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56화
제17화. 연합(1)
드디어 공개된 12위 연습생.
화면 한가운데에 떠 있는 이름은 바로 진절혜였다.
[12위. 진절혜]
남은 연습생들이 그녀에게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박수를 보냈다.
그럼에도 진절혜는 기뻐하는 표정을 짓지 못했다.
오히려 눈물을 쏟아냈다.
분함.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창피함.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눈물에 전부 담겨 있었다.
카메라는 다시 이은솔을 비췄다.
“이상으로 SSS 2라운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저희는 파이널 라운드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은솔의 마지막 멘트와 함께 카메라가 서로를 위로하는 연습생들을 비췄다.
팀 1위 아니면 죽음을 달라 멤버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진절혜를 포함해서 단 두 명뿐.
처참한 성적이었다.
녹화가 끝나자마자 이연은 바로 대기실로 향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권이연.”
진절혜의 가득 잠긴 목소리가 권이연을 잠깐 멈춰 서게 만들었다.
“파이널 라운드에선 절대로 안 질 거야.”
독기마저 담겨 있는 그녀의 경고에 이연은 여전히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한번 해보든가.”
챔피언과 도전자의 위치가 서로 뒤바뀌게 되었다.
* * *
녹화가 끝나고 이틀 뒤.
권이연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집에서 좀 떨어져 있는 카페로 향했다.
매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연은 자신이 들었던 말에 대해 떠올렸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라고 했었는데. 정말로 그렇긴 하네.’
토요일 오전. 웬만한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도 남았어야 할 타임이다.
그럼에도 이연이 찾은 이 카페에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카페 주인으로 보이는 한 노인이 이연을 바라보면서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우리 가게가 젊은 사람들이 찾아올 만한 곳은 아닌데…….”
노인의 말대로였다.
확실히 가게 인테리어가 젊은 층을 겨냥했다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그래서 가게에 사람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연은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일부러 자신을 배려해서 이런 인기 없는 카페로 약속 장소를 잡은 줄 알았다.
“주문해도 될까요?”
“네. 메뉴는 앞에서 보시면 됩니다.”
카페 메뉴들도 세월의 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낡은 느낌이 진하게 풍겼다.
“다방 커피 한 잔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자리는 아무 곳에 가서 앉아도 된다고 했다.
가게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은 이연은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보면서 잠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사이, 다시 한번 카페 문이 열리면서 나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오늘 이연이 만나기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이연 씨. 안녕하세요.”
나여솜이 이연처럼 안경과 마스크,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카페 안에 들어섰다.
그럼에도 카페 주인은 나여솜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여솜아. 네 손님이었니?”
“네, 사장님. 아,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이연 씨는 뭐 마실래요?”
권이연이 대답하기 전에 카페 사장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 아가씨는 이미 주문했어. 다방 커피로. 이거하고 같이 가져다줄 테니까 가서 이야기 나누고 있어.”
“감사해요, 사장님.”
원래 이연은 2라운드 서바이벌 투표가 끝나고 바로 나여솜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 투표는 워낙 반전에 반전이 많았기도 했고.
나여솜도 잠깐 마음의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이연은 오늘 자로 약속을 잡게 되었다.
나여솜이 이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이연 씨가 저를 따로 보자고 해서 엄청 놀랐어요.”
“사실은 언제 한 번쯤은 이렇게 둘이서 속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오늘에서야 겨우 성사되었다.
“가족분들한테는 투표 결과 말해주셨나요?”
이연이 먼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여솜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이면서 가족들이 보였던 반응에 대해 알려줬다.
“엄청 기뻐하시더라고요. 제가 이거 때문에 가족들 앞에서 힘든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서…… 그거 때문에 더 기뻐하셨던 거 같아요. 2시간 동안 엄마하고 끌어안고 엉엉 울었던 기억밖에 없어요.”
이번에는 반대로 나여솜이 이연에게 물었다.
“이연 씨 가족분들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저는 아직 말 안 했습니다.”
“……네?”
나여솜의 커다란 눈이 여러 차례 깜빡였다.
“마, 말을 안 했다고요? 왜요?”
“PD님이 방송 나가기 전까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 결과 발설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요.”
“아니, 그래도 가족들한테는 말해줄 수 있을 텐데…….”
“이틀 후에 바로 방송으로 나갈 테니까요. 그때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나여솜은 입이 근질거려서 도저히 못 참을 거 같은데. 이연은 이게 뭐 대수라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가족들 앞에서 입에 지퍼를 잠그고 있었다.
나름 SSS에 오랫동안 같이 출연하면서 권이연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여솜은 이게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근황 토크를 이어가던 때에, 카페 사장이 이들에게 직접 마실 음료를 가져다줬다.
이연이 주문한 다방 커피와 함께 등장한 정체불명의 음료.
가게 사장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마자 이연이 나여솜에게 그게 뭔지를 물었다.
나여솜은 숟가락으로 음료를 휘적휘적 저으면서 답했다.
“쌍화탕이에요. 이거, 엄청 맛있어요.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여기 와서 마시고 가고 그러거든요. 이연 씨도 한번 마셔볼래요?”
