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57화
제17화. 연합(2)
오전부터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업무 서류들과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씨름을 마친 오채일 대표는 현재 시간을 확인하며 슬슬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컴퓨터를 끄고 겉옷을 챙기는 사이, 홍류현 실장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표님. 이제 퇴근하시나요?”
“아니, 오늘 서윤철 PD하고 같이 식사하기로 했거든.”
“아, 그렇습니까. 미팅인가요?”
홍 실장이 기억하는 오채일 대표의 스케줄에는 공식적으로 잡혀 있지 않은 약속이었다.
“그냥 서 PD님하고, 주린이하고. 셋이서 가볍게 한잔하려고 갑작스럽게 잡은 거야. 일 이야기는 안 하…… 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뭐. 서 PD가 고맙다는 뜻으로 나한테 한턱 쏜다니까. 가야지.”
“대표님한테 고마워할 만한 일이 있었나요?”
“시청률 대박 쳤잖아. 그걸로 서 PD가 위에서 이것저것 괜찮은 이야기를 들었나 봐. 이게 다 SSS 덕분이라고, 스타성 있는 연습생들 많이 보내주셔서 고맙다고 나한테 연신 그러더라고.”
스페셜 스타 스테이지는 예능, 음악 프로그램 부문에서 시청률 종합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권이연, 진절혜, 그리고 앨리샤. 이렇게 3명의 이름도 브랜드 평판 순위 차트에 들 만큼 막강한 인기를 자랑하는 중이다.
이렇다 보니 서윤철 PD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는 건 당연했다.
“아무튼 나, 늦었으니까 먼저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예,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대표님.”
“오케이.”
빠른 걸음으로 회사를 나선 오채일 대표는 오늘 약속 장소로 잡은 모 유명 중식집으로 향했다.
차를 세워두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안내했다.
룸 안에는 이미 서윤철 PD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표님 오셨군요!”
“어이쿠, 서 PD님! 벌써 와 계셨습니까?”
“오늘 대표님 만날 거라고 하니까 저희 국장님이 일 빨리 마무리 짓고 어서 가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아 참. 다음에는 국장님도 같이 만나서 한잔하실 수 있냐고 슬쩍 물어보시던데. 괜찮으시죠?”
“어휴, 저야 당연히 좋죠! 그때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희가 대접해 드려야죠! 그보다 주린 씨는 좀 늦나요?”
민주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딱 좋은 타이밍에 민주린이 마지막으로 합류에 성공했다.
“대표님. 제가 연락드렸는데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나한테 전화했었어?”
“네. 확인해 보세요.”
민주린의 말대로, 오채일 대표의 스마트폰에 그녀의 이름으로 부재중 통화 내역이 떠 있었다.
“미안. 내가 막 가게에 도착하고 나서 정신이 없었나 봐.”
“스마트 워치 같은 거 하나 구입해서 차고 다니세요. 전화 올 때 연동해서 바로 알려주고 좋더라고요. 영업하시는 분들도 중요한 전화 놓칠까 봐 일부러 시계 그걸로 바꾸시던데.”
“그래? 나중에 한번 알아봐야겠네.”
오채일 대표는 나이가 나이다 보니 이런 최신 기종의 트렌드를 잘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허허 웃던 서윤철 PD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배고프시지 않습니까? 여기 코스 요리가 유명한데. 그거 3인으로 미리 주문해 뒀으니까 한번 드셔보세요. 메뉴판은 옆쪽에 있으니까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면 보시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셔야죠! 주린이, 너는?”
두 아저씨의 반짝이는 눈빛이 민주린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했다.
“죄송해요. 저는 내일 아침에 촬영이 있어서 오늘은 술 마시면 안 돼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민주린은 녹화가 있는 전날에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
컨디션 조절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런 방송 습관을 오채일 대표도 잘 알기에 이 이상 음주를 권유하진 않았다.
그렇게 SSS의 또 다른 주역들이 나란히 식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셋이 모이면, 당연히 SSS에 관한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서윤철 PD가 먼저 고량주 한 잔을 들이켜면서 말했다.
“이번에 투표 결과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겁니다. 설마 그 진절혜 양이 12위라니.”
초반부터 제작진이 열심히 밀어준 연습생이 파이널 라운드를 목전에 두고 떨어질 뻔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일은 아직까지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채일 대표와 민주린은 2라운드 마지막 팀미션 때부터 이미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다.
심사 위원들의 평점도 2라운드 서바이벌 투표에 반영되었으니까 말이다.
민주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수가 본업이라는 걸 망각하게 되면 그런 벌을 받게 되거든요.”
그녀는 이런 경우를 숱하게 봐왔다.
연습생들이라고 특별히 결과가 다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연습생들이기에 이런 현상이 명확하게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진절혜가 간신히 막차를 타게 되었고.
이제 마지막 라운드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팀전인 만큼 팀 구성이 굉장히 중요할 텐데. 과연 어떻게 될지도 궁금하네요.”
서윤철 PD의 말에 두 사람도 같은 심정을 드러냈다.
녹화는 이틀 뒤에 진행될 예정이다.
그때 파이널 라운드에 대한 룰을 다시 한번 설명하는 시간을 가지고, 한배를 타게 될 팀들이 결정될 것이다.
이번에는 오채일 대표가 먼저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아마도 권이연 연습생과 진절혜 연습생, 이 두 사람들을 중점으로 팀전이 펼쳐질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 둘은 물과 기름이라서 절대로 섞이지 않을 거 같더라고요.”
