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40화
제12화. 너의 그림자가 되고 싶어(1)
무아지경 상태에 돌입하면서 순식간에 콘티를 완성시킨 이연.
다 만들고 나서 콘티를 찬찬히 살펴보던 그녀는 딱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거, 누가 봐도 자신이 여주인공 역할에 잘 어울릴 거 같다고.
우미가 지적한 대로, 권이연 본인도 똑같이 생각했다.
그럼에도 일부러 우미에게 떠보듯 역할을 양보하려 했던 건 다름이 아니라…….
낯선 남자와 연인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만약에 자신이 남자 역할이고, 여성 배우와 이런 연기를 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자신이 여자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이 꼰대 방식과 유교 사상으로 가득 물들어 있는 이연이었기에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미에게 슬쩍 떠밀려고 했지만.
우미는 이연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날카로운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금방 들통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비아와 앨리샤도 우미의 의견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나도 이연 언니가 맡는 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비아 말대로야. 이거, 누가 봐도 이연이한테 딱이잖아. 너 같은 진지충만 소화할 수 있는 연기라고.”
꼰대, 유교 걸에 이어서 진지충까지.
점점 이연의 별명이 늘어나고 있었다.
우미가 이은솔에게 의견을 구했다.
“선배님이 보시기엔 어떠세요?”
화살이 자신에게 넘어오자, 이은솔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오랜 생각 끝에 그가 들려준 대답은 이러했다.
“우미 씨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분위기나 그간 봐왔었던 표정 연기 실력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이연 씨 쪽에 더 무게감이 실릴 수밖에 없긴 하지.”
그러면서 이은솔은 우미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안해, 우미 씨. 그렇다고 내가 우미 씨를 낮게 평가하는 건 절대로 아니야.”
“네. 알고 있어요, 선배님.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누군가가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둘 다 어울리는데 그중에서 특히나 이연이 더 찰떡이라는 점 때문에 이런 선택지를 고르게 되었다.
이연 본인도 알고 있기에 이번만큼은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싫지만.
팀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무대를 위해서라면.
이연이 여주인공 역할을 맡는 게 낫다.
깊은 한숨을 내쉰 이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 역할 맡을게요.”
콘티를 작성하면서 얼추 예상은 했지만.
결국 이연의 불안했던 예상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 * *
어제 하루 종일 스파르타식으로 연습해서 그런 걸까.
어제에 비해서 연습생들은 1절 안무만큼은 많이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이은솔도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습생들을 향해 짧게나마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들 잘했어. 그래도 하루 만에 이 정도까지 해낸 건 대단한 거니까.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자. 알았지?”
“네, 선배님!”
“그럼 오늘은 어제 안무 회의했던 거 연습하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 이연 씨하고 나하고 그…… 오프닝 연극 연습도 좀 하자. 어때?”
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답했다.
안무만큼 빡센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보여지는 장면이기에 연습은 당연히 필수다.
“대본도 이연 씨가 적어 온 걸로 할 거지?”
“선배님께서 수정하고 싶은 대사 있으면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아니, 난 괜찮아. 아까 보니까 대사가 어렵지 않고. 외우기도 쉽게 되어 있어서 그대로 가도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이은솔에게 컨펌도 받았으니.
상황극은 이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1절 안무에 이어서 2절 안무를 연습하는 시간으로 넘어갔다.
이은솔도 이건 처음 해보는 동작이었기에 댄스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으면서 연습생들과 같이 배우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도 역시 현직 가수는 다른 모양인지, 연습생들에 비해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안무를 따는 모습을 보였다.
분명 시작은 같았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이은솔이 다시 연습생들의 안무를 봐주고 가르치는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사실 이연도 이미 이은솔만큼 누군가에게 지적과 가르침을 받는 단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이은솔은 이연에 대해서만큼은 딱히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잘하는 연습생에게 굳이 잔소리를 왜 할까.
그건 이은솔의 방식이 아니다.
나머지 안무 연습까지 모두 마친 뒤.
드디어 대망의 오프닝 연극 연습에 돌입했다.
이은솔이 대본을 보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무라면 몰라도, 연극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애매하네.”
그래도 기왕이면 퀄리티 있는 오프닝 무대를 꾸미고 싶었다.
“오늘은 리딩 식으로 대충 행동만 맞춰보고, 이다음부터는 내가 아는 지인 데려와서 봐달라고 할 테니까 그때 본격적으로 연습해 보자. 알았지?”
비아가 눈빛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선배님! 지인이라면 혹시…… 배우분이신가요?”
“뭐, 그렇지.”
어떤 일을 하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봐주면 능률이 상승한다.
이은솔의 말에 연습생들의 기대감이 샘솟았다.
서로 대본을 보면서 첫 번째 장면부터 호흡을 맞춰보기로 한 이들.
첫 장면, S#1은 이연과 이은솔이 연인으로서 다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장면이다.
물론 오늘은 본 무대처럼 연습해야 하는 게 아니라 리딩 단계이기 때문에 감정을 실어서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대충은 맞춰봐야 했기에 이은솔이 먼저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다.
“그, 그럼 갈까?”
쉬운 대사조차도 살짝 절을 정도로 긴장을 많이 했다.
