여솜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연이 안마는 진짜 신기하다니까. 받으면 무조건 잠들어. 무슨 수면제도 아니고.”
은서해는 이런 내용을 처음 들었다.
“연이가 안마를 그렇게 잘하는 편이야?”
“네. 트레이너님도 한번 받아보세요. 저희들도 한 번씩 다 받아봤는데, 돈 주고 받는 안마보다 연이가 해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고 좋아요.”
“그래? 그럼 나도 한번 받아볼까? 연아. 해줄 수 있어?”
이연은 문제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유키도 잠들어버렸고.
새로운 타깃을 찾을 차례였다.
은서해는 어깨 쪽을 맡기기로 했다.
“최대한 힘 빼시고요.”
“이, 이렇게?”
“네. 그대로 가만히만 계시면 돼요.”
마나 덩어리에서 풍겨나오는 따스함이 은서해에게 졸음의 나라로 직행하는 티켓을 선물했다.
곧바로 꿈나라로 떠나버린 그녀.
잠이 든 은서해를 보면서 여솜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직 연습 시간 남지 않았어?”
그런데 트레이너를 꿈나라로 보내버리고 말았다.
이연의 안마에 이런 단점이 있을 줄은 몰랐다.
* * *
컴백 일자도 슬슬 다가오고. 그전에 뮤직비디오 촬영도 얼른 진행해야 했다.
뮤직비디오는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서 촬영될 예정이다.
짧은 기간 동안 5분에 가까운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 위해선 새벽 대기는 기본이었다.
첫날 오전 촬영은 멤버들 모두가 다 모여서 단체 안무를 펼치 장면을 위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3번 중 2번은 스튜디오 촬영으로. 그리고 다른 1번은 야외에서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찍기로 했다.
“노래 나갑니다! 스탠바이…… 큐!”
촬영감독의 외침에 멤버들이 그동안 열심히 갈고닦은 안무를 펼쳤다.
데뷔 초창기 때와 달리, 카메라 앞에 서는 경험을 많이 쌓아서 그런지 이제는 특별히 긴장감 때문에 몸이 얼어붙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고난이도의 안무 동작도 실수 없이 선보이는 멤버들을 한 남자가 카메라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의상으로 갈아입고 두 번째 스튜디오 촬영에 들어가려고 하던 시점에서 멤버들은 그제야 남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우재 선배님!”
군대에서 무사히 전역하고 본격적으로 다시 배우 활동에 들어서게 된 정우재.
그가 오늘 하니엘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방문한 이유가 있었다.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기 위해서였다.
정우재는 오채일 대표와 형동생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그래서 오채일 대표는 특별히 정우재에게 연락해서 하니엘의 컴백에 힘을 좀 보태달라고 SOS 요청을 했다.
그 힘을 보태는 형태가 바로 뮤직비디오 출연이었다.
정우재는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상당히 많은 인기를 끌던 남배우다.
그가 뮤직비디오에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연과 시우는 정우재와 이미 한 번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처음이다.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우선은 멤버들과 친해지는 것부터 먼저 진행하기로 했다.
다행이 이연과 시우 덕분에 어색함은 빨리 사라질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에 헤어 스타일링까지 받고 나온 정우재를 보고 있자니 멤버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선배님, 머리 많이 자라셨네요!”
“저번에 막 전역했을 때 기사 보니까 머리 엄청 짧으셨던데.”
이때 리샤가 짓궂은 어투로 말했다.
“남자는 야한 상상 많이 하면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정우재가 크게 당황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정말로.”
“웃자고 한 말이에요, 선배님.”
아무리 정우재가 이들보다 선배라곤 하지만, 일 대 다수로 있으니가 그녀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서는 확실히 선배답게 그녀들을 리드해 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촬영에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서 곧바로 촬영 감독이 NG를 선언했다.
잠시 숨 돌리는 틈을 이용해서 정우재가 잠깐 상대 배역을 맡은 우미에게 짧게 연기 지도를 해줬다.
“우미야. 상대방 눈을 똑바로 마주보는 게 좋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눈 안 피하니까.”
“죄송해요, 선배님. 이런 게 처음이라서…….”
“그럴 수 있어. 그래도 너희 뮤직비디오 촬영하는 거니까. 어려워도 노력해 보자. 알았지?”
“네!”
연기 조언뿐만 아니라 멘탈도 붙잡을 수 있도록 다독여줬다.