“아니요. 저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외형과 다르게 나여솜의 입맛은 상당히 올드한 취향이었다.
처음에는 콘셉트일 줄 알았는데, 맛있게 마시는 걸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후릅.
나여솜의 입에서 소주 한 잔을 그대로 들이켠 아재의 전형적인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캬아……! 이 맛이지!”
구수함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리액션을 보면서 이연은 쓴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 연습생들을 만나다 보면, 뭔가가 하나씩 톡톡 튀는 개성 같은 걸 지니고 있었다.
이연은 자신이 아직 SSS에 참가하는 연습생들에 대해 다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 일부러 나여솜을 보자고 했던 건 아니다.
“여솜 씨한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한테요?”
“네.”
이연은 1위 후보가 된 소감을 드러내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머릿속에 온통 파이널 라운드에 대한 생각뿐이라고.
그녀는 파이널 라운드에서 우승하기 위한 계획을 이미 완성해 뒀다.
“파이널 라운드는 개인전이었던 것과 다르게 팀전으로 진행된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 물론이죠.”
6 대 6.
이 중에 단 한 팀만이 데뷔의 꿈을 이루게 된다.
“저는 우미 언니하고 비아, 앨리샤. 이렇게 셋은 무조건 데려갈 생각이에요. 그러면 이제 남은 인원은 딱 두 명이죠.”
“그 두 명 중 한 명이…….”
“네. 나여솜 씨가 저희하고 같은 팀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나여솜은 권이연이 1라운드 때부터 줄곧 눈여겨보고 있었던 연습생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에 안정적인 보컬 실력까지.
물론 안무 파트에선 약간의 부족함이 보였지만, 그래도 사랑의 요정들이라는 인지도가 제로에 가까웠던 팀을 1위까지 올려놓았을 정도로 팀장으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이연이 리더를 맡고 있지만, 그녀가 부재중일 경우에는 나여솜이 그 빈자리를 대신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브리더, 서브보컬. 이 포지션으로 나여솜을 데려오고 싶었다.
“어때요. 저희 팀으로 오시겠어요?”
“그게…….”
나여솜의 반응이 애매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연은 뭔가를 깨달았다.
“진절혜가 먼저 여솜 씨한테 팀 맺자고 말했나요?”
“…….”
나여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12위로 간신히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하게 된 진절혜는 현재 타도 권이연과 1위 재탈환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는 상황이다.
나여솜의 포섭 역시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파이널 라운드의 팀 구성 방식은 연습생들끼리 알아서, 자유롭게 하라고 되어 있었다.
누구한테 먼저 팀 선택권이 주어진 건 아니었기에 이렇게 방송이 아닌 자리에서 사적인 만남을 통해 내 팀원이 될 연습생을 미리 포섭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번에는 진절혜가 한발 빨랐다.
하지만 이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쪽으로 가기로 결정한 건 아니죠?”
“네. 생각해 본다고 했어요.”
그러면 상관없다.
이제부터 나여솜을 꼬시면 되는 거니까.
권이연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상체를 나여솜 쪽으로 크게 기울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녀들의 거리.
나여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왜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이연의 미모에 나여솜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권이연은 결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팀으로 와요, 여솜 씨. 내가 잘해줄게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여솜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귀까지 새빨개진 나여솜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좋을지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권이연의 유혹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나여솜이 직접 당해보니,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고민 좀 해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저도 이 자리에서 당장 대답을 들으려고 온 건 아니니까요.”
데뷔가 걸려 있는 일인 만큼, 생각 없이 정해 버리면 큰일이다.
진절혜 팀에 붙을지.
권이연 팀에 붙을지.
이지선다의 기로에 선 나여솜.
권이연은 그녀가 현명한 선택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2차 서바이벌 투표 방송이 방영된 후, 대한민국 전체가 크게 들썩였다.
방송가에서도 온종일 SSS에 관련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제야 결과를 알게 된 권이연의 가족들.
권민준은 누나에게 축하의 말과 동시에 섭섭한 마음도 전했다.
“아니, 파이널 라운드 진출했으면 진작 좀 알려주지. 세상에 가족들한테조차 비밀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여기 있잖아.”
누나의 냉담한 한마디에 권민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중간 과정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론 누나가 무사히 파이널 라운드 무대에 서게 되었으니까. 잘된 셈이었다.
게다가 1위로 진출하지 않았나.
“이대로 쭉 가면, 데뷔도 무난하겠네.”
권민준은 그렇게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권이연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오히려 이번 파이널 라운드가 더 힘들 거야.”
“왜? 누나, 여태껏 쭉 상위권이었잖아. 무조건 데뷔 아니야?”
“이번에는 팀전이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팀 전체가 대중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마지막에 가서 떨어질 수도 있어.”
A팀일지, B팀일지. 팀 단위로 투표가 진행되기 때문에 아직 방심은 금물이다.
나여솜이 다섯 번째 멤버로 합류한다 치고.
‘마지막 한 명을 누구로 할지가 고민이네.’
최고의 팀을 꾸리기 위해서 이연의 머릿속은 오늘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