이은솔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던 이연도 나름 큰 결심을 굳혀야 했다.
손을 마주 잡고서 현 표정과는 전혀 다른 대사를 읊었다.
“오늘은 오빠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돼.”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걸로 먹자.”
“오빠도 참.”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는, 말 그대로 국어책 읽기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이은솔은 이 상황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음을 느꼈다.
가상이긴 하지만, 권이연과 연인이라는 상황이 그를 당혹게 만들었다.
어렵게 S#1을 소화하고.
이다음, 이연이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신으로 넘어갔다.
이 ‘친구들’ 역할은 다재다능 팀원들이 맡기로 했다.
“내일 봐!”
“조심해서 들어가고.”
“응, 알았어.”
늦은 시간.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조명이 꺼진 곳으로 걸어가는 이연.
그녀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끼이익!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이어질 것이다.
여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함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지금이야 오디오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백댄서 중 한 명이 대신해서 효과음을 말로 외쳤다.
마지막 S#3.
불 꺼진 조명 아래로 잠시 몸을 숨겼던 이연이 다시 등장한다.
억지로 슬픔을 감추려는 듯이, 울음을 참는 표정으로 이은솔에게 작별을 고한다.
“오빠. 더 이상 나에 대해서 미련 가지지 말고…… 이제 그만 잊어줘. 행복해야 돼, 오빠. 사, 사, 사…….”
사랑해. 마지막에 이 한 마디가 걸렸다.
아무리 상황극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리딩이라도.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 이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연이 먼저 NG를 자처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아니, 괜찮아. 어차피 대사 한번 맞춰보는 거였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말해도 돼.”
감정이 담기지 않아도 된다.
이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은솔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스로 세뇌를 시키다시피 한 이연이 결국 어렵게 대사를 이어나갔다.
“오빠. 사…… 랑…… 해…….”
마치 총을 맞고 죽어가는 캐릭터처럼 한 글자씩 띄엄띄엄 말하는 이연.
어차피 리딩이니까. 연기력과는 상관없는 연습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연이 슬쩍 옆으로 퇴장하면, 이은솔은 이연이 사라진 방향으로 손을 뻗으며 미련이 남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면 된다.
여기서 화면이 전환되고. 본격적으로 무대를 펼치면 된다.
이은솔이 대본을 내려놓으면서 연습생들에게 물었다.
“오프닝 영상은 미리 촬영해 두는 편이 좋겠지? 녹화 현장에서 상황극에 무대까지 연달아 소화하기는 힘들 거잖아.”
한참 이전 시대에는 음악 방송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안 좋은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진 탓에 이제는 대부분 녹화 방송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 덕분에 ‘녹화’라는 이점을 살린 연출 방식도 점차 늘어갔다.
이은솔이 말한 것도 이에 따른 이점 중 하나였다.
“미리 녹화를 해두면, 그만큼 그날 부담감도 많이 줄어들 테고. 그리고 복장에 대한 제한도 사라질 테니까.”
상황극과 무대를 연달아 이어붙이면, 옷을 바로 갈아입을 수가 없기 때문에 똑같은 복장 그대로 서야 한다.
한 번 서는 무대라도 최대한 다양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다.
이 다양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은 바로 의상이다.
기왕이면 녹화방송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은솔이 이런 제안을 먼저 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선 이연도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네. 그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알았어. 그럼 그것도 내가 미리 말을 해놓을게.”
차근차근 진행되어 가고 있는 팀 다재다능의 무대 준비.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이번에는 무대 평가를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웬만한 것들은 다 예측이 가능했던 이연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작진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시청자 투표로 정하는 게 가장 보편적이긴 할 테지만.
‘집계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테니까 그건 힘들 거고.’
아니면 치어리딩 미션 때처럼 무대를 보기 위해 찾아온 방청객들에게 실시간으로 투표권을 줘서 평가를 받는다…… 라고 생각하기에도 힘든 점이 있었다.
다른 가수팀을 보러 온 팬들도 있을 텐데. 그들이 과연 협조적으로 임해줄지 걱정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어제 이은솔이 차로 바래다줄 때 슬쩍 물어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다고 말해주진 않았을 테지.’
이은솔이 후배들에게 잘 대해주려고 하는 성향이 있긴 하지만, 공과 사는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제작진이 꼭 비밀을 지켜달라고 말한 게 있다면, 아무리 친한 연습생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 터.
이은솔뿐만 아니라 심사 위원들도 그럴 것이다.
‘딱 한 사람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이석호 트레이너.
이번에도 그가 진절혜에게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진절혜는 음방 미션이 어떤 식으로 평가가 진행될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염탐해 보고 싶어도 못 하겠네.’
이전 미션들처럼 LC 엔터테인먼트 안무 연습실에 모여서 연습하는 환경도 아니고. 각자 파트너로 지정된 선배 가수팀의 회사에서 연습하기로 진행되고 있는 탓에 슬쩍 진절혜를 떠보는 것도 힘들다.
이렇게 된 이상.
답은 하나밖에 없다.
‘무대 완성도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겠어.’
좋은 평점을 받는 법.
이거 말고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보였다.