우미를 필두로 하니엘 멤버들이 한 명씩 각각 돌아가면서 정우재와 연인 역할을 소화했다.
리샤와 비아는 장난기 많은 여자친구를, 여솜과 시우는 부끄럼이 많은 성격의 여자친구를 표현해 냈다.
멤버들이 일곱이나 되니까. 일곱 명 다 똑같은 눈빛과 똑같은 표정, 똑같은 행동으로 연기를 하면 개성이 사라진다.
그래서 촬영 감독은 일부러 각 멤버들의 실제 성격이 묻어나오도록 캐릭터성을 보여주는 쪽으로 연출 방향을 잡았다.
이연이 보기에도 이 방식은 나이스였다.
마지막으로 이연의 차례.
이은솔보다도 좀 더 큰 키를 지닌 정우재가 상대 역할을 맡게 되다 보니 이연은 그와 마주서서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다.
이연의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도 말이다.
촬영 감독은 두 사람의 투샷을 모니터로 직접 확인하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딱 설렘 가득해지는 키 차이네요. 좋습니다.”
정우재는 군인이었을 때 이연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이연이 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거 같다고 말이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푹 빠져드는 매력을 지닌 사람이다.
커다란 눈망울. 앙다문 입술. 오똑한 콧날에 긴 속눈섭까지.
거리가 가깝다 보니 이연의 소소한 신체적 특징 하나하나가 다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다.
이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이연이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얌전히 눈을 감았다.
키스해도 괜찮다는 무언의 허락을 보여주는 동작이었다.
물론 실제로 키스를 하진 않는다.
어필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뿐.
그럼에도 정우재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다른 멤버들과 이렇게 연기를 펼칠 때에도 비슷한 감정이기는 했으나.
이연이 상대로 있을 때에는 특별함이 느껴졌다.
1분이 1시간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촬영감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네, 좋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촬영이 끝나자마자 이연은 정우재와 곧장 거리를 벌렸다.
이 순간 정우재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아까처럼 NG라도 몇 번 났으면 하는 바람이 든 것은 배우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뮤직비디오까지 무사히 촬영을 마친 이연은 오늘, 안무 연습에 매진 중인 멤버들과 별개로 잡힌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먼저 연습실을 나섰다.
“갔다 올게.”
“잘하고 와, 연이 언니.”
“우린 방송으로 보면서 응원하고 있을게.”
“파이팅! 가서 다른 팀들한테 절대로 기죽으면 안 돼!”
오늘이 바로 걸파이트 시즌 2 제작발표회가 있는 날이다.
하니엘은 리더인 이연이 대표로 출격하게 되었다.
제작발표회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이연은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박도수 매니저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아는 걸 몇 개 더 이야기해 줬다.
“기자들이 서로 오고 싶어서 막 경쟁 붙고 그랬다더라.”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따로 온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현장을 빠르게 지나친 이연은 오늘 제작발표회에 참가하는 팀들의 대표가 모여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하니엘을 제외한 모든 참가팀이 다 모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니엘의 이연입니다.”
이연과 초면인 선배 가수들은 이연과 마찬가지로 존댓말을 사용하면서 인사를 나눴다.
이중에서 유일하게 이연과 말을 놓은 사람이 있었다.
“연아!”
원더존의 리더, 윤채미였다.
‘근무 중 이상 무’ 여군 특집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전우애 이상 가는 우정이 생겼다.
이연을 옆자리에 앉힌 채미가 한껏 치장한 그녀를 보면서 끊임없는 감탄사를 흘렸다.
“어머어머, 오늘 메이크업 너무 잘 됐다. 아니지. 평소에도 그런가? 엄청 예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이연은 아니라고 부정해 보지만, 채미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연보다도 더 흥분한 채미가 그녀의 양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이연이 보기에는 채미도, 그리고 다른 팀 리더들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예쁜 사람 옆에 예쁜 사람. 또 그 옆에 예쁜 사람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걸그룹들의 리더가 한 자리에 나란히 모여 있으니, 그야말로 꽃밭이 따로 없었다.
여기에 마지막 꽃인 민주린이 모습을 나타냈다.
“안녕.”
“안녕하세요, 선배님!”
민주린이 오자, 팀 리더들 전체가 다 기상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민주린은 대선배니까.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한편, 군기가 바짝 든 팀 리더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연은 이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오늘 군대 예능 찍으러 온 거 아니지?’
옆에 자신과 같이 군복을 입고 고생했던 윤채미가 있으니까 더 그렇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