“네. 아마도 그렇게 될 거예요.”
민주린도 같은 예상을 하고 있었다.
이때 서 PD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런데 진절혜 양하고 같은 팀을 맺으려고 할 연습생이 있을까요? 저는 그게 걱정입니다.”
초반의 기세와는 다르게 진절혜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계속해서 기록해 왔다.
2라운드 서바이벌 투표의 경우에는 그녀에게 상당한 크리티컬로 작용했다.
이런 와중에 과연 연습생들이 진절혜 쪽으로 붙으려고 할까?
서윤철 PD가 보기에는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린은 다르게 보고 있었다.
“팀 다재다능과 권이연의 독주에 불만을 가지는 연습생들이 꽤 되더라고요. 절혜는 그 연습생들을 포섭하려고 할 거예요.”
“더 큰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연합을 맺는다…… 이런 뜻인가요?”
“네, 그렇죠.”
모든 연습생이 다 권이연과 다재다능 멤버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이건 경쟁 프로그램이다.
나보다 더 뛰어난 연습생들이 최소 네 명이나 있는데. 이걸 좋아할 만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방법은 두 가지다.
다재다능 멤버들을 제외한 남은 두 자리에 어떻게든 들어가서 그쪽과 팀을 맺든가.
아니면 다른 팀으로 들어가서 강력한 라이벌들을 전부 떨어뜨리고 승자가 되든가.
민주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절혜를 제외한 7명의 연습생이 전부 다 다재다능 팀의 남은 두 자리를 노리진 않을 거예요. 필수적으로 다섯 명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데. 어쭙잖게 다재다능 쪽의 두 자리를 노리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반(反) 다재다능 팀을 구성하는 게 더 안정적이겠죠.”
“듣고 보니 그렇군요.”
민주린이 술 대신 냉수를 들이켜면서 말했다.
“파이널 라운드는 더 재미있어질 거예요.”
권이연 VS 진절혜.
다재다능 팀 VS 반(反) 다재다능 연합.
“벌써부터 구도가 그려지는군요.”
서윤철 PD의 입가에 여태껏 보지 못했던 짙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 * *
2라운드가 끝나고, 첫 파이널 라운드 녹화가 시작되는 날이 밝았다.
22명이었던 연습생들이 이제는 12명밖에 되지 않아서일까.
좁게만 느껴졌던 스튜디오가 오늘은 휑하게만 느껴졌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연습생들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권이연과 진절혜, 두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연습생들.
그리고, 어느 한 곳을 고르지 않은 제3의 세력들까지.
이 3의 세력에는 이연이 염두에 두고 있는 나여솜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미가 이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솜 씨 데려오기로 했다면서? 어떻게 됐어?”
“이야기는 나눠봤는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랬어.”
“우리랑 같이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되나?”
“나는 그렇게 보고 있어.”
문제는 진절혜 쪽에서 과연 어떤 회유책을 썼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마침 권이연과 진절혜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진 표정을 하고 있는 진절혜.
그녀를 탈락 위기까지 몰아세웠던 이연이지만, 그렇다고 진절혜를 한물간 연습생이라는 생각까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다.
그만큼의 저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연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현장을 가득 채워갈 무렵.
서윤철 PD가 확성기를 들고서 외쳤다.
“5분 뒤에 녹화 시작할 예정이니까 화장실 다녀오실 분들은 다녀오시고, 다들 자리에 앉아주시면 됩니다!”
“네!”
서윤철 PD의 말대로 연습생들은 볼일을 보고 오거나 물로 목을 축이면서 방송 준비를 마쳤다.
잠시 뒤.
마이크를 든 이은솔이 연습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이은솔의 인사에 연습생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확실히 다운되어 있는 분위기였다.
여태껏 함께했던 동료들이 탈락했으니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이은솔도 연습생들의 기분이 어떤지 잘 안다.
그래도 이들은 연예인이지 않은가.
어떤 일이 있어도 카메라 앞에서는 늘 웃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특별한 무대를 마련해 봤습니다. 즐기실 준비 되셨나요?”
연습생들은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특별한 무대라니.
전혀 들은 게 없었다.
이은솔이 손짓하자, 깜짝 손님들이 무대 위에 올랐다.
그가 속해 있는 대한민국 최정상급 보이 그룹, 벡스 멤버들이 SSS를 찾아온 것이다.
벡스의 리더인 제운을 비롯해서 민호, 태찬, 그리고 이은솔까지.
사정상 모든 멤버가 모인 건 아니었지만, 벡스 멤버가 넷이나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벡스입니다!”
“앉아 있지 마시고 다들 일어나서 같이 놀아봅시다!”
“Wake up!”
벡스 멤버들이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하자 연습생들도 덩달아 하이 텐션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보이 그룹의 퍼포먼스에 연습생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강렬한 비트와 함께 펼쳐지는 칼 같은 군무.
라이브인데도 불구하고 호흡 하나 흐트러지는 것 없이 무대를 소화하는 모습이 이연에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최고라 불리는 자들은 어느 세계든 확실히 클래스가 달랐다.
그들의 무대를 보면서 이연은 결심을 굳혔다.
언젠가는 자신만의 그룹으로 저들이 선보이는 퍼포먼스 이상의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고.
아이돌이 되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